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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들어온 태빈은 어깨에 드리워졌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풀썩
주저앉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시험 잘 봤어?”
“망했어.”
주방에서 거실로 걸어 나온 연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실 웃으며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태빈은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연두를 바라보았다. 핑크색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바라보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주고 반겨준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고 소중한 일상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태빈은 대학에 들어오면서 이곳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었다. 물론 부모님과 집에서
함께 살 때도 가족이 자신을 반겨주거나 기다려준 적은 없다고 느꼈었다. 항상
일에 쫒기 듯 사시는 아버지, 술과 담배에 절어 계시던 어머니. 물론 지금은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라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태빈이 중,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어머니께선 늘 병원에 들락날락 거리시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시지 못하셨다. 게다가 집에 계신다 하시더라도 항상 방에 틀어 박히셔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시거나 술을 드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태빈에겐 오히려
집으로 귀가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녀석에게 이렇듯 연두가 말을 걸어주고 또 웃어주니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비록 지금은 부부도 연인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이긴 하나 그래도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만 같고 좋았다.
“매일 수업 빼먹고 땡땡이 칠 때 알아봤어. 너 그렇게 건성으로 학교 다니다
서른 전에 졸업하겠어?”
“놀리지 마라.”
태빈은 상체를 일으켜 세워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어 앉았다. 시험을 생각하자니
괴로운 듯 머릴 마구 헝클어뜨렸다.
“식탁에 저녁 차려 놨으니까 먹어. 난 그만 퇴근해도 되지?”
“저녁 먹고 가.”
“아니야,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순간 태빈은 뒤돌아서는 연두의 소매 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연두에게
평소와 다르게 다소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 너도 집에 가봤자 혼자 먹어야 되잖아.”
연두는 잠시 망설였다. 태빈의 말대로 연두는 집에 가면 혼자 저녁을 먹어야 했다.
효선은 늦은 퇴근 시간 때문에 대부분 미용실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왔다. 그러니
혼자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건 조금 귀찮은 일이었다.
“좋아.”
연두는 방긋 웃어 보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태빈은 그럴싸한 밥상을 기대하며
연두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식탁을 내려다 본 녀석은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뭐야?”
“뭐가?”
“이걸 지금 먹으라는 거야?”
“응. 왜?”
식탁위엔 된장찌개.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해 된장이 풀어진 국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낫을 것 같다. 그 국물과 달랑 김치 하나, 밥 한 그릇이 전부였다.
“이게 국이야, 찌개야?”
“찌개지. 이름하야 강 연두표 얼큰 된장찌개.”
“여기에 뭐 넣었어?”
“음, 된장 넣고, 풋고추 넣고, 무도 넣었어. 여기 봐, 밑에 가라앉아서
그렇지 다 들어있어.”
연두는 숟가락을 집어 들고 된장찌개라고 끓인 뚝배기 속을 이리저리 저어
보였다. 과연 그 뚝배기 속엔 가뭄에 콩 나듯 무 한 조각이 떠올랐다 가라앉고,
고추의 파편들이 후르륵 떠올랐다 가라앉곤 했다.
“보기엔 이래 뵈도 먹어 봐. 얼마나 맛있는데. 밥 2공기는 뚝딱 이다?”
태빈은 내키진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식탁머리에 앉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녀석은 숟가락을 들었다. 연두도 곧 밥과 수저를 챙겨들고서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태빈은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은 뒤 된장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연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녀석은 긴장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 속으로 넣었다.
“우욱.”
태빈은 찌개 국물을 입에 넣고 두어 번 씹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달려갔다. 아마도 욕실로 뛰어가는
듯 보였다. 태빈의 뒷모습을 실망스런 눈으로 지켜보던 연두는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의 맛을 보았다.
“맛있는데 왜 저러지?”
연두는 숟가락에 밥을 넘치듯 떠서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된장찌개도
휘휘 저어서 숟가락 가득 퍼 올려 입에 넣었다. 도대체 태빈이 녀석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주 맛있게 식사를 했다. 우적우적 잘도 씹어
대는데 태빈이 막 입을 헹구었는지 촉촉한 입술로 다시 식탁 앞에 나타났다.
