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30일 방영된 KB1 아침마당의 목요특강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 법륜스님> 강의 내용 녹취!
나는 되새김질 하고픈 스님 말씀이 있을 때면 이렇게 며칠을 걸려 힘든 작업을 해본다. 모든게 미흡한 나로써는 정말 쉽지는 않지만 내 스스로 원하는 길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아래 글은 80% 정도만 녹취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방청석의 호응 소리와 스님의 말씀 중 생략 된 부분 있음) 아마, 누가 부탁했다면 절대 "예"하고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탁에는 부담이 따르기에~^^*
이런 만남으로 다시 글로 태어난 법륜 스님의 가르침! 스님의 가르침이 내 삶에 변화를 많이 주셨듯이 이 글을 접하는 모든 분들게 행복의 씨앗이 피어나길 바래본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여 듣다보면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고,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지 속 시원히 말씀하신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글로만 보면 50%로 공감밖에 못하는 것 같다. 100% 가슴으로 다가가고 싶은신 분은 반듯이 스님의 말씀을 육성으로 직접 시청 해보시길 간곡히 권해드리고 싶다.(아래 주소 링크)
단, 로그인시 KBS 회원가입이 필요하다. 또 하나, 아쉬움은 방송 중에 si속보 내용이 7분가량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 방송에서만 이 속보를 보냈는데...^^* 왜 그랬을가 의문!) 일시:09.04.30(목) 08:25~09:35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 법륜
이금희 진행자 : 웃음 꽃은 우리가 만들 수가 있잖아요. (생략) "웃음 꽃도 내가 만들듯이 행복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시기 이해서 정말 바쁘신 분인데 나오신 분이거든요. 정토회에 지도 법사이시고 평화재단의 법륜 이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초대석에서의 대화 내용 생략)
▶ 진행자 : 행복이란 어떤 건가요? ▶ 법륜 스님 : 기분이 좋은 겁니다.
여러분! 다 행복해지고 싶으세요? 그런데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이게 큰 문제거든요. 우리만 아니라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런데 행복하다는 사람보다는 괴롭다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오늘 이 문제를 한 번 검토 해보려고 그래요. 결혼들 다 하셨지요? 행복하려고 결혼했어요, 괴로울려고 했어요? 행복하려고 했지요? 자녀들 다 있지요? 그러면 부부 둘이만 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자녀들이 있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자녀들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자녀들을 가지지 않습니까. 직장을 갖는 것도 더 행복하기 위해서 갖는단 말이예요. 모든 것은 더 행복하기 위해서 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제일 괴롭다는 게 남편 때문에 괴롭다.(결혼 생활이 괴로움의 원인), 아이들 때문에 괴롭다고 그러죠.(자녀가 괴로움의 원인), 또는 직장 생활 못해먹겠다. 직장 생활 때문에 괴롭다 하거든요. 이렇게 생각해볼 때,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가장 괴로움의 큰 원인이다. 이게 모순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인생을 한탄하게 되잖아요. 나는 행복하고 싶고 그래서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
첫 번째 나온 한탄이 무엇이에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께서 돌봐주지 않는다. 이말 이예요. 이것은 종교 용어가 아니고 일반적인 용어이거든요. 두 번째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였길에~ 이런 말을 하죠. 전생타령을 합니다. 또 하나는 사주팔자타령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모두들 원인을 그런데 찾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데도 행복해지지 않으니까 원인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아마 이것은 신의 뜻이려니. 전생의 지은 죄려니, 내가 태어난 생년월일시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된다. 라고 정해진 운명이러니....,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정말 그럴까? 이게 원인일까? 제가 한 가지 예들어서 말해 볼 터이니 맞춰보세요. 쥐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 찾다가, 즉 쓰레기장을 뒤져도 먹을 게 없었는데. 아주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찾고는 웬 떡이냐? 나도 살다보니 이런 때도 있구나. 하며 아주 기분 좋게 먹었단 말이예요. 먹고 나니 배가 아파요. 그러고는 떼굴떼굴 굴렀어요. 즉 쥐약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쥐가 떼굴떼굴 굴으면서 생각해봤어요. 하느님이 나을 벌주시나?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쥐약을 먹었나? 내가 태어난 생년월일시로 인해서 내가 지금 죽게 되어있는가? 이 셋가지 중 어느 것이 겠어요? 네 번째, 쥐약인줄 몰라서. 쥐약인줄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우리의 괴로움은 무지에 있다. 하느님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고, 전생도 아니고…….