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다 문득 바람 쐬러 가고 싶다는 마음에 길을 나섰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해가 뉘엿하니 가까운 곳이라야 했습니다.
잡념이 있을 땐 마음에 예쁜 생각을 담기 위해 자연과 소통을 하는 게 가장 합당하다는 ....
해서 양평 물가에 나가 마음을 담그고, 영혼을 씻어 내야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곳은 팔당의 맑은 물만이 아니고 신앙의 선조인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는 곳.
사람의 향기는 얼마나 오래 갈까?
조선 정조 임금을 모셨다 하니 그리 먼 세월은 아니나
인간 생애가 길어야 백년이니 결코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세월이고 보면
실제론 거의 영원이나 다름없는 먼 날인 셈입니다.
그런 그분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니....
영겁같은 세월이라도 그곳에 가면 그분을 숨쉴 수 있을 듯 했죠.
용인에 사는 게 젤로 기분 좋은 일은 전국 어디든 그리 먼 느낌이 안든다는 겁니다.
양평에 가는 길엔 구름과 햇살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분의 묘소에 가서 잠시 숙연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그분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턱을 괴고 상석에 기대니 마치 품안에 기댄듯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평화로움이 서서히 스며 듭니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으니 고요가 찾아 옵니다.
한 신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제는 아무것도 안하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고...
그래서 신부님들은 우리가 성당에 들어설 때쯤 고요히 앉아 하느님을 숨쉬는 거였구나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들을 견디지 못하는 저의 요즘..
고요함을 즐기는 일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 남편이 몸이 지쳐 하루쯤 쉬어야겠다고 해서 기꺼이 동의 했습니다.
전 쉬겠다했으니 아무 계획도 잡지 않았는데
그날 아침 새벽에 운동 약속을 해 놓았고 오후엔 여행계획을 잡아 놓은 거 있죠?
"이게 쉬는 거에요?"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쉬는 거야."
직업적인 일을 안하면 쉬는 거였더라구요...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 , 그게 필요한 게 휴식이었던 겁니다.
현대를 살면 늘 조급해서 고요를 즐기는 마음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정약용 그분은 참 자상한 성품이셨나 봅니다. .
귀양 13년째 아내가 시집올 때 해온 여섯폭의 다홍치마를 보내오자
그걸 잘라 아들에게는 교훈된 말을, 딸에게는 梅鳥圖를 그려 보내준 자상한 아버지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하면 긴 담뱃대 물고 엄한 아버지가 상징인데
그 시대에도 이리 자상한 아버지가 계셨다니 참 신기하다고 여기다가 사람은 성품 나름이겠다 싶어졌습니다.
나이가 드니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 속이 꽉 찬 진실한 사람이 참 귀해집니다.
정약용은 천주학에 대한 박해가 심할 때 스스로 천주교도임을 임금께 고하고 관직을 버리고자 하나
당시 정조는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높이 사 굳이 가까이 두고자 했다 합니다.
수원성을 축조할 거중기를 만들고, 배로 최초의 다리를 이어 한강을 임금이 건너게 하기도 하고,
암행어사를 지내고 나서 목민관의 자질을 위해 목민심서를 쓰게 된 것도
그가 백성을 위해 쓴 책들이 자그마치 오백여권이라니 그의 열정과 사랑의 질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는 가히 천재였던 듯합니다.
그 서릿발같은 박해시대에서조차 죽일 수 없는 한 인간의 탁월한 자질..
백성을 사랑한 그는 임금 또한 사랑하여 서로 교감한 듯합니다.
고관대작들의 탄핵 요청에도 꿋꿋이 자신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신하를 지키는 임금.
오직 임금과 백성과 자신의 양심을 위해 열정을 바치는 신하..
정조는 10개의 시를 적어 보내며 다섯편는 집안에 남겨주고
다섯편은 다시 돌려 보내면 언젠가 너를 다시 부르겠다하여 그를 감동시켰다 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이는 사랑과 신뢰..
그토록 귀한 덕목이 요즘 이 시대에 만나기 참 힘듭니다.
그들의 사랑이 오늘 그립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형대신 평화로이 고향이 와서 늙어 죽어 양평에 묻힐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일화를 알리는 동영상을 차분히 보고 그의 일화가 쓰인 글들을 읽고
강진에 있다는 다산초당을 가보리라 결심도 하며
그저 여기저기를 걸어 돌아 보았습니다.
여유당전서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그의 저술에 담긴 깊은 뜻을 언제나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가을 냄새가 나는 길을 거닐다 그분의 동상도 만났습니다.
갑자기 하느님 생각에 목이 탑니다.
메마른 영혼의 갈증으로...
언제쯤 그 고통 속에서조차 하느님을 부르던 선조들의 신앙을 닮을 수 있을까요?
그곳을 거닐며 문득 노란 은행잎 흩어진 대전가톨릭 대학교 교정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양평에 다녀온 얼마 후 저는 그곳에도 갔습니다.
근처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요셉의 집에 멋진 신부님 한 분이 계시죠...
만나뵐 일도 있긴 했지만 ....
신부님의 존재란 그분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납니다.
함께 있으면 그저 영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
아마 그분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특전이 있는지 아마 알긴 하지만 실감하지 못하고 계실걸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제가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니까요...
하느님과 저를 손잡게 하는....
대전 신학교교정 산마루에 있는 선종한 사제들을 위한 성직자묘지입니다.
신부님은 그곳을 안내해 주시며 한 분 한 분의 일화를 설명해주셨는데...
저마다 사연없는 분들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수학해서 그곳에서 철들고 서품후
세상 구원을 위한 주교님의 도우미역을 마치고 그분의 품으로 떠날 땐
고향같은 신학교 교정에 다시 돌아와 묻힌다는데...
해질녘의 서늘함 때문인가 그곳에서 주모송을 드리니
문득 가을인양 가슴이 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