“야, 이게 무슨 된장찌개야. 내가 살다 살다 이런 맛은 처음 본다. 이런 걸
어떻게 먹어? 이런 건 진짜 개나 먹지 사람이 먹을 게 아니야.”
순간 두 볼 가득히 밥과 찌개를 밀어 넣고서 나름 맛있게 먹고 있던 연두는
매서운 눈으로 태빈을 쏘아보았다.
“뭐라고? 그럼 맛있게 먹고 있는 나는 뭐야? 내가 개란 말야?!”
흥분한 연두는 입속 가득 밥이 있단 사실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구
소릴 질렀다. 덕분에 태빈의 뺨 위에, 그리고 식탁 위로 눈처럼 밥풀들이
쏟아져 내렸다. 연두의 입속에서 마구 쏟아지는 파편을 피하기 위해 태빈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위가 잠잠해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연두는 여전히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볼에 붙은 밥풀들을 손으로 떼어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역시나 한 박자 늦추어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연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미안해. 니가 성의껏 만든 음식을 개나 먹어야 된다고 말한 거. 그런데
솔직히 난 진짜 못 먹겠어. 요리에 자신이 없다면 밖에서 사먹던지 시켜 먹으면
되니까 앞으로 요리는 하지 마. 알았지?”
연두는 태빈의 말에도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의 된장찌개가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상하고 다른 한편으론 서운하기도
했다.
“뭐가 문제야? 부잣집 도련님 댁에선 된장찌개에 금가루라도 뿌려 먹어?”
“아니, 그냥 내 입 맛에 안 맞다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입이 고급이라 이런 저급한 된장찌개 따윈 못 먹겠다는 거로군.”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잖아!”
태빈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화가 폭발해 버렸다. 연두와 정말 싸우기 싫었다.
여태 티격태격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론 좋은 일들만,
기쁜 일들만 있기를 간절히 바랬건만 어째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다투게 되는
것일까. 태빈와 연두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요리 잘하는 파출부로 다시 구해봐. 난 니 고급스런 비위에 맞출 수 없으니까.”
연두는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팽개치더니 태빈의 어깨를 부딪치고서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현관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태빈은 연두가 사라진 식탁 앞에 그대로 서서 문제의 된장찌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화가 났다. 저 놈의 찌개 따위 때문에 연두를 잃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끓어오른 태빈은 식탁 위에 차려진 그릇들을 거칠게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바닥으로 나뒹굴어진 뚝배기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리고 된장 국물이 바닥에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냄새가 진동했다. 두 동강 난 뚝배기는 마치 연두와 태빈처럼
느껴져 더욱 가슴이 아팠다.
태빈의 아파트를 빠져나온 연두는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연두도 속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녀는 요리엔 취미가 없었다. 평소에도 늘 효선이
끓여주는 국이랑 찌게를 얻어먹던 연두였다. 그래서 한 남자를 위해 무언가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린다는 것은 나름 굉장한 일이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태빈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임과 긴장된 맘으로 정성껏 상을 차렸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처참했다. 맛이 없더라고 왠지 태빈이는 맛있게
먹어줄 것이라 막연한 기대를 해서일까. 연두는 속상함과 서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자릴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솔직히 녀석이 자신을 붙잡아
줬으면 하는 맘도 들었다. 파출부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로서.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버스는 한참을 달린 뒤였다.
연두는 살며시 차창에 머릴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싸가지 없던 놈이 그래도 연두의 억지스런 말들에 화를 참으려 무던히 애쓰던
모습이 떠올라 맘이 우울했다. 그런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태빈이의
전화일까 싶어 얼른 발신자를 확인해 보았지만 태빈이 아니라 해진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연두씨,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지금요? 집에 가는 길인데요.”
“그럼,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뜻밖에 걸려온 해진의 전화, 그리고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제의에 얼떨결에
약속을 해버린 연두는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어느 낯선 버스 정류장에 내려섰다.
정거장을 거처 가는 버스번호판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신 태빈’이란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괜한 오기와 자존심을 부린
것이 마구 후회스러웠다. 맛없는 음식을 차려놓고 맛있게 먹으라고 윽박지른
꼴이 된 셈이었으니까. 게다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요리솜씨 없는 자신을
탓하진 못할망정 입이 고급이니, 비위맞추기 어렵니 하며 오히려 신경질만
잔뜩 부렸으니 녀석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생각되었다. 연두는 마치 해진이
아닌 태빈을 기다리듯 초조했다.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깬다, 여기서 뭐해?’