그 무엇도 아니고 우리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에 있습니다. 이렇게 이 쥐약을 예를 들면 다 알아 맞춥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서로 다투고 원수가 되었어요. 왜 그럴까? "내가 무지해서!" 이런 답은 안 나옵니다. 우리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궁합이 안 맞아서…….등등 이런 답이 나오잖아요. 그렇지가 않다. 무지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리석음! 이 무지는 내가 어리석어서 그렇다. 이 무지만 깨뜨릴 수만 있다면 내가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괴로움을 자기가 만든다.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이 자업자득은 보복의 원리는 아니에요. (돈을 예로 들어주심.) 자업자득이란 말은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다. 이것이 누가 나에게 고통을 준게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괴롭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 애기를 들어보면 "내가 어리석어요!" 이렇게 한 사람이 한 분도 없어요. 왜 그리 힘들어요? 하고 물어보면, 얘 때문에요, 얘가 어땠는데요? 공부를 못해서요. 말을 안 들어서요. 남편 때문에요. 남편이 어쨌는데요? 맨날 늦게 들어와요, 술 먹어요, 바람피는 것 같아요. 시어머니때문에요. 왜요? 잔소리를 해서요 전부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그 말은 그들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 아니예요? 내가 괴롭고 싶어서 괴롭나, 그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괴로운거지. 그러니까 억울하죠?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괴로움을 그들이 만든다면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을 고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아이를 고치려고 하고, 남편을 고치려고 하고, 그런데 고쳐져요? 안 고쳐지지. 남편도 잘 안 고쳐저. 시어머님도 잘 고텨저……. 그러니까 내 힘으로 잘 안 고쳐지니까 부탁을 해야 되잖아요. 나보다 힘 있는 사람에게..., 더 힘 있는 사람에게, 더 힘 있는 사람에게……. 그래서 그분은 내 부탁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모르는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이야 되잖아요. 이런데서 종교성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종교성이라는 것은 그 가르침의 교주의 사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은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종교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고처 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종교성을 가지고는 행복해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부탁해서 저 사람을 고쳐달라고 그러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고쳐달라고 하면 각 종교의 어떤 분은 힘들겠지요? 누구 말을 들어야해요? 돈 많은 사람을 들어줄가? 와서 싹싹 비는 사람을 도와줄가?
그런데서 우리들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남이 만든다고 하면 사실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쥐를 예를 들었지만……. "나의 무지 때문에 이 괴로움이 생겼다. 이 괴로움이 나로부터 일어났다." 이 잘못은 그분께 있는 게 아니고 그 분이 나를 돌봐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나의 전생, 생년월일시도 아니고, 나의 무지 때문에 온 거다. 이것은 책임이 나한테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억울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이 무지만 깨트릴 수가만 있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이 행복은 저 사람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 수 있다.
그런데서 정말 그러면 나의 무지 때문에 괴로운가? 이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겠죠? 지금까지는 내 탓이 아니고 남 탓이었으나 지금부터 "내 탓이로다." 어떤 종교에서 이런 말 들어보았죠? 그런데 내 탓이라는 것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사물의 원리를 몰랐다' 이런 말이예요. 그러면 우리가 "행복하다!" 할 때가 어떤 때나? 여러분이 착하면 행복합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좋다고 행복하냐? 생각이 좋다고 행복하냐? 몸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에요. 행복할 때는 기분이 좋다! 할 때 행복합니다. 그럼 어떨 때 기분이 좋은가? 좋은 생각 할 때, 기분이 좋으니 그래서 기분 좋은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행복은 기분이 좋을 때인데 어떨 때 기분이 좋으냐?
몇 가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 우리 젊은이들도 그렇고 사람들이 병중에 제일 큰 병이 사랑 고파병이예요. 사랑을 못 받아서……. 남편이 나를 사랑 안 해서 괴롭다. 하거든요. 정말 그런가? 이것은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로운 게 아니고 사실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도 뒤집어 알고 있다. 이게 무지죠.
