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그러나
정 성 수(丁成秀)
나의 첫사랑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군 트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 서울에서 피란 나온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객지인 경기도 지방의 이곳저곳을 부초처럼 떠돌았다.
내가 사는 마을(일곱집메)에서 학교까지는 약 시오리(약 6킬로), 내 걸음으로 왕복 3시간이 걸렸다. 버스 타는 곳은 5 리 정도,
집에서 30분을 걸어 나가야 했다. 나와 우리 마을, 이웃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1시간 반을 걸어서 등교하거나, 중간에서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미군 수송용 트럭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
그 중 제일 좋은 것은 미군 트럭이었다. 차비도 전혀 들지 않고 멀리 걸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느 하늘 푸른 가을날 아침, 한
미군 트럭이 우리들 곁에 멈춰서자,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차에 올랐다. 그 동작들이 얼마나 날쌘지 모른다.
남들보다 빨리 타면 긴 의자 위에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가 일찌감치 의자 위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웬 처음 보는 낯선 여학생이 뒤늦게 그리고 아주 힘들게 차에 오르고 있었다. 아! 그
소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쩌릿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깊은 속눈썹 속의 새카만 눈, 적당히 오똑한 코, 너무 예쁜 입술, 신비스러울 정도로 뽀오얀 살결, 가늘고 긴
목, 날씬하고 큰 키…! 나는 그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반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날부터 그 소녀에 대한 나의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수소문을 해 보니, 그 소녀는 바로 내 옆 마을에 사는 소녀였다. 그렇게
가까운데 살고 있는데도 왜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지 이상하고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소녀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의 친척이었고 그 동급생은 그 여학생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물론 여자중학교에 다니는 그
소녀는 나와 같은 나이인 열다섯 살, 같은 2학년이었다.
나는 내 동급생을 우체부(?) 삼아 그 여학생에게 열심히 연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소녀를 향한 내 마음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솔직하고 진지하게 온 정성을 다 기울여서 써나갔다. 하지만 여러 번 편지를 보냈는데도 나에게 답장이 오지를 않았다.
편지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스물아홉 번 편지를 보내는 동안 그 소녀는 꼭 한 번 나에게 답장을 보냈을 뿐이다. 그 답장의
내용도, 자기는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여자이니, 잊어달라는 것이었다. 잊어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히 잊혀진다면 세상에 그 누가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겠는가.
나는 답장이 오거나 말거나 그저 변함없이 열심히 그 소녀에게 나의 마음을 써서 보냈다. 숙이! 그렇다. 그 여학생의 이름 끝자는
‘숙’이었다.
나는 그 소녀를 내 친구들과 함께 ‘이스트’라고 불렀다. 영어로 동쪽, 즉 나의 희망이라는 뜻이다. 내가 지은 그 별명은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 소녀가 나중에 남녀공학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내 편지를 스물아홉 번 받았다고 해서 ‘29번’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시집과 소설책들을 읽으면서 중2때 중편소설「복수 뒤의 복수」등 모두 6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잠자는 시간이 괜히
억울해서 날마다 잠도 몇 시간 자지 않았다. 중 3때부터는『현대문학』과『자유문학』을 매달 사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잘못 아셨다가 내가 공부는커녕 엉뚱하게도 소설을 쓰는 걸 아시곤 노발대발, 소설 써놓은
대학노트를 북북 찢어서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셨다. 문학을 하면 가난하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아버지가 찢어버린 대학노트들을 눈물을 흘리면서
바늘로 꿰매었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6.25사변 피란 중에 외사촌 누나가 내 눈앞에서 폭격기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것을 보았고 몇 달 뒤 두 살짜리 여동생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다섯 살짜리 남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나는 세상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슬펐다. 말하자면 그런 나에게 문학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자 가장 뜨거운 나의 분신이었다.
그 뒤 나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길이가 긴 소설 대신 주로 시를 썼다. 중 2때부터 중 3때까지 숙이에 대한 사랑시만도 수백 편을
썼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작이다. 수도 없이 많이 쓰고 수도 없이 많이 버린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날,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그날따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숙이의 반대편에서 거의 1시간 반 동안 함께
걸었다. 그동안 나는 내 친구들과 함께 기차역 앞에서 숙이를 기다리다가 먼발치에서나마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달래는 일을 자주
했었다.
비포장도로를 걸어가자니 차 한 대가 지나가면 숙이나 나나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숙이는 내가 길 반대쪽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알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시간 반 동안 같이 걷다가 우리 마을에 거의 다 온 3거리 길에서 숙이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길로 접어들 때까지 나는
단 한 마디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나는 그런 못난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나다 못해 자동으로
폭발해버릴 지경이다.
나는 그 당시 당수(태권도) 빨간 띠 2급이라서 아무 때고 초단승단 심사를 받을 수가 있었다. 유도를 배우든 권투를 배우든 덩치가 크든
키가 크든 힘이 세든 어떻든 간에 나는 내 또래 소년이라면 그 누구도 겁나지 않을 때였다.
그런 내가 세상에, 나와 동갑내기 여학생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1시간 반을 허공 속으로 날려버리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건 바보 급수도 가히 국제급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마치 내 얼굴에 두꺼운 철판이라도 깔아놓은 것처럼 숙에게 편지 보내는 일을 끝내지
않았다.
