https://youtube.com/shorts/zrzmi2vggLE?si=fzlkv_49uNhQuWa6
[서론]
상좌부 불교의 논서인 <청정도론>은 5세기 붓다고사 논사가 수집정리한 논서로 현 남아시아 불교의 핵심 논서이고,
4세기에 활동한 세친(바사반두)의 <아비달마구사론>은 동아시아 불교의 핵심 논서가 있다.
두 논서는 거의 비슷한 주장을 담고 있으므로 현재 불교는 이론적으로 거의 비슷한 바탕을 갖고 있다.
비디오의 각묵스님은 남아시아 불교인 상좌부 불교를 공부한 학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상좌부 불교 전도에 많은 애를 쓰고 있는 스님이다.
상좌부 불교를 우리는 소승불교라 불렀다.
이유는 소승이라 불린 상좌부 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를 전하고 있는데 반해 출가자와 함께 재가자도 불교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학인들은 스스로를 대승불교라 이름하고 상좌부 불교를 소승불교라 칭했다.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언뜻 보면 대승불교가 좋은 것 같은데..
각묵스님은 상좌부 불교를 대승불교 국인 우리나라에 전하는 이유가 무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근대 한국 불교의 비정상적인 모습 때문으로 대승불교의 잘못은 아니다.
[본론]
스님은 소승이라 불린 상좌부 불교를 초기불교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마치 석가세존의 불교를 지칭하는 것처럼 들린다.
석가세존의 오리지널 가르침이 전해지던 기간은 비씨 5세기에서 비씨 4세기 쯤으로.. 100년 미만이며 근본불교 시대 또는 원시불교 시대라 지칭한다.
그러던 불교는 비씨 4세기에 상좌부 불교와 대중 불교로 나뉜다.
이름 그대로 전자는 오랫동안 수행한 상좌인 지도자가 가르치는 것을 따른다는 전통 중시 상좌부 불교와
재가자와 새로 출가한 자들이 불교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연 진보적인 대중 불교로 나뉜 것이다.
새로 출가한 자들이란 당시 힌두교인 브라흐마교가 불교에 밀려 주류에서 밀려나자 브라흐마교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이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들의 지식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전해지는 불교를 브라흐마교 눈으로 해석하여 당시 출가자 중심 불교가 자연스럽게 오픈되는 현상을 낳은 것이다. 대승경 안에 힌두교가 들어갔으니.. 그 좋은 예가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주문]이다.
다라니가 좋냐 나쁘냐를 떠나 그것은 석가세존의 정통 가르침은 아니다. 불자들에게는 매우 유용하다고 여기지만..
각묵스님은 결국 상좌부불교를 강조하려다 보니 대승불교 핵심 가운데 하나인 공을 사정없이 비판하는데..
공의 폐해는 분명히 있다.
공 이해에 대한 어려움이.. 경 내용을 떠난 다라니나 기도 등에 관심을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지 아니 한가.
불자를 무지하게 이끄는 이것은 심각하기에 대승불자들은 스님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만 한다.
기독교를 보면 그들에게 <성경>은 주식이다. 성경 공부야 말로 진실한 기독교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기도나 단식 등은 간식이라는 것.
그러나 불자에게 불경은 어떤가? 불경을 몰라도 얼마든지 멋진 불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해서 불자이지만 불경에 대한 문맹자가 적지 않다.
그러기에 각묵스님이 남아시아에 전해진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목적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런가?' 하고 듣기만 한다.
위에서 상좌부와 대승의 차이가 무엇이라 했던가..
전자는 출가자 중심이고, 후자는 재가자 중심이라 했는데.. 어떻게 목적이 같다고 할 수 있느냐 말이다.
물론 사람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이 같은 종교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상좌부 불교는 출가자 중심인 개인 수행이 중심이고, 대승불교는 출가자와 재가자 중심이니..
대승불교 안에서 수행자 눈으로 보면 상좌부불교와 근본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재가자를 빼버리면 대승불교가 아닌 불교가 된다.
그리고 스님이 말하듯 <청정도론>과 <구사론>은 자세하고 분석적인데 반해 <반야경> 등은 직관적이다.
그런데 말이다.
출가자는 하루 24시간 불교를 가까이 하는 삶이지만.. 재가자는 하루 3시간 불교를 가까이하기도 어렵다.
그런 재가자에게 불교를 자세히 분석적으로 공부하여 메모리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는 숏 비디오가 적당하듯 짧게 요약한 것을 전해야 한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직관적인 불교가 된다.
각묵스님 비난하는 공, 공, 공은 바로 불교 논서를 직관적으로 정리한 예가 된다.
시간이 충분하면 논서로 공부하며 좋을 것이나, 시간이 촉박하다면 방편으로 직관인 공이 좋다는 것.
그런데 <청정도론>이나 <구사론>이 나온 4, 5세기 불교는 12처를 심연생이 아닌 6근6경과 같은 존재로 알던 시기였다.
결국 근본 불교의 핵심인 심연생이 사라진 불교가 상좌부 불교요, 대승불교로..
성불의 길을 막아놓은 불교라는 것.
어허.. 그 정도로 심각한가!.
그렇다면.. 성불의 길을 열어놓으려면 <청정도론>이나 <구사론>은 폐기해야만 하나?.
두 논서를 세심히 보지 않아.. 확실히 말하기 어렵지만..
12처가 심연생임을 깨닫고 불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며..
<청정도론>의 5온에서 12처가 생긴다는 과정 설명에 대해 매우 쎄게 비판하지만..
각묵스님을 존경하는 걸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은가 한다.^^.
[결론]
<초전법륜경>을 보면 다섯 사문 가운데 꼰단냐 사문이 4성제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15.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집법즉멸법'을 해석하면..
"일어난 법은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실제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말은 일어난 법은 시간을 요하지 않고 사라진다.
고로 마음에 있는 심상일 뿐 존재가 아니다." 라는
12연기의 환멸문인 깨달음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12처를 존재로 이해하니.. 꼰단냐 깨달음을 생이 있으면 멸한다는 생멸법으로 설명하여
진정한 뜻의 환멸문이 실종하고 말았다.@.
#손바닥 위를 걷다, #각묵스님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