그러면 예을 들어 봅시다. 꽃이 한 송이 있는데 꽃을 보면서 꽃을 좋아하면 누가 좋은가요? 내가 기분이 좋다. 꽃을 보고 좋으면 꽃이 좋은 게 아니에요? 꽃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별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아이고, 뭐 꽃모양이 뭐 이래~...!" 이러면 누가 기분이 나빠요? 내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우리가 들판에 가서 들꽃을 보고 좋아하거나 산에 가서 산을 좋아하거나, 바다에 가서 바다를 좋아하거나, 뭔가를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다. 그러니까 뭔가를 미워하면, 싫어하면 내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 원리를 생각해본다면, 내가 지금 남편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미워하기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거다. 내가 남편을 좋아하면 내 기분이 좋다. 그러면 어차피 같이 살 바에야 좋아하는 게 이롭다. 그런데 우리는 미워하거든요. 왜 미워하냐 물으면 이유가 많아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미워하거든요. 이런 저런 이유를 되서 미워한다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를 돼서 나는 불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래서 나는 불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해서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고집하는 겁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기분이 좋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아하는 마음을 내면 나는 항상 기분이 좋고 행복한 거고. 내 남편을 보면 기분 나쁘고, 자식을 봐도 싫고, 내 시어머도 싫고....., 이렇게 싫으면 내 주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싫어하면 내가 기분이 언짢아지죠? 그러면 내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면 "이유가 있어요!" 그냥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늦게 들어오니 미워하지, 바람피우니 미워하지, 술 먹으니 미워하지, 공부 안 하니 미워하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반듯이 그러는 것은 안이에요.
이렇게 한 번 살펴봅시다. 남편이 단골집에 술을 먹으러 다닌다. 내가 볼 때는 나쁜 짓이죠? 그런데 술집 주인이 보면 어떻겠어요?(방청객들의 웃음소리) 그러니까 남편의 행위 자체는 사실은 좋은 행위도 아니고 나쁜 행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남편의 행위가 나쁘다면 온 세상 사람이 다 그것을 나쁘다고 알아야 하는데 왜 그것을 다 나쁘다고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오히려 나쁘다고 말 하는 사람은 나 하나 아니면 아주 소수이고, 오히려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은 다 잘한다고 그런다 말이예요. 다수결로 해도 더 많아요. 그런데 다수라고 그러면 꼭 좋은 거냐? 그것도 아이예요. 그러니까 그 행동은 좋은 행위도 아니고 나쁜 행위도 아니고 다만 하나의 행위일 뿐입니다. 즉 꽃은 예쁜 꽃도 아니고 나쁜 꽃도 아니고 다만 한 송이 꽃일 뿐이다.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오고, 그걸 보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온다. 그러니까 그 남편의 행위는 다만 하나의 행위인데 그것을 보고 내가 싫어하고 나쁘다고 단정을 지으니까 내가 괴로워진다. 그래서 내가 만든다는 거예요.
저기 흰 벽이 있는데 만약에 내 안경 색깔이 붉은 안경색깔을 넣은 안경이라면 저 벽을 보면 붉게 보이죠? 그럴 때 벽은 붉은 색깔인가? 아니면 내 눈에 붉게 보이는가? 그런데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구분 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게 붉은지 아닌지 알려면 저 안경을 한 번 벗어나봐야 구분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태어날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구분이 안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착각을 하느냐면 "저 벽은 붉다" 이렇게 착각을 해요. 내가 본 남편은 있는 그대로의 남편의 모습이 아니고 내 안경 색깔에 투영된 남편의 모습이다. 인도 용어로 말하면 까르마라고 그래요. 불교 용어로 말하면 업식이라고 하는데 이 업식을 통과해서 인식되는 거다. 그래서 내가 인식하는 거하고 실제의 세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똑같은 것을 두고도 남편과 내가, 아이와 내가 사물을 달리 인식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상대가 틀린거요. 왜, 제는 붉은 색깔을 왜 푸르다고 그러나? 제 눈이 삐었나? 딱 보면 모르나?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상대편도 "이걸 보면 딱 모르나? 왜 푸른 색깔인데 엄마는 붉다고 그럴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안경을 다 벗어야만 해결이 되느냐? 그래요. 안경을 벗으면 해결이 된다. 뭐, 붉다 푸르다 싸우다 안경만 벗어보면 해결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안경을 벗는다!" 이게 "무지를 깨트린다!" 또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런 이야기라는 말이예요. 그 수준에 못 도달하더라도, 이런 사실을 이해만 하면 내 눈에 붉게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푸르게 보일 수 있다. 이것만 알아도 내가 붉다 할 때 상대가 푸르다 하면 "너 틀렸다" 이렇게 안 가고, 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되면 생각이 달라도 다투지를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면 "너는 틀렸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생각 할 줄 밖에 몰라. 그걸 말이라고 해." 이렇게 되니까 갈등이 생기거든요.
그런데서 이런 마음의 이치, 정신 작용에 이해가 필요합니다.
