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김경문 두산 감독의 인연은 30년이 넘는다. 필자가 곁에서 지켜본 김 감독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아주 선한 인상이지만 김 감독은 강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부드러운 야구를 하는 것 같아도 강한 야구를 즐겨하는 그는 ‘독한 사람’이다. 그가 걸어 온 인생 자체가 언제나 ‘역경과 도전’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김 감독의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7년 공주고 시절 김경문은 제11회 대통령배에서 최우수 선수상, 타격상, 최다 안타상 등 3관왕을 수상한 걸출한 재목이었다. 매번 공주고에 패하며 본선 진출이 좌절됐던 A고는 김경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했다. 그러다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A고의 타자가 공주고와의 게임에서 의도적으로 헛스윙을 하는 척하며 포수였던 김경문의 뒷머리를 배트로 강타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인해 김경문은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1982년 프로 원년 멤버로 OB(현 두산)에 입단한 김경문은 199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척추 디스크로 자신의 스윙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유일한 선수이다. 박철순 선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지 그의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디스크 수술, 재발로 고생했던 그는 치료가 안 되자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기도원 출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포수 마스크를 쓰고 10년간 프로생활을 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일본 전지훈련 캠프에서 OB 프런트였던 필자는 깜짝 놀랐다. 김경문의 눈썹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마지막 선수생활이라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면도기로 눈썹을 스스로 밀었단다. 잡생각을 버리고 야구에 몰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정말 독한 사람이다.
필자는 김경문과 포커를 할 때 가급적 그의 옆자리에 앉지를 안는다. 이유가 있다. 워낙 배팅이 강하다 보니 옆자리에 앉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 페이스가 흔들리는 것이다. 초반부터 불붙는 배팅으로 인해 옆 자리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카드를 접는 경우가 허다해 아예 그의 옆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경문이 포커 멤버로 들어오게 되면 판이 커지고 그는 그런 상황을 즐긴다. 깡다구(배포)가 틀린 것이다.
그는 2004년 두산 감독으로 앉았다. 그해 모든 전문가들은 두산을 꼴찌 후보로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시즌 뚜껑이 열리자마자 두산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시즌 뚜껑이 열리자마자 두산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번트를 지시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큰 틀의 야구를 팬들에게 선사하겠다는 그의 배짱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그도 괴로웠다. 4월 중순경 밤늦은 시간에 필자는 김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자리를 마주한 필자에게 그는 자신의 소신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감독 고유의 권한을 가타부타 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필자는 고민하다 '초반에 4할 승부를 유지해야 중반에 따라 붙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원론적인 조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두산은 그해 포스트 시즌에 진출,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 나갈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김경문 감독이 선임됐다. 설왕설래가 있었고, 선동열 삼성 감독이 사령탑을 고사해 김경문 감독에게 중임이 넘겨졌다. 후문에 의하면 KBO 하일성 총장이 기술위원회의 결정을 권유하자 즉석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사를 밝혔단다. .
그렇다. 김경문은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 만큼 통이 크다. 그의 통 큰 야구가 위기에 빠진 한국야구를 살리는 초석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김경문 감독님 멋쟁이! 기대 또 기대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