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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생애의 약력
<춘추시대이야기> 저자 조면희
(一).공자의 출생과 가족적인 배경
주영왕周靈王 21년(BC 551. 노양공魯襄公 22년) 8월 27일, 공자는 노나라 추읍陬邑의 창평昌平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태산泰山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마치 꽃봉오리처럼 이구산尼丘山 산붕우리 다섯 개를 만들고 또 그 태산의 기슭에서 발원한 문수汶水와 사수泗水가 멀리서 이 추읍을 허리띠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고장이었다.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의 시조 미자微子로서 6대 송양공宋煬公의 장자인 불부하弗父何가 아우인 여공厲公에게 공작公爵을 양위하고 그냥 송나라의 공족公族으로 살다가 그의 4대손 공부가孔父嘉에게 와서 성을 공孔씨로 바꾸었는데 이 공부가의 증손자 방숙防叔이 송나라의 권신들에게 쫓기어 노나라로 도망 와서 살게 되었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양흘叔梁紇은 노나라의 유명한 무사武士로서 주영왕 9년(BC 563년. 노양공 10년) 5월에 진晉나라와 송나라의 연합군과 함께 핍양偪陽1)을 공격하였는데 핍양성에서는 성문을 열고 연합군을 유인한 뒤에 선발대의 일부가 들어가자 천근이나 되는 무거운 성문을 위에서부터 내려닫았다. 그 때 마침 숙양흘이 들어가다가 말에서 내려 떨어지는 그 성문을 떠받치고 성안에 들어갔던 군사들이 나오도록 하여 선발대의 사상을 막았다. 이리하여 그의 용맹은 이웃나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6년 뒤에 제齊나라가 노나라의 북쪽 지방을 침공하였을 때 숙양흘은 3백 명의 갑사甲士를 이끌고 밤에 제나라를 습격하여 적을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는 추읍대부郰邑大夫로 있었기 때문에 추숙흘郰叔紇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숙양흘의 본부인은 시施씨로서 딸을 9 명이나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고 두 번째 첩을 얻어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는데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병을 가지고 있었다. 숙양흘은 어느 날 자신이 다스리는 추읍에 사는 안양顔襄이라는 사람의 집에 한 떼의 부하들을 데리고 방문하였다. 그리고 안양에게 딸을 한 사람 자신에게 시집보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얼결에 부탁을 받은 안양은 3 자매의 딸들에게 시집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숙양흘이 늙었다고 거절하고 막내딸인 정재征在는 아버지가 시집가라고 한다면 가겠다고 하였다. 이 때 숙양흘의 나이는 63 세이었고 안정재의 나이는 15세이었다. 안정재는 아직 어린 나이이나 당시 힘이 세고 용감한 영웅으로 알려진 숙양흘을 남편으로 섬긴다는데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안씨가 숙양흘에게 시집간 뒤에 숙양흘과 함께 근처의 이구산尼丘山에 있는 포자낭낭抱子娘娘이라는 신당神堂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자식을 점지해주는 영험한 신당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리하여 안씨는 얼마 되지 않아 꿈에 선녀가 호랑이 머리를 한 남자아이를 기린麒麟의 등에 태우고 와서 자신의 품안에 안겨 주고 갔다. 그리고 곧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해산달이 가까이 올 즈음에 안정재는 남편인 숙양흘과 함께 신당에 가서 자식을 점지해준 낭낭신에게 감사한 뒤에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배에 진통陣痛이 오기 시작하였다. 숙양흘이 그녀를 업고 오려고 하였으나 아기를 낳으려는 산기産氣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금시 아기가 나오려고 하므로 응급 결에 길가에 있는 바위굴로 들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깔아주고 숙양흘은 집으로 달려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산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달려왔다. 그 때 벌써 아이는 태어났고 숙양흘 부부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돌아오다가 길가에 있는 초막에 우선 아기 모자를 들어가게 하여 일주일 동안을 거기서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 이는 숙양흘 본처인 시씨가 질투가 심하여 아기엄마의 안정을 시키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숙양흘의 배려이라고도 하고 또는 아기를 낳기 얼마전에 안정재의 꿈에 신선이 와서 공상空桑이라는 곳에 가서 아기를 낳아야 좋다고 하여 미리 이곳 공상에 해산할 곳을 정하여 두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뒷날 사람들은 공자가 난 이 바위굴을 신령동神靈洞 또는 부자동夫子洞이라고 하고 산후조리를 하던 초막을 안모장顔母莊이라고 하였다.