물질에도 원리가 있잖아요. 뉴턴의 1,2,3 법칙이 있듯이 바로 마음에도 이런 법칙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법칙,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가 마음 작용을 일으키면 행복해질 수 있고, 그 원리를 거꾸로 알아서 하게 되면 행복하고 싶어서 했는데 결과는 불행하게 된다. 쥐가 쥐약을 먹을 때는 살려고 먹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죽을려고, 자살 할려고 쥐약을 먹었다. 그래서 죽게 되었다. 이것은 별로 억울한 일이 아니예요.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살려고 했는데 쥐약을 먹으면 굉장히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사는데 결과는 늘 불행해지니까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낚싯밥을 먹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알기는 알았는데 거꾸로 알았다. 전도되었다 이렇게 말해요. 이런 전도몽상! 뒤집어진 잘못된 꿈속의 환영 같은 곳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전부가 똑똑하다고 하는데 사실 헛 똑똑이예요. 이런 꿈속에서 지금 헤매고 있는 것예요. 이렇게 좋은 비단 이불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거기에서 푹 잠을 안자고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면서 나 살려달라고 한단 말이예요. 강도에게 ?기면서....., 그럴 때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강도가 있고, 강도가 쫓아오고, 나는 도망가야 하고, 두려움 속에 휩싸여 있고, 구원을 요청하고……. 그래서 누군가 도와줬다면 고맙고, 그런데 눈을 떠보면 강도도 없고,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두려워 할 일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것도 없고. 도와준 사람도 없죠?
지금 우리는 이런 환영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현실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은 다 자기의 업식에 투영된 환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나쁘다는데 다른 사람은 나쁘지 않다고 그러잖아요. 내가 싫다고 이혼했는데 다른 사람은 좋다고 데려간다 말이예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 해야해요? 그러니까 내가 나빠서 버리면 세상 사람들이 다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가 내 꿈속에서만 헤매고 있지 말고 환영 속에만 휩싸여 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자. 나만 보면 나쁜데 여러 사람을 다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 이것은 하나 일, 하나의 행위 일뿐이다. 그것 자체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사건인데 사람에 따라, 이념, 사상, 종교 이런 것에 따라서(각자의 업식) 저것을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쁘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말할 때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인들 행위가 굉장히 나빠 보이죠? 그러나 불교인 자체에서는 좋은 행위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 반대도 성립한단말이예요. 나라와 나라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데서 그 자체가 공하다. 공이라는 용어가 그런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의 뜻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내 괴로움은 없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괴로움이 없어지는 단계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예요. 괴로움이 없어지만 좋아요.
그런데 어차피 우리가 꿈을 꿀 수밖에 없다면 좋은 꿈을 꾸는 게 낫다. 어차피 생각(마음)을 일으키거나 마음을 일으켜서 이것을 좋으니 나쁘니 하려면 좋게 생각하면 나에게 좋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편을 좋아하면 내가 좋다. 자식을 좋아하면 내가 좋은 거요. 지금 여러분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내가 남편을, 자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즉 남편이 나를 사랑 안 해서 내가 불행한 게 아니고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이런 말 있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말은 안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데는 미움이나 괴로움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미움이 생깁니다. 사랑하는데 왜 미워지느냐 하면 사랑 할 때는 반듯이 내가 이렇게 사랑 하니 너도 이렇게 해라. 즉 사랑하는데서 미움이 오는 게 아니라 사랑을 받으려는 데서 미움이 옵니다. 그래서 성인들이 말하기를 다만 사랑하라. 받으려고 하지 마라. 다만 베풀어라. 받으려고 하지 말라. 왜? 받으려고 하면 그것이 괴로움으로 되돌아오니까.
또 이런 것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남편이 내 마음을 도대체 이해 못한다! 애들이 엄마 마음을 이해 못한다. 학~! 그러죠? 저 사람이 나를 이해 못한다. 이 생각을 하면 누구 가슴이 답답하냐? 내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남편이 나를 이해 못한다고 하는데 남편이 나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런 남편을 내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지금 내 가슴이 답답한 것은 상대방을 이해 못할 때 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저 사람이 왜 그러지, 진짜 왜 그래?" 그러면 이해하는 태도에요. 못하는 태도에요? 못하는 태도다. 이해를 못하게 되면 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다가 "아, 얘가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또 왜 그런다고…….?"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누구 가슴이 시원해져요? 내 가습이 시원해져요. 그래서 지금 가슴이 답답한 것은 상대를, 세상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다. 이해를 안 해줘서 답답한 게 아니에요? 이해를 안 하기 때문에,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다.
