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늘푸른언덕
구구절절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간절하고 아름다워 학창 시절 개인적으로 암송하던 몇 안 되는 시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조입니다.
조선시대 시문학의 문인 반열에 든 기생 홍랑(洪娘)이 편지 형식을 담아 뜨거운 가슴으로 쓴 사랑의 시입니다.
아름다운 이 시의 탄생 배경은 이렇습니다.
조선 중기 함경도 홍원의 관기(官妓)였던 홍랑이 그 지역에 부임해 온 당대시인이자 관리였던 고죽 최경창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시간도 잠시, 임기가 끝나 아쉽게 헤어지게 되면서 이별의 정표로 건네는 버들가지를 통하여 영원한 사랑의 다짐을 전하는 가슴 절절한 마음을 담아 부른 당대 최고의 사랑 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향해 절제되었지만 애절한 마음을 담아 표현한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문으로 옮겨봅니다.
홍랑의 이 시조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기녀(妓女) 황진이의 대표적인 사랑 시 한 편을 더 소개합니다.
자신이 활동하던 송도(현재 개성)에서 가장 빼어난 세 가지로 송도의 박연폭포와 화담 서경덕과 함께 황진이 자신을 포함하여 '송도삼절'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유명한 이 문인 기생 황진이가 평소 연모하던 서화담을 향하여 연정과 그리움을 표현한 유명한 사랑 시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어론님 오시는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는 표현은 사랑하는 마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너무나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역시 현대문으로 옮기면 이런 내용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글로 표현한 시문학 극미의 작품이라고 보입니다.
때로는 부드러운 붓이 날이 선 검보다 강합니다.
또한 입으로 뱉어져 사라지는 말보다 글이 주는 힘이 훨씬 강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지만 젊은 시절 손으로 썼던 손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키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주고받던 손 편지는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낭만 그 자체의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득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의 전신) 고학년 시절 정말 하기 싫었던 숙제 하나가 주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전방에 계신 국군장병 아저씨께 보내는 위문편지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하여 전방에서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국군장병 아저씨들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대충 쓰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편지를 잘 쓰면 국군장병 아저씨들이 일일이 답장을 하기도 한다는 말에 묘한 경쟁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한 후 국군장병 아저씨께 답장을 받기 위해 전략적인 위문편지를 작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편지 내용 속에 우리 집에 예쁜 누나들이 둘씩이나 있다는 내용을 은근슬쩍 삽입한 것입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기획했던 전략적인 위문편지에 얼마 있지 않아서 여지없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답장을 받아 든 순간 천하를 얻은 것 같이 기뻤습니다.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본 순간 답장 속에는 누나들을 소개해달라는 내용과 함께 사진까지 보내 달라는 요지의 간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반협박성(?) 편지를 들고 두렵기도 하여 잠시 망설이다가 회신하기를 손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편지는 아내와 연애 시절에 주고받았던 손 편지입니다.
지금의 아내와 처음 썸(?)을 타던 시절 우연한 기회로 제 고향인 강원도 춘천을 여행했습니다.
그 춘천 여행을 빙자하여 처음으로 손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멀다 하고 피차 정성스럽게 고이 써 내려간 손 편지를 주고받던 시간은 설렘의 연속이었습니다.
편지를 통하여 서로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렇게 손 편지를 주고받기를 지속하는 가운데 어느덧 100통째를 주고받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에도 이벤트를 좋아하던 저는 손 편지 100통 달성 기념 또 다른 여행을 기획하여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이 무르익어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젊은 연인들의 사랑법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고전적인 연애 방식입니다만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아련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소통하던 손 편지는 획기적인 정보통신 수단의 등장과 함께 그 자취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손 편지 자리에 새로운 소통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한동안 전화 한 통이 손 편지의 기능을 대신하더니 이제는 문자 한 통이 등장하여 소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문자 한 통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시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시대적인 흐름에 편승하게 됩니다.
언제부터 인가 안부를 전하는 문자 한 통을 시작하였고 그 후에는 문자 한 통을 구별하여 좋은 글을 얹어 전하는 아침편지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조금 생각을 확장하여 나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SNS라는 용기에 담아 일주일에 한 번씩 지인들과 나누며 나의 존재의 가치를 이어갑니다.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이렇게 매주 아침편지를 쓰는 이면에는 아직 잊히고 싶지 않다는 관계의 몸부림과 남은 삶에서 내 작은 생각의 분신들을 형성하여 남기고 싶은 명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일을 놓는 순간 애써 유지하던 그 관계들도 끝이 날 것이고 시나브로 삶의 종착역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합니다.
그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그리스도의 편지’라 일컫는 것을 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름을 받은 충성된 자,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 및 오늘을 사는 주의 제자인 우리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편지 속에 담긴 그 편지의 속성을 묵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안에는 우선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름답고 좋은 것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주의 말씀으로 전신 갑주를 두르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정체성은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담아 세상에 나가 만나는 이들에게 읽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편지는 때로는 세상을 능히 이기는 승리의 편지가 되어야 하며 때로는 아프고 절망한 이들을 회복시키는 위로의 편지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분열된 세상을 하나 되는 만드는 화평과 회복의 편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이 메마른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주는 사랑의 편지로서의 정체성도 간직한 채…
그리고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편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돕는 천사를 주셨는데 그것은 곧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온전히 내주(內住) 할 때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편지는 영적인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 편지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낮아지고 매일 십자가를 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영적인 편지를 십계명으로 만들어 돌판에 새겨 전해주셨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임하셔서 몸소 새로운 계명인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시며 성령을 선물로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 즉, 그리스도의 편지란 그리스도를 닮은 주의 제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예수의 증인 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편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우리는 세상 속으로 나가 삶 가운데 그 편지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메신저가 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첫댓글 획기적인 정보통신의 등장과 발달로 인하여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어가는 손편지의 낭만과 매력에 대하여 추억해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의 의미와 속성에 대하여 묵상하고
이제 남은 삶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단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