그 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나도 시위(데모)를 했다.「젊음의 피」등 여러 편의 4.19 시도 썼다.
가을날, 동네 간이극장에서 ‘음악콩쿠르(콩클대회)’가 열렸다. 요즘 말로 하자면 노래자랑대회다. 나는 용감하게 참가 신청을 했다.
콩쿠르나 쇼가 있는 날이면 극장 안이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이웃동네 사는 숙이도 분명히 콩쿠르를 구경하러 올 것이다.
나는 순전히 숙이에게 나의 사랑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참가비를 내고 출연 신청을 한 것. 내 예상대로 숙이는 극장 중간에서 조금 앞쪽
자리에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의 차례가 왔다. 내 노래 곡목은 ‘나 혼자만의 사랑’이었다.
“나 호오온자아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오오, 나 호온자아만이이 그대에를 갖고 싶소오오, 나아 호온자아만이이 그대를 사랑하여어 여엉원히
여엉원히 행보오옥하게 살고오 싶소오오……!”
말하자면 노래로 한 사랑 고백이었다. 중3, 나는 최연소 신청자였다. 예선은 통과했지만 본선에서는 입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녀에게 노래로 사랑고백을 한 것이 대단히 유쾌하고 행복했다.
중3 때부터 고3 때까지 시 동인지『탑(塔)』(김상욱, 안동진, 정성수)을 네 번 냈고 고 1때 산문 동인지『엉겅퀴』(박춘기, 정성수,
홍상표)를 냈다.
중학교 졸업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 때는 졸업기념으로 소위 <사인지>라는 것을 돌리는 게 유행이었다. 어떤 이성을 좋아하느냐,
취미가 뭐냐, 장래 희망이 뭐냐? 이런 종류의 여러 항목들을 등사(프린트)해서 이성 또는 동성 졸업 예정자들에게 나눠주었다가 다시 회수해서 한
권의 책처럼 묶어서 보관하는 식이었다.
나는 졸업기념을 좀 남다른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중학교 졸업을 앞둔 1961년 1월 30일에 낸 첫
시집『개척자』이다. 나는 그 시집을 인쇄해서 출판하고 싶었지만 경제 사정이 허락지 않아 할수없이 등사판으로 냈다.(그 시집은 나중에 재판을
찍으면서 동천사에서 활자본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나는 물론 그 시집을 동급생을 시켜 숙이에게 보냈지만 고맙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축하 편지 한 장 받지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고향인 서울에서 다니게 되었다.
틈만 나면 열심히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1학년 때는 글만 쓰겠다고 학교를 자퇴했다가 어머니의 통곡 때문에 2주일 만에 복학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번째 시집(등사판)『투쟁』을 냈다. 수백 행짜리 장시「악담」이 실린 것이 특징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녀인
숙이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글을 썼다.
1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친척 오빠에게 사정을 해서 숙이를 마을 근처 야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달빛이 교교히 내리비추는
초저녁이었다. 풀잎 위에 앉아있는 숙이와 나의 거리는 약 2미터!
너무나도 꿈만 같았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제대로 얘기다운 얘기도 나눠보지 못한 채
우리는 바보같이 헤어졌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나는 용감하게(?) 숙이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계세요?”
몇 번 소리를 지르자 다행히도 숙이가 나왔다.
“어머니 계셔?”
“응.”
“아버지는?”
“나가셨어.”
나는 내 집에라도 들어가듯 씩씩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숙이 어머니가 나오셨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숙이의 어머니에게 우선
다짜고짜 큰절부터 올렸다.
숙이 어머니는 웃으면서 책꽂이를 가리켰다.
“저 시집을 낸 학생인가?”
시집『투쟁』이 그곳에 꽂혀 있었다.
“네. 어머님. 가끔 숙이를 만나게 허락해 주세요.”
숙이 어머니는 대답 없이 여전히 미소를 띄웠다. 마침 점심때였는데, 숙이 어머니는 손수 밥상을 차려서 숙이 방에서 우리 둘이 함께 식사를
하게 해 주었다. 대접 잘 받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집을 나섰다.
나는 숙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더욱 열심히 시와 소설을 썼다. 고 2때는 학생잡지『학원』에 단편소설「편지」「식모」「제로」를
발표했다. 작가 김동리 선생이 선자였다.
시「하늘」(박남수 시인 선)을 발표했는데, 내 이름이 아니라 숙이 학교 이름과 숙이 이름으로 발표했다. 고 3때는 시「시신에게 부치는
엽서」「치아의 서」를 발표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이 선자였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숙이와 나의 첫사랑은 잘 숙성이 되지 않았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이가 문학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고
느껴서인지 숙이에 대한 나의 사랑의 감정도 조금씩 시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숙이의 내면세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소녀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첫인상만으로 그 여학생을 사랑해왔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나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숙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순수 무구한 소년시절, 한 소녀를 짝사랑하면서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오래 전에 숙이와의 첫사랑을 그린 전작 장편소설「첫사랑 사냥꾼」을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추억 속에서 늘
푸른 나의 소녀여, 부디 한평생 아름답고 뜻있는 생애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