한편 공자의 출생에 대하여 여러 전설이 있는데 공자가 석굴에서 태어나자 숙양흘이 그 아이를 들여다보니 아이의 체격은 컸지마는 얼굴에 달린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모두 괴물같이 생긴데다가 머리의 정수리에는 마치 산의 분지盆地와 같이 혹이 불쑥 솟았다가 가운데가 쑥 들어가 있었으므로 아이를 안고 돌아오던 숙양흘이 아이를 숲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초막에 미리 와서 안정을 취하던 산모에게 아이가 죽어서 산골짜기에 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산모는 미친 듯이 달려 나가 아이를 찾아 헤매었고 그 때 숲 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아기를 품고 앉았더라고 하였다.
어쨌든 이 아이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 건강하게 잘 자랐으며 체격은 아버지인 숙양흘을 닮아 키가 주척周尺으로 9척 4촌이나 되었는데 이는 오늘 날 2미트에 가까운 큰 키였다. 그의 이름은 이구산의 이름을 따서 구丘, 자字는 니尼라고 하였는데 형인 맹피가 있기 때문에 중니仲尼라고 부르게 뒤었다.
(二).공자의 유년 시절
공자가 3살 나던 해 아버지인 숙양흘은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자 본처인 시씨는 안정재가 서방을 죽였다고 온갖 욕을 다하고 남편인 숙양흘을 묻는 장지에도 못가도록 하였다. 본처인 시씨가 이렇게 극성스럽기 때문에 맹피를 낳은 첩도 수년 전에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정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배다른 큰 아들인 맹피와 자기 아들인 공자를 데리고 노나라의 수도인 곡부曲阜의 궐리闕里로 이사를 와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녀는 친정아버지인 안양顔襄의 도움도 거절하고 혼자서 남의 삯일을 하며 저녁이면 두 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녀가 두 아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당시의 민요인 상체常棣 노래이었다. 곧 형제간에 우애 있으라는 노래였다.
‘송이송이 산 앵두꽃/ 곱고 아름답기도 하지/이 세상 사람들이여!/ 저 꽃처럼 형제간에 우애 있어라./죽을 고패를 당하여도/형제는 서로 의지하여/온갖 난간 극복하고/ 서로 구해 주는 것을./’
공자가 아직 어릴 때 일이다. 공자는 이웃집 아이들과 큰길에 나가 놀다가 일군一群의 행차가 가는 것을 보고 열심히 따라가 보았다. 그 행차는 호젓한 산자락에 있는 주공周公(노나라의 시조)의 묘에 이르렀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벼슬아치들이 수레에서 내려 향을 피우고 온갖 제기祭器에 음식을 차려 놓은 뒤에 엄숙하게 절을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서는 절차가 너무나 절도가 있어 보였다. 이 때 은은히 울려 퍼지는 악공들의 피리소리와 편경編磬 등의 음악은 어린 공자로 하여금 자신도 몰래 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그 다음날로부터 집안의 마당 귀퉁이에 흙을 빚어 제기를 만들고 온갖 풀들을 뜯어다가 음식을 차려놓은 뒤에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었다. 공자는 이때부터 예절은 사람의 마음을 욕망과 허영에서 순화시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원동력으로 깨닫기 시작하였고 음악은 주위로부터 들려오는 잡음을 막아주어 감정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뒷날 그의 행동규범의 첫째가 예악禮樂으로 삼은 것이다.