도움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도움을 받으면 기분이 좋죠? 도움을 계속 받으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쪼금 미안하고 시간이 지나면 위축이 되죠? 그 사람 앞에서 위축이 되요. 처음에는 매달 100만원씩 누가 도와주면 좋지만은 매달 100만원 도와주면 좋은 감정이 계속 이어집니까? 아니에요. 다음에는 200만원, 300만원 줘야 되고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 앞에 내 마음이 자꾸 자꾸 위축이 되고 작아져요. 그래서 가능하면 이렇게 직접주지 말고 온라인으로 도와줬으면 좋아요. 그러니까 받는 것은 일시적인 좋음이기는 한데 그것은 종속적인 태도입니다. 그 사람에게 메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주느냐 안주느냐에 따라서 내 기분이 달라지죠? 그래서 우리가 사랑(도움)을,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근성에 속하게 되고, 내 삶이 그에게 자꾸 속박이 되요. 그런데 여러분들, 길 가다가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담은 남을 돕는 것은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남을 돕는 것은 그 당시도 좋지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건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받는 것은 그 당시는 좋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자꾸 찝찝해져요.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성공하면 어렸을 때 도움 받는 게 별로 자랑스럽지가 못해요. 그런데 내가 도와 줄때는 야간 아까운 게 있지만 도와준 것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잘 했다 싶어요.
<is위험성 속보>7분간.
어릴 때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내가 바쁘다고 안했다. 또 내가 바쁘고 힘들지만 내가 했다. 이럴때 10년 지나서 20년 지나서 돌아보면 어떤 게 잘했어요? 힘들지만 심부름 한게 잘했지요? 지금 좋은 것도 있지만은 지금 좋은 것이 미래에 안 좋은 것도 있고, 지금 안 좋은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좋은 게 있어요. 지나고 보면 좋은 것! 이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게 "보람!"이예요. 이 보람은 남을 도울 때, 남한테 뭔가 쓰임세가 있을 때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도움을 못 받아서 괴롭다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사실은 도움을 못 받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도움 줄려는 맘을 내지 못해서 괴롭다. 자꾸 베풀면 베풀수록 자신이 자랑스러워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제가 맏며느리인데 주위에서 자꾸 형제들이 도와달라고 그래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래서, 도와 달라고 안하면 좋겠냐? "예!" 그래요. 그러면 간단하다. 어떻게요? "망해버리면 된다!" 그러면 도와달라고 그래요, 안 그래요? 안하지. 그 사람들이 나에게 도와달라는 것은, 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내는 것은 늘 그 사람보다 그래도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나는 그래도 누군가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베풀면 그 삶이 자꾸 계속 유지가 되고, 자꾸 얻는데 도와 줬으면 좋겠다! 하면 할수록 삶이 궁핍해진다. 왜? 궁핍해야 누가 도와주니까. 이게 원리예요. 그러니까 도움을 자꾸 청할수록 그 존재가 자꾸 존재가 작아집니다. 도와주는 마음을 내면 낼수록 항상 존재가 자꾸 커집니다. 이것도 우리가 거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꾸 뭐 달라고 그러면 여러분들의 처지가 자꾸 불쌍한 존재로 전략합니다.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웃들에게 베풀게 되면 여러분들이 베풀 수 있는 존재로 자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지금 잘못 알고 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거꾸로 알고 있기 때문에, 쥐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살려고 먹는데 죽게 된 되듯이 늘 삶이 반복되잖아요. 나는 착하게 살고 참 잘한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이 이러냐? 그래서 원인을 자꾸 밖에 찾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자기를 살펴보는 게 좀 필요해요. "아, 내가 불행을 자초하는 하는 사람이구나. 행복을 늘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 이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은 자기만 불행한 게 아니고 같이 사는 남편, 아내도 불행하게 만들고, 그 사이에 난 아이들도 불행하게 만들어요.
