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미학
김희애의 카리스마는 공격적이거나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것이 아니다. 너무 특별해서 범접할 수 없을 듯한 것과도 다르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우리를 공감하고 동의하게 해서 마침내 설득해내는 평범함에서 비롯된다. 김희애는 참 좋은 배우다.

실버 메탈 비즈 디테일 튜브톱 블랙 시폰 드레스, 블랙 오픈토 펌프스 모두 필립 플레인(Philipp Plein), 크리스털 드롭 이어링 수엘(Suel).
삶은 일회적이다. 누구도 태어나 살다 죽는 단 한 번의 삶을 번복하거나 피해갈 수 없으니 어찌 보면 모든 인생은 유사하고 공평하다. 그러나 남들도 나와 다를 것 없을 거라며 자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말로는 자기가 지극히 평범하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설마 내가 인간의 평균치 삶을 통계 내는 데 기여하며 살고 있다고는 믿을 수없는 게 사람 맘이다. 하지만 문제는 1회 특별 상영하고 종영하는 인생이라는 영화가 하필이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블랙코미디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희망하고, 웃고, 만족하지만, 그랬나 싶게 피로하고, 실망스럽고, 슬프며, 아프다. 사는 건 대체로 좋아 죽을 것 같을 때보다는 고단한 일에 가까울 때가 많은 것이다.
김희애가 연기하는 인생은 쉽거나 만만한 적이 별로 없다. 그녀가 생명력을 불어넣은 캐릭터들은 부자일 때도, 중산층 주부일 때도, 친구의 남편을 빼앗는 잘난 여자일 때조차도 결국은 한 번 살고, 한 번 죽으면서 남들 겪는 만큼은 겪어야 인생이 지나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는 게 지루하다는 건 철딱서니 없는 불평일 뿐이고 애초에 인생은 견디는 거라는 걸 방증하기라도 하듯, 김희애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연기를 납득하고 공감한다. 김희애는 1993년 <101번째 프로포즈>를 끝으로 이후 단 한 번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 그 후로 그녀의 연기는 TV 드라마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하고, TV 드라마가 자극적인 갈등 구조로 보는 사람의 감정이입을 유도한다고 한들, 또한 김희애가 김수현 같은 최고의 드라마 작가들과 만나 자신을 빛내줄 대본을 받았다고 해도, 김희애가 살을 붙인 캐릭터들에 대한 공감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대충 살 여유가 없다. 자폐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산다는 건 시댁과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혼자 삼키고 감수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뜻하고(<부모님 전상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남자와 결혼한 가난한 연상의 여자라는 죄로 최선 이상의 삶을 살았던 여자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뒀을 때 인생이 무너지는 허무와 상실, 아무도 무엇도 채워줄 수 없는 절대적인 고독을 맛봐야 한다(<완전한 사랑>). 편리하고 계산적인 결혼을 선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뒤에 윤리나 도덕, 남의 눈 따위 상관없이 욕망에 충실하게 살려고 해도,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인 유부남과의 사랑은 결국 함량 미달이라는 걸 처절하게 깨닫고 떠나야 하는, 혹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일일 뿐이다(<내 남자의 여자>). 유능한 재벌가의 딸이라고 해서 인생이 녹록하지는 않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도 후처의 자식이라는 낙인, 텅 빈 내면을 채울 수 없는 운명은 어느 한순간 그녀에게 평화와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마이더스>).

