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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5060 원문보기 글쓴이: 칠복이
2022년 11월 15일 (화) 촬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22년 10월 25일부터 2023년 3 월 1일까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을 전시합니다.입장료 일반 2만원.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10세기 스위스 북부 지역의 백작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3년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동쪽 영역'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을 잇는 후예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력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더 멀리' 라는 좌우명을 가진 가문답게 합스브르크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후 점점 세력을 넓힙니다.
마침내 16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룹니다.
막시밀리안 1세 / 베른하르트 슈트리겔(1460~1528) 원작을 모사, 1508년 이전, 나무에 유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강력한 제후 세력과 맞서야 했고 실질적인 통치력은 약했다.
1508년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는 군주의 권위와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황제의 홀을 왼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쥐고 "명예의 천"이라 부르는 화려한 붉은 색
천을 배경으로 서 있다.이러한 양식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켄타우로스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 / 안토니오 수시니(1558~1624), 1600년경, 청동.
에우리티온은 올레노스의 왕 덱사메노스의 딸과 결혼하고자 왕을 위협하지만 헤라클레스와 결투를 벌여 결국 죽는다.
조각은 헤라클레스가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수시니가 그의 스승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조각가 잠볼로냐(1529~1608)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눈에 눈동자와 홍채를 새긴 것은 수시니 작품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뒷모습.
헤라클레스 / 16세기 후반, 대리석.
고대 영웅 헤라클레스는 그의 상징인 사자 가죽이 걸린 기둥에 기대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
오른손을 무심히 등 뒤에 대고 마치 영웅으로 보낸 지난날을 회상하듯 생각에 잠겨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헤라클레스를 근육질로 표현한 고대 그리스 조각과 달리, 날씬한 골격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카를 5세(1500~1558)는 영웅으로서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모습으로 즐겨 사용했다고 하여, 조각상의 얼굴이
황제를 연상시킨다는 주장도 있다.
뒷모습.
마티아스 /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1535년경~1597), 1583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티아스(1557~1619)가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그의 궁정 화가였던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가 그린 것이다.
그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동생이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마티아스는 헝가리 신교 진영 세력을 규합해
160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611년에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고 결국 1612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오히려 신교 진영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 30년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갑옷은 패션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습니다. 전투 때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갑옷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행사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한 마상 시합이었습니다.
마상 시합의 형식에 따라 특화된 갑옷이 필요해 주로 부품을 조립식으로 제작했습니다.
부품 수가 많을수록 비싸고 기능이 다양한 갑옷으로 여겨졌습니다.단순히 전투를 위한 목적만이 아닌 시대의
패션으로서 유행에 따라 갑옷의 형태도 달라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수집품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 / 로렌츠 헬름슈미트(1450~1515), 1492년경, 강철, 황동에 도금, 가죽.
1508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1490년대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를
지배하게 된 것을 기념하며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전하는 갑옷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갑옷
제작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무릎 보호대 양쪽에는 돋을 새김이 장식되어 있다. 로렌츠 헬름슈미트는
막시밀리안 1세의 황실 갑옷 장인이었는데 로렌츠 가문은 16세기 중반까지 합스부르크 황제들을 위해 갑옷을 제작했다.
사브르 / 1560년경, 코듀로이, 직물, 철, 금, 은, 아말감, 도금, 나무.
사브르란 날이 휘어진 긴 칼이다. 전투용이 아니라 축제 행렬에서 의장용으로 착용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칼은 르네상스 초기에 나타난 것이지만, 16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고대의 무기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이 사브르는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의 아들이자
루돌프 2세(1552~1612)와 마티아스(1557~1619)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1527~1576)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루돌프 2세의 '리본 장식' 갑옷 / 안톤 패팬하우저(1525년경~1603), 1571년경, 연철, 금, 황동, 직물, 가죽.
갑옷 전체를 장식하는 금색 리본과 잎 무늬가 인상적이다. 리본 장식을 의미하는 '플레히트반트'라는 갑옷 이름은
이 장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마상 창 시합용 갑옷은 중세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강철 치마가 없는 구조로
제작되어 지상 결투에 적합하도록 했다. 막시밀리안 2세(1527)가 1570년 열린 동생 카를 2세 대공(1540~1590)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1551~1608)의 혼인식 기념 축제에 참여하는 아들 루돌프 2세를 위해
이 갑옷을 주문한 것으로 추측한다. 가슴 부위에 돌출된 것은 창이나 깃발을 거치하는 용도이다.