주부들이 많으니까 하나만 더 예를 들어서 말해봅시다. 남편이 이런 저런 이유로 맘에 안 들어 그래서 내가 미워하잖아요. 그 미움이 더 커서서 "정말 저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이정도로 갔다고 합시다. 이럴 때 누가 가장 불행해지느냐, 내 자신이 가장 불행해 진다. 첫 째, 사람 아닌 것을 사람으로 보고 처음 만날 때 누구 눈이 삐었어요? 내 눈이 삐였죠? 이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 아닌 것 하고 한 집에서 20년을 살았으니까 내가 소 마구간에 살은거요? 돼지 울에 살은거요? 그러니까 내 지난 삶이 굉장히 헛된 삶이 되므로 스스로 자신을 굉장히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예요. 그러면 내 아이들이 어떻게 되느냐? 내 아이는 사람 아닌 사람의 자식이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이 자긍심이 없어요. 그리고 자꾸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면, 내가 볼 때는 당신이 나쁜 사람! 이렇게 되지만은, 아이가 볼 때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부모죠? 그런데 한 분은 내 아버지고, 한 분은 내 어머니가 서로 나쁜 사람이라고 그럴 때 아이 정신에 분열 현상이 일어나요. 남이 내 부모를 나쁘다고 그러면 안 믿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말을 하면 안 믿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정신분열이 일어나요. 그래서 이것은 내 자신의 인생에게만 손해가 아니고 내가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자식들에게 굉장히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이런 것도 우리가 무심코 그냥 행하는데 자기를 자꾸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옛날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 고주몽이가 있잖습니까. 고주몽을 낳은 유화부인 아니닙까? 그 유화부인이 어느 날 야회 갔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이 남자가 처녀가 예쁘니까 거짓말을 했어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천제의 아들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처녀가 믿고 하루 밤을 잤어요. 그 이후로 이 남자는 어디 가버리고 연락이 없어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부모가 알게 되니까 야단이죠? 그래서 집 밖에 쫓아내서 어느 집에 유배를 시켰는데(부모 말 안 듣고 그랬다고…….) 그러다가 그 나라의 임금 눈에 띄어서 왕궁에 가서 살게 되었어요. 이게 사기 당한 거 아니에요? 만약에 사기 당했다 하고 그 남자를 미워했다면 훌륭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부모가 픽박을 해도. 임금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 임금이 뭐라고 해도 나는 "그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 이렇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단말이예요. 정부인의 아들이 아니니까 왕궁에서 차별 받았잖아요. 그래도 그는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왕자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이다" 라고 늘 긍지를 심어줬단말이예요. 그러니까 하룻밤 자도 이렇게 남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에게도 늘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애을 키웠을 때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요. 남편이 일찍 돌아갔거나, 이혼을 했댜고 해도 그게 아이 성장에 장애가 아니에요.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힘들어하고 열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러면 반대도 마찬가지겠죠? 남편도 아내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행복하고 또 자녀들도 좋은 거예요.
여러분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찮가지예요. 부모에 대해 불만이 많잖아요? 그러나 누가 이 세상에서 나를 그렇게 키워줬겠어요. 길 가는 사람은 아무도 안 키워줬잖아요. 길 가는 사람한테는 원망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준 부모에게는 원망하잖아요. 부모가 나에게 못해서 뭔가 부족하게 해줘서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남하고 비교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 안 해줘서 불만이거든요. 누가 나에게 돈을 안 빌려준 사람한테는 원망을 안 해도 빌려준 사람한테는 내가 원한만큼 안 빌려줬다고 원망하는 것하고 같단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어떤 부모를 만나도 부모에 대해서는 늘 감사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내면, 자신의 심리 상태에 자긍심(긍정적)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가 나쁜 사람이다. 이러면 자기가 태생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긍정을 찾을 요소가 없어져요. 그래서 부모에게는 감사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내나 남편에 대해서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이혼해서 헤어져도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좋게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에게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같이 안 살아도 구김살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왜 엄마하고 헤어졌어? 물으면 내가 성격을 못 맞춰줘서 그래,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야. 이야기 해주면 긍정성이 생기고, 같이 안 살아도 아이에게 구김살이 없어집니다. 이런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쪼그만 애를 나놓고 어른 부부가 아이를 자기편을 만들려고 상대를 미워하는 소리를 하게 되면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래서 우리들의 자녀교육에 문제가 생긴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낫다고 어렵다고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런 것에 열등 의식을 같고 있고,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이 열등의식이 생긴다. 가난해도 검소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거기에 긍정성을 가지면 내가 구김살이 없으면 아이들도 아무런 구김살이 없다
행복하려면 세상만사가 원하는대로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하나를 돌려서 이야기 해보면. 원하는 것을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고, 원하는 게 안 이루어지면 기분이 나쁘죠? 그래서 우리는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데, 조금 나만 생각하지 말고 사회 전체를 볼 때 각자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없어요.) 원하는 것을 이루지면 행복하다 하는 것은 그런데 이 세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행과 불행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태생적으로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없는 조건이다.
