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는 종교적인 사안을 이유로 예수님을 처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둔갑시켜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십자가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유대 당국자들의 모함과 빌라도의 비겁함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자 대속의 죽음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는 대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살펴볼 부류는 예수님을 직접 못 박은 로마 군병들입니다. 지배자의 위치에 있던 그들은 유대의 한 청년을 못 박으면서 우월감과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그 분의 팔과 다리를 직접 잡기까지 했었지만 과연 그들에게 생명이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온 이도 있었고 귀신들린 자녀를 치료하기 위해 온 이도 있었습니다. 진리와 영생에 대한 의문으로 온 사람도 있었으며 독립을 위한 메시아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온 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오셨습니까? 나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나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류는 네 명의 여인들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모두 도망가는 상황에서 그녀들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고 임종을 지켰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보다 그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더 큰 순종이요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을 따르고 안타까움으로 기도했던 여인들처럼 한평생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들과 함께했던 한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본문의 저자인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슬픔 속에 남겨질 두 사람에게 서로를 돌봐주고 사랑하며 가족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 등 모든 어려움을 주님께서 만져주십니다.
이 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효성이나 요한의 제자로서의 의리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들의 가족공동체 곧 교회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자 예수님을 그 머리로 하는 몸의 각 지체입니다. 따라서 서로를 자신의 부모이자 형제요 그리고 자녀로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이루어가는 방법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시기나 미움이 없어야 하며 속상한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됨을 힘써 지켜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남겨진 자들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남겨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새 힘을 얻고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주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나의 아픈 마음이 회복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시고 내 심령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구하며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의 은혜를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입은 은혜에 힘입어 가정과 교회를 하나되도록 힘써 세워나가며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