페르디난트 2세의 대공의 독술리 장식 갑옷 / 외르크 조이 젠호퍼(1528~1580), 1547년, 연철, 아말감, 도금, 황동, 가죽, 천.
현존하는 르네상스식 갑옷 세트 중 가장 큰 것으로, 총 90개의 부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독수리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어 <독수리 갑옷>으로도 불린다.
이 갑옷은 페르디난트 1세(1503~1564)가 아들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을 위해 황실 갑옷 제조공
외로크 조이 젠호퍼에게 주문해 제작된 것이다.
화승총 / 클로드 비주아르(1840~1866), 1857년, 연철, 주철, 아말감, 도금, 금 상감, 은박지, 호두나무, 실크, 은실, 금실.
손잡이를 술 장식이 달린 빨간색과 금색의 실크 끈으로 감았다. 총신은 음각, 도금, 물결문양 금상감으로 장식
되어 있다. 이 총은 튀니지왕 시디 모하메드 2세(1855~1899)가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당시 튀니지에 종주권을 행사하는 튀르키에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튀니지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오스트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금 장식 바구니 / 16세기 후반, 금.
작은 크기의 바구니는 꽃과 잎 무늬의 가는 금줄과 작은 금 알갱이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금 세공으로 섬세하게 작업한 이와 같은 금세공 작품은 장식용으로 수집되어 17세기 유럽에서 수요가 많았다.
루돌프 2세 황제는 이 작품을 가장 특별한 예술품만을 모은 소장품집에 포함시켰다.
17세기 당시 이러한 예술품은 대부분 인도 서부의 고아를 중심으로 생산되어 리스본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졌고,루돌프 2세의 소장품집에도 인도의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루돌프 2세 / 마르티노 로타(1520년경~1583), 캔버스에 유화.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던 마르티노 로타가 황제 즉위를 기념해 제작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루돌프 2세는 합스브르크 군주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루돌프 2세 치세에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또 13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튀르크 전쟁에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무능한 황제라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 박물관 공예관의 모태가
될 정도로 그의 예술가적 감식안은 높게 평가된다.
루돌프 2세와 "예술의 방"
루돌프 2세는 예술에 탁월한 안목을 가진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스페인 왕궁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예술을 탐독하며 성장했습니다.1576년 황제가 된 후 수도를 프라하로 이전하여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을 불러들였고,
프라하를 보헤미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그는 폭넓고 깊은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회화부터 진기한
공예품, 학문적 성과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해 "예술의 방"에 전시했습니다.
루돌프 2세의 수집품은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로서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연수정 꽃병 / 디오니시오 미세로니 (1607추정~1661), 1652년, 연수정, 은, 도금.
하나의 큰 연수정 덩어리로 병의 몸통을 만들고 여기에 나뭇잎 무늬 입구와 손잡이, 받침대 금속장식을 붙여
완성했다. 몸통에는 소용돌이와 괴수 얼굴을 닮은 무늬가 교차하고 옆면의 손잡이 가장자리 부분에는
과일 바구니 무늬가 있다. 빛의 굴절과 반사, 투명도를 이용해 연수정의 특성을 살려 제작됐다.
루돌프 2세(1552~1612)의 황실 석공 디오니시오 미세로니의 후기 작업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그는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의 아들로서 가업을 이어 프라하 궁정에서 일했다.
조가비 모양 그릇 / 17세기 전반, 산호석회암, 은, 도금.
산호석회암은 16세기 과학에 관심이 있는 인문학자와 귀족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수집품 중 하나였다.
이 그릇을 제작한 석공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용하던 산호석회암을 선택해서 마치 자연스럽게 주름이 진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했다. 석회암의 생김새에서 "별 무늬 돌(star stone)"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루돌프 2세(552~1612)도 이 "별 무늬 돌"을 7점 소장했다고 한다.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 조반니 암브로조 미세로니 추정(1551년경~1616) 1600 -10년, 옥수.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인 옥수(玉髓) 한 덩어리를 인체 표현과 움직임을 정교하게 살려 만든 조각상이다.
두 인물에 맞게 재료의 자연적인 색채를 그대로 살린 조각가의 방식도 놀랐만하다. 조반니 암브로조는 1600년부터
밀라노에 미세로니 가문 공방을 이끌었던 인물로, 당시 재료의 질감을 잘 살려 실력이 뛰어난 석공으로 평가받았다.
마노 그릇 /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 1615~24년, 이끼 마노, 은, 도금.