집이 가난하였던 공자에게는 학교나 어떤 고명한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또는 사람들과의 사귀는 중에 학문의 이치를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경험철학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세 사람만 모이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삼인해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였다.
공자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당시 노나라의 권력자였던 숙손(叔孫)씨의 집안 아이들 및 일꾼들을 가까이하여 그들과 산에 다니며 소를 놓아기르는 것을 도와주고 때로 그들을 통하여 숙손씨 집에 쌓여 있는 책들을 빌려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뒷날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대한 뜻을 가지게 되었다[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於學]<논어論語>-위정為政-’라고 하였다.
어느 날 공자가 그 머슴들과 산자락에서 소와 말들을 방목할 때 큰 황소 한 마리가 머슴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기세로 보아 당장에 그 아이를 뿔로 떠받아 죽일 것 같았다. 공자는 달려가서 그 황소의 뿔을 양손으로 잡고 밀고 밀리며 한 동안 격투 끝에 마침내 황소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이일이 있은 뒤로 공자는 황소를 이긴 장사로 통하였다.
(三).어머니의 사망과 결혼
공자가 17세 되던 해 어머니인 안정재는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한 나머지 공자의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한 효험도 없이 겨우 32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공자는 너무나 슬퍼서 밥도 먹지 않은 채 울고 또 우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장사를 치르는 날에는 곡부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장사를 도와주었고 또 구경도 많이 나왔다. 공자는 어머니의 상여를 아버지가 묻혔다는 방산防山으로 가는 도중에 곡부시내曲阜市內에서도 번잡한 오부구五父衢라는 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는 상여를 멈추게 하고 날이 저물도록 그 자리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때 고향집 근처에 살던 만曼씨가 와서 숙양흘의 무덤을 알려주어 그곳에다가 합장하였던 것이다. 이때에는 무덤에 봉분이 없었으므로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은 무덤을 분간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공자는 당시 권세가의 한 사람인 계손季孫씨가 선비들을 모아 잔치를 베푸는 향사례饗士禮를 실시한다고 하기에 아직 어머니의 상복喪服 표시인 흰 허리띠 곧 요질腰絰을 두룬 채 그 잔치에 갔다가 공자의 생김새와 흡사한 계손씨의 가신인 양호(陽虎)를 만나 잔치자리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퇴자를 맞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호랑이 인상의 양호와 닮았다는 이유로 뒷날에도 여러 번 곤경을 당하였는데 이는 공자에게는 큰 악연惡緣이었다.
이 때 공구의 형 맹피는 장가를 가서 공구와 함게 살았고 공구는 19세의 나이로 중손씨의 주선으로 송나라의 귀족인 기관亓官씨의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는 국가적인 교제로 초나라에서 송나라 대부와 노나라 대분인 중손씨가 만나 송나라 공족公族의 후예인 공孔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숙양흘孔叔梁紇의 아들인 공구가 곡부에서 곤궁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매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공구는 중손씨의 가신이 되어 재정과 창고를 관리하는 외리委吏가 되었는데 그는 남보다 뛰어난 두뇌로 수학數學을 잘하여 복잡한 장부관리를 일목요연하게 처리하니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재주에 감탄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는 가축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더 어릴 때 일꾼들과 가축을 길러보던 경험을 살려서 가축의 성질에 따라 기르고 보살피도록 하니 가축들이 모두 살찌고 많은 번식을 하였다.
이와 같이 공자는 어릴 때 많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뒷날 그의 제자 중에 지공子貢이 ‘선생님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기 때문에 다능多能하십니다’ 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어릴 때 가난하였으므로 천한 일을 많이 하였었다[오소야천고다능비사吾少也賤故多能鄙事]<논어>-자한子罕-’ 라고 했다.