두 번째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원하는 것이 다 이루워 질 수 없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게 다 이뤄지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자, 모든 사람이 다 천살까지 살고 싶다. 우리 사회가 우리가 다 천살까지 살면 우리 좋아질까요? 안 좋아질까요? 그러면 우리가 무덤을 만들 때 명당자리를 찾는데 모두가 명당자리라서 죽은 사람을 묻었는데 시신이 다 안 썩는 다면 이게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나쁜 일이다. 여러분들 아이들이 잘 하든, 못 하든 다들 공부해서 서울대를 가고 싶어 하는데……. 원한대로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원한대로 다 된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될까요, 오히려 파산할까요? 파산하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돼서 세상이 혼란스러운 게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세상은 금방 파멸해버린다. 그러니까 안 되니까 그래도 요만큼이라도 유지가 되는 것예요. 그런데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좋은 게 아닌데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좋다고 잘 못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다 더 문제는 자기 힘으로 못 이루면 자기 노력으로 어째든 해보려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남에 힘을 부탁해 해달라는 거예요. 애가 공부를 못하면 돈으로 부탁해서 넣어 달라고 그러죠. 그래서 부패를 해서 학교를 넣고, 부정을 해서 학교를 넣죠. 옛날에는 부정부패가 많았잖아요? 요즘은 투명하게 하죠?
그런데 제가 종교계에 있지만 저도 모순 속에 사는 게 부처님한테 와서 기도하면 좋은 대학교 들어간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거요? 공부 못하는데 기도 많이해서 잘 보이니까 넣어준다. 보시 많이 하면 된다. 이럴때 이것이 사실 부정부패나 같은 거 아니닙까? 심리가 똑같은 거요. 그런데 사회에서는 이것은 잘못됐다고 정화합니다. 자기는 원하지만 주위에서 그걸 안된다고 그러죠. 그런데 이게 오히려 "아, 가피력을 입었다. 은총이다" 하는 데는 종교계밖에 없다. 다 이것이 우리들의 심리에 있다. 이게 과연 옳은 거나? 이게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합하느냐?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세상이 망하는데, 왜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느냐?
이런 것도 우리가 특정 종교나 종교를 넘어서서 사회에서 검토해 볼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고를 갖는 한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사람마다 있지만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닌 줄을 알아버리면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탈 때 누구든지 한 번에 타고 싶잖아요. 안되잖아요. 아이들이 한 번 만에 타지는 게 아니라 넘어지는 게 몇 번의 과정 속에서 탄다. 그러면 아이들은 넘어지면서 또 일어나 타고 하면서 간단말이예요. 순간순간은 실패하지만은 사실은 실패가 아니에요. 왜, 넘어지는 게 실패라고 하지만 넘어지고 넘어지는 덧은 것은 타는 성공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예요. 즉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넘어지는 것은 곳 타는 길이다. 말이 안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실수를 할 때 그것에 좌절하는 것은 욕심이다. 딱 한 번 만에 타고 싶다 이거요. 안된다고 자전거를 버리는 식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타야 된다. 언제까지? 타질 수 있을 때까지 타야한다. 이것이 긍정적,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 원하면 된다" 이 말이 아니라 그 주어진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본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워하는 것은 욕심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이 안 되는 줄 알면 그만 둬도 괜찮고 이것이 몇 단계 필요하다면 꾸준히 노력할 뿐이지 그것을 가지고 좌절할일 아니다. 그런데도 절에 다니면서 자기가 기도, 원하는 되로 안 이루어졌다고 기도해봐야 영험도 없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이다.
진실한 불자, 진실한 크리스찬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일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분의 지혜로운 눈으로 봐서 이뤄지는 게 좋겠다! 하면 이뤄지는 것이고, 이루워지지 않는게 좋겠다 싶으면 안 이루어져야 된다 말이예요. 쥐가 쥐약이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잘 하는 것예요? 안 되도록 하는 게 잘한 거예요?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면 그것을 해주는 게 잘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어요. 80년대에 학생이 학교를 다니면서 데모를 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이 됐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매일 와서 기도를 해요. "우리 아이 제발 좀 석방되게 해달라"고...., 그런데 1심에서 1년형을 받고 집행유해를 받아서 3개월 만에 석방이 되었어요. 이때 어머니가 너무 너무 좋아했어요. 자기 기도가 성취되었다고……. 그런데 그러고 나서 3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그냥 감옥에 뒀으면 이런 일은 안 당해지 않았나……. 하셨는데, 이럴 때 우리가 이루어진 게 꼭 좋은 것은 아니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정성을 기우려서 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는 여러분이 믿는 각자의 그분의 몫이다. 그래서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감사합니다."라고 다만 감사할 줄을 알아야 되요. 내 식대로 안 된다고 믿어도 소용없더라! 그것은 진실한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내야 된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심도 깊어지고 또 마음도 늘 행복합니다. 내가 믿는 그분을 원망하면 누가 불행해져요? 그거마저도 부정해버리면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히면 바깥으로 표현 안하더라도 이런 현상이 심리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 없고,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살이니까 원하는 게 있죠? 그러나 다만 그 일을 최선을 다 해서 할 뿐이지.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너무 목매달고 집착하면 끊임없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들이, 아이는 공부를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죠? 그리고 공부를 하는 대로 또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 기술, 그 능력 그 수준에 맞게 학교 가는 게 안 나아요?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갔다고 좋아하지만 결국 적응 못해서 어렵다.