플라워 자수 패턴 보디수트 디테일 누디 핑크 시폰 롱 드레스 엠에스지엠 바이 주느세콰(MSGM by Je Ne Sais Quoi), 누드 베이지 오픈토 페이턴트 펌프스 지미 추(Jimmy Choo), 로즈 골드 플라워 모티프 크리스털을 세팅한 볼드한 네크리스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연기하면서도 김희애의 연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한 번뿐인 생을 치러내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누구도 자기 운명을 피해가려 하지 않으며, 징징대며 엄살 피우지도 않는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생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김희애의 연기가 매번 격찬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흔히 볼 수 없는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그들에게서 삶이라는 보편성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을 직면하고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김희애의 인물들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할 것을 깨닫는 순간에도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절규하며 폭발할 때조차 내 삶을 떠안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보통의 우리는 종종 비겁하게 외면하거나 적당히 타협한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국 자기 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은 같다. 김희애의 인물들은 누구보다 의연하고 성실하게 생을 직면하지만, 결국 나도, 그들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무게의 삶을 견디고 있다는 공감대와 동류의식이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는 비밀인 것이다. 그런 김희애의 연기 비법은 뜻밖에 심플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한대요? 저는 그냥 대본을 여러 번 외워요.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외우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오늘 외우고 다음 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고, 다시 외우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돼요. 어떤 배우들은 대충 외워야 자유롭다고도 하던데, 저는 안 그래요. 제가 늘 대사가 많은 편이에요. 수시로 자주 반복해서 외우는 수밖에 없어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외우고, 앞에서부터 외우다 뒤부터 외우고, 중간도 외웠다가 그래요. 그렇게 해야 완벽하게 외워지고, 그래야 연기가 나오죠.”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명문대 합격생 같은 말이지만, 평범하고 당연한 노력과 일상이 김희애라는 배우의 현실성을 배가시킨다. 그녀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을 키우는 아줌마다. 전도 유망한 기업가와 여배우의 만남이라는 사실 때문에 화제가 됐던 그녀의 결혼은 호기심 가득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안전하고 견고하게 여기까지 왔다. 보통 삶의 소중함이 뭔지 알았던 부부의 현명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촬영을 하는 동안 아들들은 수시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아쉬운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블랙 슬릿 디테일 롱 슬리브 기모노 블라우스, 블랙 언밸런스 톱, 블랙 쇼츠 모두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실버 스퀘어 크리스털과 메탈 체인, 블랙 리본으로 장식한 볼드한 네크리스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저 좋을 때는 전화 안 하죠. 엄마한테 필요한 거 있으니까 전화하는 거예요. 요리요? 요리는요, 무슨. 아침 해 먹이는 건데요, 뭐. 꼬박꼬박 밥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빵이나 시리얼 먹일 때도 있어요. 아유, 우리 사는 게 보통도 너무 보통이라 직접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애들이 엄마가 배우인 걸 좋아하긴 해요.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애가 엄마, 열심히 하고 오세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얘, 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면 좋으니? 그러고 나왔어요. 기가 막혀서.(웃음)”
종합편성채널 드라마라는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화제가 됐던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서 그녀는 대치동 엄마들 틈바구니에서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려고 애쓰는 엄마로 분했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에 여자로서, 엄마로서 온갖 비난을 받으며 굴욕을 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여자의 연기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김희애의 구체성에 빚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배우는 인간이 아니라 잠을 안 자나, 밥을 안 먹나. 뭐가 그렇게 특별해요. 배우라는 게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는 게 저는 참 웃겨요. 그냥 하는 거지 무슨. 물론 저도 할 때는 목숨 걸고 하죠. 하지만 이순재 선생님이나 정혜선, 나문희 선생님 같은 분들 보면 화면 밖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이세요. 하지만 작품에서는 엄청난 일을 해내시는 분들이잖아요. <무자식상팔자>에서 이순재 선생님 보세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인물을 과장되지 않게 연기하면서 감동을 주시잖아요. 그렇다고 남들이랑 다르게 사시는 거 아니거든요. 연기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배우들이요? 운명은 운명이죠.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까 자꾸 하게 되더라고요. 하기 싫어도 그만두지 않게 되는 거, 그게 운명이지 뭐.”

진주와 골드 체인으로 장식한 튜브 라인 트위드 드레스, 페일 핑크 컬러 스트랩 힐, 볼드한 진주 네크리스 모두 샤넬(Chanel).
똑부러지고 야무지기는커녕 아무리 있는 척 질문을 던져도 아무것도 아닌 척 답을 하는 그녀가 하도 느긋하고 평범해서 되레 차돌에 참기름 발라놓은 것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는 작가 김수현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작품 밖에서는 누구나 그렇듯 그냥 그렇게 살아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김희애를 특별하게 만드는 내공이다.
카메라 앞에 선 김희애는 아름다웠다. 마흔일곱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탄력 있고 늘씬한 몸매는 사진으로 찍어놓고 보니 더 완벽했다. 먹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라니, 자기 몸을 연기하기에 좋은 기계나 악기처럼 다루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성형의 흔적이 없는 얼굴에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옛날 사람의 분위기가 풍긴다. 담담하고 차분하지만 어떤 가혹한 시련에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함이 그녀의 얼굴에 기품을 더한다. 그러고 보니 이 배우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새로운 룩을 유행시키는 패셔너블한 여자다. 그러나 아무도 김희애를 패셔니스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완벽하게 소화한 패션조차 배우 김희애의 일부일 순 있어도 집으로 돌아간 인간 김희애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무엇일 거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 좋아요. 아니라고 하면 천벌 받죠. 너무 감사하고. 물론 힘들 때도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했으니까 숨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늘 새롭고, 구속받지 않고, 여러 인생 살아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 있고, 성차별 없고, 정년퇴직도 없고, 자기만 열심히 해서 끝까지 버티면 나이 들어서 새로운 기회가 올 수도 있는 게 배우잖아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치를 만큼 치러야죠. 좋은 것만 가질 순 없으니까. 실수도 하고, 그런 거죠. 어떤 사람은 안 그런가요? 각자 자기 위치에서 겪는 건 다 같죠. 내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좋았냐고요? 지금이죠, 뭐. 초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웃음) 에이, 여배우만 나이 먹나요? 나이 먹는 건 다 똑같아요.”

블랙 슬릿 디테일 롱 슬리브 기모노 블라우스, 블랙 언밸런스 톱, 블랙 쇼츠 모두 앤 드밀뮈스터(Ann Demeulemeester), 블랙 리본으로 장식한 볼드한 네크리스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에디터: 이지연
첫댓글 정말 아무거도 아닌 척 답을 해요ㅎㅎ멋지다는 말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