공구가 20세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그가 관리하는 목장으로 형인 맹피가 한쪽 발을 절면서 달려 왔다. 제수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공구는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형과 함께 목장에 있던 일꾼들을 불러 모아 술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형과 함께 집으로 달려오자 아기는 형수가 안고 있었고 아내는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 때 또 형이 소리쳤다.
“아우! 궁宮에서 관인官人이 왔네.”
밖을 내어다 보니 궁인이 예물을 들고 왔다. 노나라 군후君侯께서 아이를 낳은 선물로 하사한 물건이라고 하였다. 한 마리의 큰 잉어였다. 공구는 군후가 주는 선물에 감사하여 이 아들 이름을 이鯉라고 하고 자를 백어伯魚라고 하였다. 백어의 백伯 자는 맏이라는 뜻이었다.
이와같이 노소공魯昭公이 공구의 집에 출산 축하선물을 하사하였다는 소문이 돌자 공구의 이름은 더욱 유명하여지게 되었다.
공자가 21 세가 되던 해 노나라의 권신인 계평자季平子는 공자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여 이번에는 인구정책人口政策을 입안立案하는 사직리司職吏로 삼고 인구의 증가를 촉진하게 하는 연구를 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다섯 가지 조항의 인구정책을 건의하였다. 곧 세금과 부역을 경감하고 형벌을 줄이며 국가의 재정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의 혼인을 권장하라는 것이었다.
공자가 27 세 되던 해 노나라에는 섬국剡國 군후인 자작子爵이 국가적인 교류를 위하여 찾아온 일이 있었다. 공자는 그 에게 고대古代의 관직명官職名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곧
고대 제왕 중에 황제헌원黃帝軒轅씨는 관직명官職名을 구름의 이름에서 따왔고, 염제신농炎帝神農씨는 불[火]의 이름에서 따왔고, 태호포희太昊包羲씨는 용의 이름에서 따왔고, 소호少皞씨는 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뒷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듣자니 ‘천자가 관직을 잃게 되니 그 학문이 사방의 변두리로 흩어진다’라고 하더니 그 말이 그럴 듯하구나. [오문지, 천자실관, 학재사리, 유신. 吾聞之,天子失官,學在四夷,猶信.]”
이것은 하찮은 변두리의 군주로부터 중앙에 있는 대국에서도 배울 수 없는 고대의 관직에 대하여 배웠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공자가 29 세 되던 때 제자인 증석曾晳을 데리고 노나라의 궁 안에 들어가 악사樂士인 사양師襄에게 거문고 공부를 10일 동안 하고 음악에 대한 조예造詣를 깊이 터득한 후에 돌아왔다. 이리하여 공자의 음악에 대한 소질과 능력은 천재적인 것으로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일생 중 곳곳에서 나온다.
공자가 30세 되던 해 그는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에 축대 곧 행단杏亶을 쌓고 거기에 올라서서 자신의 학문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늘 따라다니면서 그에게 의문 나는 점을 묻게 되니 아주 강의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놓고 하루에 한번씩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 공자의 제자로서 대표적인 사람이 안회顔回의 아버지인 안로顔路와 증삼曾參의 아버지 증석曾晳 그리고 자로子路 등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이 30에 학문의 기초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삼십이입三十而立]-<논어論語> 위정為政-
공자가 32세 되던 해 노나라의 대부 맹희자孟僖子가 죽을 때 아들 의자懿子에게 유언을 하여 공구에게 가서 예禮를 배우라고 하였으므로 의자는 친구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함께 공자를 찾아와 예에 대한 것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노소공魯昭公의 허락을 얻어 공자는 맹의자와 남궁경숙을 데리고 주천자周天子가 있는 낙양洛陽을 둘러보았다. 공자는 여기 노담老聃(노자老子라고 하며 본명은 이이李耳임)을 만나 예禮에 대한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렇게 찬탄하였다.