하며 태빈이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래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연두의 간절한 맘과는 달리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해진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괜히 집에 가는 사람 붙잡아서 미안해요.”
그는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고 여유로운 웃음을 띤 채 연두에게 다가왔다.
예전에 어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그런 비유를 했었다. ‘캐나다는 재미없는
천국이라면 우리나라는 재미있는 지옥이에요. 저보고 어느 나라에서 살 거냐고
묻는다면 전 우리나라, 재미있는 지옥을 택할 거예요.’라고 말했었다. 문득
해진이 아저씨는 재미없는 천국이라면 태빈이는 재미있는 지옥 같다는 생각이
머릴 스쳤다. 처음엔 해진에게 호감을 느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태빈에 대한
맘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보처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바보, 바보, 바보..’
연두는 해진의 사과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고 보니 해진에게서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겨져 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였나보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해진은 평소와 다르게 뭔가 긴장한 듯
보였다.
“피곤해 보여요, 얼굴이.”
연두의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 일까 해진은 연두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잘 웃던 연두도 오늘 만큼은 해진 앞에서 웃어 보이기가 힘들었다. 몸은
해진과 함께 있지만 마음은 태빈의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연두씨, 저기 저 골목 맞나요?”
태빈이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정작 해진과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어느새 차는 연두네 집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선 연두와 해진.
연두는 줄곤 딴 생각만 한 자신이 미안해서 해진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바래다 주셔서 감사해요. 아참, 그런데 왜 갑자기 절 데려다 주실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오늘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이제야 묻네요. 죄송해요.”
“죄송할 거 까진 없어요. 갑자기 연두씨가 보고 싶어져서 달려온 거니까요.”
“제가요? 아저씨 무지 심심하셨나 보네요? 하하.”
해진의 말이 당연히 농담일 것이라 여긴 연두는 다소 과장되게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런데 힐끔 돌아보니 해진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뭔가
오늘따라 달라 보인다 싶었는데 정말 꽤 진지하고 긴장한 눈빛으로 연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에 연두는 웃던 소릴
멈추고 해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해진은 연두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허릴 굽혀 연두에게 입을 맞추었다. 너무 놀란 연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체 꼼짝할 수가 없었다.
태빈은 연두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TV를 켜도, 책을 잡아도,
물을 마셔도 연두를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로 애간장이 타
들어갔다. 그래서 태빈은 무작정 집을 빠져나왔다. 답답한 맘에 차를 타고
무작정 달렸다. 시원한 밤바람이 차창으로 새어 들어왔다. 차를 멈추어 도착한
곳은 연두네 집 근처였다. 애초에 이곳으로 오려고 맘먹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맘이 이끄는 대로 달리다 보니 이곳으로 와 버렸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 도착한
태빈은 해진의 차가 주차되어진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
하는 마음으로 어두운 골목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데 순간 태빈은 호흡이
멈춰졌다. 눈앞의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발이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형과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한 유일한 여자.
그 두 사람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공간 속에 태빈은 홀로 서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소리 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멈춰진 눈과 심장으로 피를
쏟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3편에 계속됩니다. 규비야 올림>
첫댓글 에공, 태빈이 안타까워라~~~~~~~~~~~~~~~~~~~~~~
오! 오랫만이어요~ 다시 뵈니 정말 반갑네요. ㅎㅎ 앞으로도 자주 뵈요,우리~~^^* 담편도 기대해주셔요^^
님아 요즘 빨리 오신다... 그래서 넘 좋은거 있죠... ㅋㅋㅋ 이제 연두도 자기 마음을 알아가고 있군요... 둘의 러브러브 넘넘 기대되요... 웬만하면 해피루 해용... 넘 이쁜 커플이라 새드면 속상할것 같아용~~~
저두 자주 뵈서 좋아요. 항상 빠지지 않고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하답니다.^^ 결말은 비밀이랍니다. 우리 끝까지 함께 가요~^^*
23편 보러 가야지~~~
얼른 보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