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늘푸른언덕
영국 웰링턴 장군이 구제불능인 병사 하나를 사형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려 했다. 징계도 했고 때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감옥에 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사형만 남았을 뿐이다.”
이 때 그 병사의 친구가 갑자기 그곳에 뛰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물론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저 병사에게 하지 않은 것이 꼭 한 가지 있습니다.
저 친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친구의 말에 제독은 감동을 받아 사형을 취소하고 용서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병사는 완전히 달라져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글/한 가지 하지 않은 것
제법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글 소재로 삼기를 가장 꺼려 하던 이야기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번 주 이야기 주제를 [용서]로 정하고 지난 한 주 많은 시간을 쪼개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에 대하여 묵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완전한 용서라는 것이 실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인간의 덕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신의 경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를 오랜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람난 남편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면서 홀로 된 주인공 신애는 사랑하는 아들 준이를 데리고 조용히 살기 위해 찾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고향인 밀양입니다. 남편이 남겨놓은 소액의 돈으로 그나마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돈 있는 행세를 합니다. 그런 주인공을 향해 악의 음모를 꾸민 아들 준이가 다니는 학원 원장이 아들을 유괴하여 돈을 요구합니다. 가진 돈 전부인 870만 원을 바치고도 자신에게 돌아온 싸늘한 아들의 주검 앞에서 주인공은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우연히 들르게 된 교회의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복역 중인 원장을 용서해 주기 위해 면회를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척이나 마음이 평온해진 원장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이 먼저 용서하겠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회개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다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원수의 죄를 용서할 당사자인 자신은 아직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심한 배신감과 분노로 감정이 심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탈선의 행각들…
진정한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그린 영화는 용서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리지 않고 그 판단의 몫을 관객들에게 전가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주인공의 신들린 연기에 몰입되어 그녀의 극 중 행적에 시선이 머물면서 종영 후 정작 용서라는 무거운 주제가 남겨졌을 때 무척이나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물론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영화였지만 실화에서 모티브를 딴 영화라 마음 한 켠이 더욱 무거웠습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용서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왔습니다.
그 중에는 좋은 사람들과 관계의 즐거움도 있었지만 때로는 인간 관계의 악화로 인하여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로 신뢰가 무너지기도 했고 실망감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걷잡을 수 없는 미움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해가 풀리기도 했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면서 용서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용서를 받기도 하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작 실망하고 힘들었던 것은 나의 이해의 폭이 적었던 부분도 있었음을 인정하고 때론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며 살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 스스로 수용할 수 없는 무게의 실망감과 인간적인 배신감이 잔인한 현실로 다가올 때 과연 선뜻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씻지 못할 죄를 범한 상대를 깨끗하게 용서할 수 있을 지 묻는다면 그 답에는 망설임이 생깁니다.
완전한 용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서에서는 용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범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신 후, 주인과 결산하는 종의 비유를 들어 진정한 용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러 자신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사정해 주인이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이 빚을 갚지 않자 그 동료가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주변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주인은 몹시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에 가두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많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나 이웃의 작은 죄 하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데나리온은 성인이 하루 일해서 벌 수 있는 금액의 화폐단위이고 달란트는 금 40 kg의 화폐단위로 10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 돈의 가치로 보면 1데나리온은 10만 원 정도, 1달란트는 1억 원 정도입니다. 즉 성경의 비유에서 종은 1조 원(1만 달란트)이나 탕감 받고도 1000만 원(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은 셈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룩하고 숭고한 용서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대속 사건일 것입니다.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언하신 대로 은 30세겔을 받고 예수를 원수의 손에 팔아넘긴 제자의 배신으로 인하여 로마의 법정에 서게 되고 결국은 당시 가장 중형이라고 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온갖 질고를 견디시며 당신을 조롱하던 로마 군들의 채찍과 핍박을 받으며 고난의 길을 지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며 외칩니다.
유명한 십자가상에서의 일곱 마디, 가상 칠언입니다.
그 가상 칠언의 첫 번째 말씀이 바로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장 34절
우리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십자가 상에서 검은 대못으로 심장이 터져 검붉은 선혈이 뿌려지기까지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의 본질은 바로 용서입니다.
당신을 향하여 온간 악행을 행한 그들을 큰 사랑으로 품으시고 십자가상에서 마지막까지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정신은 완전한 용서였습니다.
그 큰 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닮기 원합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십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본으로 삼아야 할 율법을 그들에게 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감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으니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그런데 이러한 계명을 받은 오늘 우리들의 사랑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들이 사랑하기에 편한 사람들만 편식하듯이 골라서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심한 고통과 불편함을 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과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혼란스러운 계명 하나를 더하여 주셨는데…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3절~44절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말씀을 따를 것인가?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따를 수 없는 계명입니다.
우리들이 우리 안에 성령을 임재를 사모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받기 전까지 완전한 용서는 결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셨듯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하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신 것처럼 연약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준 용서에 대한 간구의 기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달리신 그 십자가는 완전한 사랑, 바로 용서입니다.
이제 남은 삶의 시간은 그 완전한 사랑인 용서의 메타포,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품고 예수 닮기를 사모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로새서 3장 13절
첫댓글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용서와 그 실천의 어려움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 가장 거룩하고 완전한 사랑인 예수 십자가는
완전한 용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