“하夏와 상商 두 시대를 두루 고찰해 보았지마는 빛나고 빛난 문화는 주周 시대에 와서 갖추어졌다. 나는 주시대의 문화를 따르리라.[주감어이대(하,상), 울울호문재! 오종주. 周監於二代(夏、商),鬱鬱乎文哉!吾從周.]-<논어論語>·-팔일八佾-”
(四).1차 유랑생활[철환轍環]
주경왕周敬王 3년(BC 517년. 노소공 25년). 노나라에는 3 갈래의 권신이 세력을 확장해 가자 노소공이 그들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선 계손씨季孫氏를 징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계손씨는 맹손씨와 중손씨의 세력과 연합하여 도로 소공을 공격하니 소공은 패하여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이때 공자도 35 세의 나이로 제자들을 데리고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의 세신世臣인 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경공齊敬公을 알현한 일이 있는데 그는 제경공의 정치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자신의 정치원론政治原論을 대답하였다.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은 각자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고 할일을 수행하도록 하십시오.[군군, 신신, 부부, 자자. 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論語>·-안연顏淵-”
이때 제경공이 공자를 발탁하려고 하자 당시 재상인 안영晏嬰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공자가 제나라에 있는 동안 제나라의 악사樂師에게 순舜임금의 음악이라고 알려진 소악韶樂을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3개월 동안을 고기의 맛이 어떤지도 모를 정도로 심취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음악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 줄은 일찍이 헤아리지 못했다.” [삼월불지육미, 불도위악지지어사야. 三月不知肉味. 不圖為樂之至於斯也] <논어論語>. -술이述而-.
공자가 37 세 되던 해 오나라 합려闔閭가 오왕吳王 요僚를 죽이려고 삼촌인 계찰季札(延陵季子)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인데 이 계찰은 제나라의 영박嬴博 지역에 도착하였을 때 아들이 죽어 객지인 그곳에 장사지낼 때 공자가 그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 해 제나라에서는 공자의 재주를 시기하여 공자를 죽이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짓던 밥이 다 익기도 전에 간신히 먹고 제나라를 떠났다. [공자지거제, 접석이행. 孔子之去齊,接淅而行.]-<맹자孟子>. -만장萬章-
(五).양호의 몰락과 공자의 등용
공자가 40 세 되던 해 그는 노나라에 머무르면서 그는 30 세에 세웠던 사상적 기초를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고 확립하였다는 뜻으로 불혹不惑이라는 말을 하였다.[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논어論語>-위정為政-
공자가 43세 되던 해 노소공이 제나라로 갔다가 다시 진晉나라로 가서 건후乾侯에서 죽고 그 후임으로 계손의여季孫意如는 소공의 아우 송宋을 옹립하였는데 이사람이 노정공魯定公이다. 노정공 5년에 계손의여가 죽자 계손씨의 가신家臣인 양호陽虎는 계손씨의 아들인 계환자季桓子를 죽이고 노나라의 정치를 독점하게 되었다. 그는 공자를 발탁하려고 하였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공자의 집에 돼지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었다. 그러자 공자는 양호가 없는 틈을 타서 양호의 집에 가 사례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길에서 양호를 만나 벼슬을 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공자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시서예악詩書禮樂 등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의롭지 못하게 부자가 되거나 귀하게 되는 것을 나는 뜬 구름같이 생각한다.”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 <논어論語> ·-술이述而-
공자가 50 세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고 하였는데 이때 양호는 노나라의 3 계파의 권력인 삼환三桓을 몰아내려고 하다가 쫓기어 양관陽關으로 도망갔다. 그러자 노나라에서 그를 공격하였고 그는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또 송나로 해서 진晉나라로 가서 조간자趙簡子의 부하가 되었다.