여러분들은 결혼도 마찬가지다. 다 자기보다 인물도 잘났고, 돈도 많고, 마음씨도 좋고……. 사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사랑 좋아하내" 욕심의 집합체다. 그래서 결혼하기 때문에 결혼해보면 항상 실망 할 수밖에 없어요. 상대 문제가 아니라 내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래서 결혼의 화를 자초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를 볼 때 각자 자기 업식에 투영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남편과 내가 모든 면에서 서로 달라요. 서로 다름을 첫째 인정해야 되요.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구나." 라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인정하는 게 존중하는 거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아,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구나." 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 이예요. 길가다 좋다고 확 껴안아버리면 성 추행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랑타령 너무 하지 마시고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그 기초위에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게 될 때 그 마음에서 저절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우러나오게 된다. 그런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저절로 울어 나올 때 누구 기분이 좋다? 내가 기분이 좋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사물의 성질을 알아야 됩니다. 첫째, 어린 아이는 따라 배우는 성질이 있거든요. 그래서 애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 그 다음 청소년, 사춘기의 아이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시간이거든요.(시켜봐는 시기) 그때는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되니까 지켜봐야 된다. 그 다음에 성년이 되면, 자기도 어른이라는 생각 있기 때문에 존중해줘야 한다. (존중해주는 시기) 그 다음에 노년이 되면 고쳐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하고 같이 살 때는 안 고쳐지기 때문에 맞춰줘야 된다.(부모/맞춰드리는 시기) 안 고쳐지는 것을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괴로워지니까. 그래서 어른이 뭐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못할 때는 어떻게 해요? 그러면 "죄송합니다."하면 된다. 이게 지혜예요. 그 원리에 맞춰서 마음을 쓰면 항상 인생살이가 지금보다는 나아진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 듣고 하면 되냐? 안됩니다. 왜 그러느냐?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일으킨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잘 안 되요. 안되면 다시 알아차려야 되요. "아, 내 업식에 내 습관에 사로잡혔구나! 아, 다시 해봐야지!" 이렇게 연습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인생살이를 매일 매일 연습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되요. 그래서 어제까지는 연습이고, 오늘은 본게임이고, 오늘 지나면 다시 오늘까지가 연습이고, 내일 다시 한 번 해본다. 이런 마음을 내면 실수가 계속 되는 속에서도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
<강의 후 질문 과 답변>
(진행자와의 대화 내용 생략)
진행자 이금희씨의 질문 - 특히 사랑에 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집착을 놓기가 힘들잖아요? 아이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부인에 대해서도요…….^^
법륜 스님 답변 - 그게 "사랑에 대해서 놓기가 어렵다"는 것도 사물을 제대로 안보는거고요. 정말 사랑한다면 어린아이는 보살펴야 되거든요 그러면 중, 고등학교 사춘기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할 기회를 줘야 자립심이 생기잖아요. 그때 보살펴버리면 그 아이는 성장 할 수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성년이 되었을 때 자기가 뭘 못하죠. 그것은 아이에게도 나쁘지만 여러분들이 성년이 된 자녀를 죽을 때까지 또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그 시행착오를 거듭한 것을 아주 냉정한 마음으로 지켜봐주는 게 사랑이지, 가서 도와주는 게 사랑이 아니다. 왜 그렇게 하냐하면(집착 하냐면) 어릴 때 돌봐줬던 그 습관 때문에 그 습관의 연장선상에서 자꾸 그렇게 마음이 간다 말이예요. 그러니까 거기에서부터는 아이에게 집착을 끊는 그런 마음을 내는 게 아이를 향한 나의 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런 냉정함을 유지하는 게 어렵죠? 보살피기도 어렵지만 냉정하기도 어렵잖아요. 보살펴서 좋을 때는 보살피는 게 사랑이고. 물러서게 좋을 때는 물러서 주는 게 사랑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그게 아이 때문에 안되는 게 아니라 내 습관 때문에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짐을 다음에 내가 또 짊어져야 돼요.
-2009.6.3 드디어 녹취(일부)마무리 짓다.- 혜명등 합장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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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혜의 등불!!! 원문보기 글쓴이: 반딧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