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신문을 대충대충 읽고 던져 둔다.
그러다가 며칠 뒤 지나간 신문을 다시 펼친다. 매주 목요일에 종이류를 버리는 날이기 때문에
모아둔 신문지나 택배 박스 등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버리기 전에 스크랩 할 기사가 있는지 다시 본다.
가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기사가 발견되기도 한다.
오늘도 지난 신문 뭉치에서 9월5일자 조선일보 주말 섹션인 [아무튼, 주말]에
낚시꾼 스윙골프 선수인 최호성의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항간에서는 낚시꾼 스윙이 쇼맨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한 타 한 타가 가족의 생계가 걸렸다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그는 포항역에서 40분이나 더 가야하는 바닷가인 장기 마을에서 자라났다.
포항수고를 나와 동원수산의 참치하역장에서 냉동참치의 피 제거작업을 하다가 전기톱에 엄지 한마디가 잘려 나갔다.
병원에 가서 복부 지방이식을 했다. 그후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신검에서 군면제를 받았고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서 마트배달,광산일,자판기 동전수거와 음료수 채워넣는 일등 잡일을 하다가 스물 세살때
안양의 한 골프장에서 숙식제공하는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갔는 데 손님들의 골프빽을 나르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한 2년 일했을 때 부사장이 직원도 골프를 알아야 고객의 마음을 안다면서 골프를 치개 했다.
이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일이 끝난 다음 대여섯 시간씩 혼자서 죽어라고 연습을 했다.
골프에 입문후 2년만에 세미프로 자격증을 얻고 다시 프로가 되기 위해 다른 골프장을 전전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쏟았다.
그리하여 2001년 2부투어에서 두 번 우승하면서 상금왕이 됐고 2003년부터 정규투어에 들어갔다. 그의 낚시꾼 스윙은
어릴때부터 시작한 선수들보다 유연성이 떨어지고 힘도 떨어짐을 느껴서 관절부상을 피하고 비거리를 늘릴려고 스윙폼을 찾다보니 그런 스윙이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독특한 스윙 덕분에 작년 미국 피닉스 오픈과 AT&T 페블비치 프로암 대회에 초청을 받아 일약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이제부턴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학교에 있을 때 테니스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테니스는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금세 옷갈아 입고 신발 바꿔 신고 라케트만 들고 코트로 나가면 되었다. 코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영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외국에 나갔다 온 사람들 얘기로는 영국은 테니스가 골프보다도 돈이 더 많이 든다고 하면서 미리 골프를 배워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는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사치성 운동이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참에 내가 영국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테니스를 할 수 없다면 골프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출국전 인도아 골프장 세미프로로부터 두어 달 레슨을 받았다.
영국에 나가 집을 구하고 차도 사고 학교 가는 길도 익히고 하는 찰라에 우리나라에서 IMF 사태가 터졌다.
내가 받는 봉급이 환률이 치솟으니 절반 이하로 떨어져 방세도 치를 수 없게 됐다. 차가 있었지만
기름값이 비싸 차를 밀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으므로 당장 돌아올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견딜 수 있는데까지 버텨보자고 마음 먹었다.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 아이들도 다니는 학교에 적응을 해 가고
나도 영국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돼 가고 있었다. 당시 먼저 공부하러 나와있던 유학생들이 골프클럽에 가입하라고 권유를 했다. 1년에 회비가 우리나라 돈 60만원 정도였다. 회원이 되면 언제든 혼자 나가서 칠 수도 있고 무료라고 했다.
한국에서 나가기 전에 두어달 배웠지만 다시 클럽을 잡으니 생소하였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레슨을 다시 받을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다.
영국은 골프장마다 우리나라의 인도아 같은 레인지가 골프 하우스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골프 코스에 나가기 전에 잠시 연습을 하는 곳이다. 영국은 골프장이 많아 골프장에 사람들이 붐비는 경우는 거의 없다. 레인지도 마찬가지였다.
연습공을 여나무 개 사가지고 레인지에 가서 혼자서 스윙 연습을 하였다. 공을 멀리 쳐 놓고 나중에 다시 친 공을 찾아서 주워와야 했다. 공을 주워 담다 보니 남들이 치고 내버려 둔 공이 많았다. 더 이상 공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
서너 달을 열심히 독학을 하고 난 뒤 교민들과 함께 라운딩을 하게 됐다. 소위 머리를 올린다는 행사였다.
스윙폼도 각양각색이었다. 정식으로 코치한테서 레슨을 받은 사람은 적었다. 도리깨 타법도 보였다.
그 후로 새벽마다 혼자 가서 18홀을 돌고 집에 와서 식사한 후 학교에 나갔다.
어떤 교수들은 가방도 풀지 않은 채 골프장부터 먼저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 가방을 도로 들고 온다는 소문도 들렸다.
또 어떤 교수는 하라는 연구는 하지 않고 골프코칭 스쿨을 나와서 코치 자격증을 따서 온다고도 했다.
연구를 하든 골프를 치든 각자 자기 책임하에 살아간다.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지면 된다.
골프를 일년반쯤 치고 나니 어느정도 자신감도 붙었다. 한국에 나와 대전에 있는 골프장에서 벌어지는 동기생 골프대회에 나갔더니 82타로 우승을 하게 됐다. 잘 치는 친구들은 이븐도 있었고 싱글도 있었는 데 다 핸디를 주었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있었다.
그 후 몇번 골프를 쳤으나 돈도 돈이지만 우선 시간 낭비가 커서 그만 두었다. 벌써 손 놓은지가 십년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