이 때 공자는 51세의 나이로 지금의 산둥성 문상현汶上縣인 중도재中都宰로 임명되어 1년 만에 그의 공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자 노정공은 그를 발탁하여 그 다음해에 바로 2)소사공小司空으로 임명하고 곧 이어 3)대사구大司寇로 올려 정승의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주경왕 21년(BC 500년, 노정공 11년) 여름에 노정공이 제경공齊景公과 지금의 산둥성에 있는 협곡夾谷에서 만나 회맹을 하게 되었다. 이때 52세의 공자는 대사구의 신분으로 상례相禮를 섭행하여 회맹에서 노정공을 보좌하게 되었다. 당시 국가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지만 공자는 무사들을 데리고 가자고 주장하여 회맹에서 노정공을 위압하려던 제경공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엄숙한 공자의 설득으로 안영晏嬰과 함께 나왔던 제경공은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지난날 노나라에서 침탈하였던 노나라 땅을 도로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은 <춘추곡양전春秋-穀梁傳>에 실려 있음.
이 회맹에서 노정공의 신임을 받은 공자는 본국으로 돌아오자 우선 노나라의 권신權臣들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권신들의 무장武裝을 해체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권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가신家臣을 모두 해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는 권신들의 힘에 의하여 후작의 자리에 앉은 노정공으로서는 모험이었다. 이때 계손씨의 가신인 후범侯犯과 남괴南蒯와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낙기樂頎 두 대부大夫와 함께 정부군을 이끌고 반격을 가하여 이들을 몰아내었으나 맹손씨의 성읍城邑을 함락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노나라는 군주의 지위가 확고해지고 나라 안이 정치가 안정되어갔다. 그러자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싫어하여 미인들과 말을 노나라에 보내니 노정공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싫어하던 계손씨 일당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노정공은 교만한 마음이 생겨 미인들을 데리고 즐기는데 빠졌으며 마침내 4)교제郊祭를 지내고 공자에게 음복飮福인 번육膰肉을 보내지 않았다. 이는 공자를 신하로써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六). 2차 유랑길[철환轍環]
공자는 노정공이 주색에 빠져 자신을 멀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갔다. 이때가 55세의 나이로서 이후 14년 동안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위영공衛靈公은 부인인 남자南子와 함께 공자를 수레에 태우고 저자거리를 돌아다닌 일이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4년 동안 있었으나 위영공이 그를 써주지 않았고 무력武力을 양성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구丘에게 제사를 모시는 일을 묻는다면 일찍이 들어 아는 일이 있으나 군대의 일은 배운 일이 없습니다.”
공자는 59세의 나이로 위나라를 떠나 황하黃河가에 이르러 진晉나라로 들어가려다가 진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두 사람의 현인賢人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리면서 ‘구丘가 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다.「탄왈 : 미재! 수양양호, 구지불제차, 명야부. 嘆曰:美哉!水洋洋乎.丘之不濟此.命也夫.」<공자가어孔子家語>’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송宋나라로 들어갔는데 그는 자주 제자들을 모아놓고 박달나무[檀樹] 아래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사마司馬(국방장관에 해당) 환퇴桓魋는 병사를 시켜 박달나무를 베어 버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공자는 옷을 갈아입고 송나라를 빠져나와 정鄭나라로 갔는데 정나라 역시 그를 맞아주지 않아 진陳나라로 가게 되었다.
공자는 60 세에서부터 진나라에 있으면서 어떤 경우 어떤 일에나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려 따라갈 수 있다는 뜻으로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는 말을 하였다.
주경왕 31년(BC 481년, 노애공 6년), 오吳나라가 진陳나라를 침공하자 초楚나라가 구원을 오게 되니 공자는 64세의 나이로 진나라를 떠나 채蔡나라를 지나 초나라로 들어가는 도중에 7일 동안 양식이 떨어지는 곤경을 당하였다. 그의 많은 제자들은 굶주림에 매우 지쳤지마는 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이 있으면 거문고를 탔으며 틈틈이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곤 하였다. 이때 은사隱士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 그리고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接輿같은 사람을 만나 비웃음을 당하였으나 공자는 무도無道한 이 세상을 고쳐보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현실을 피하여 새나 짐승과 같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정도正道가 행하여지고 있다면 나, 구丘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조수불가여동군, 오비사인지도이수여? 천하유도, 구불여역야. 鳥獸不可與同群,吾非斯人之徒而誰與?天下有道,丘不與易也.] <논어論語>-미자微子-
이와 같이 공자는 현실에 참여하여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결심이 강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초나라에 이르자 초소왕楚昭王이 그를 등용하려고 했으나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막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해 다시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위나라에 있었다.
(七). 공자의 말년생활
-14년 유랑 생활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옴-
공자가 68세 되던 해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자 계광자季廣子가 군사를 몰고 적군을 막을 때,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가 계의 장수가 되어 적과 싸워 이겼다. 계씨가 염구에게 전술戰術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으니 염구는 공자에게 배웠다고 하며 공자를 다시 불러들이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14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으며 공자의 부인인 기관씨亓官氏는 공자가 돌아오기 한 해 전에 죽었다.
이렇게 고향에 돌아온 공자는 노애공과 계광자를 만나보았으나 정치 이념이 맞지 않아 벼슬을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정리하고 <예기禮記>와 <악기樂記>를 바로잡았으며 <춘추春秋>를 편찬하는데 전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젊을 때부터 <주역周易>즐겨 읽어서 그동안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고 했다.
공자의 69세에 아들 백어伯魚가 죽었다. 70 살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법도와 규칙에 벗어나는 일이 없다.”[칠십종심소욕, 불유거. 七十而從心所欲,不逾矩.] <논어論語>-위정為政-
공자가 71 세 되던 해에 노나라의 곡부曲阜 서쪽의 들판에서 기린麒麟이 사냥꾼에게 잡혔는데 공자가 그 소문을 듣고 “나의 도는 이제 끝났다”
하고는 그동안 편찬하던 <춘추>를 끝낸 뒤에 다시는 붓을 잡지 않았다. 이해 또 공자의 가장 사랑하던 제자 안회顔回가 41 세의 나이로 죽으니 공자는
“슬프다! 하늘이 나를 죽였다. 나를 죽였다.”
하고 되풀이해서 애석해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도를 전해 줄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자가 72세가 되던 해 위衛나라의 내란으로 위나라에서 벼슬하던 제자 자로子路가 죽었다.
주경왕周敬王 41 년(BC 479 년, 노애공 16년), 공자 나이 73 세 되던 해 2월 11일에 병으로 앓아누운 지 7일 만에 죽자, 곡부의 북쪽 사상泗上에 장사 지낼 때 노애공魯哀公이 뇌문誄文(弔文)을 지어 조상하였는데 이르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는가?/ 旻天不弔.
이 한 늙은이를 그대로 남겨두어 /不憖遺一老.
나 한 사람을 보살피도록 하여주지 않았으니 /俾屛余一人
군후君侯의 지위에 있는 내가 /以在位.
외롭고 외롭게 초상을 맞게 되었구나./煢煢余在疚.
아하, 슬프다! 이부여. /嗚呼哀哉,尼父.
이제는 법받을 곳이 없구나./無自律.’
하였다.<좌전左傳> -애공16년哀公十六年-
이렇게 공자가 죽자 많은 제자들이 공자의 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을 지켰는데 그 중에 자공子貢은 6년 동안을 지켰으며 그 뒤에도 공자의 제자나 공자를 추모하는 사람들 중 1백여 명이 공자의 무덤 곁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공리孔里라고 하였고 뒷날 공자가 생전에 살던 집은 공자의 사당[廟堂]을 만들어 공자가 평생 사용하던 의관衣冠과 금서琴書 등 물품을 갈무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었다. 이것이 지금 곡부曲阜의 공묘孔廟와 공부孔府와 공림孔林의 삼공三孔이 되었다.
[출처] 공자孔子 생애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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