그릇 바깥 면을 두르는 소용돌이 띠무늬와 정교하고 얇게 깍은 가장자리는 오타비오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 그릇의 금속 장식은 'HC'라는 머리글자를 쓴 제작자가 한 것으로 작품의 받침대에 서명이 남아 있다.
이 제작자의 특징은 그릇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도금 은제 장식에 투각 장식이 된 긴 암술대 모양의 장식을
더하는 것이다. 밀라노 출신 석공 오타비오 미세로니는 루돌프 황제의 요청을 받아 프라하에 공방을 차려 작업했고,
프라하가 유럽 석조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에 일조했다.
조가비 모양 그릇 /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 1610~22년경, 연옥, 은, 도금.
조가비 모양의 그릇을 장식하는 아칸서스 나뭇잎과 소용돌이 띠는 미세로니 가문의 공방에서 즐겨 사용했던
무늬 양식이다. 오타비오는 깍기 어려운 단단한 연옥을 사용했지만 마치 점토를 반죽한 것처럼 부드러운 형태의
그릇을 만들어 냈다. 그릇 위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가 있는데, 은에 도금한 이 금속상은 오타비오가
사망한 후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한다. 루돌프 2세(1552~1612)가 서거한 후 이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미세로니의 공방에 남겨졌다가 빈으로 옮겨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 조반니 카스트루치 추정(1598~1615년 추정), 17세기 전반, 마노, 벽옥.
멀리 산맥이 있고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탑이 있는 성과 다리가 보인다. 보석류 석판을 형태에 맞게 깍아서
조립한 "보석 모자이크"라고 부른다. 조반니 카스트루치는 1610년 루돌프 2세 황제의 황실 석공이었다.
아버지 코지모 카스트루치는 피렌체 출신 장인으로
프라하로 이주해 "보석 모자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설립했다.
십자가 모양 해시계 / 1619년, 구리 합금에 도금.
해시계는 근대 초기까지 시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기계식 시계처럼 오작동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이 해시계는 여러 방법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다면 십자가 구조로 제작되었다. 해시계에 집약된
다양한 방법의 시간 측정법은 제작자의 수학, 기하학,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루돌프 2세 황제가 선호한 예술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있는 접시 / 16세기 전반, 은에 금도금.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유행했던 형식의 접시로, 세 개의 동심원 안을 부조로 꾸몄다.
가장 바깥쪽에는 아시리아에게 포위당한 유대 도시 베툴리아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이 깊으며
남편을 잃은 여인 유디트는 자신의 고향을 지키려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목을 잘라 도시를 구한다.
가장 안쪽 원에는 재판 받는 벌거벗은 남자, 광야, 세례와 천사, 옷을 받는 수도승이 묘사되어 있는데
어떤 이야기인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주피터와 칼리스토 / 요제프 하인츠 1세(1564~1609), 1603년 이후, 동판에 유화.
주피터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로 변장하여, 다이아나를 따르며 순결서약을 한 님프 칼리스토를 속이고 있다.
주피터의 등 뒤로 보이는 분홍색 천은그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흔적이다.
주피터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칼리스토는 주피터의 포옹을 거부하고 있다.
요제프 하인츠 1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다.
길어진 신체 비례는 일반적인 매너리즘 화풍의 특징이다.
머큐리의 경고를 받는 비너스와 마스 / 바르톨로 메우스 스프랑거(1546~1611), 1586~87년경, 캔버스에 유화.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주로 남편인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가 아닌 다른 남성과 함께 그려지곤 한다. 이 그림에서는
전쟁의 신 마스와 등장한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쓴 머큐리는 훈계하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간통하지 말라는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루돌프 2세의 궁정화가이다.
매너리즘의 특징인 길어진 신체 비례와 모호한 자세 등이 나타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전쟁 선포 / 한스 폰 아헨(1552~1615), 1603~04년경, 종이 또는 양피지에 유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경으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는
언월도를 들고 있다. 반대편에는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신이 헝거리 전통 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차고 있다.
뒤에는 사자 가죽을 두르고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서 있다. 이 작품은 루돌프 2세 황제(1552~1612) 재위기에
있었던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벌목꾼이 있는 산 풍경 / 룰란트 사베리(1576~1639), 1606~07년, 동판에 유화.
나무가 자라는 바위와 벌목꾼 등 사실적으로 묘사한 요소들을 조합하여 연출했다.
룰란트 사베리는 얀 브뤼헐 1세(1568~1625)와 동시대 화가로 풍경화, 꽃, 정물화에 뛰어났다.
그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로 일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티롤 지역의 자연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화가의 시선으로 세밀한 부분을 예리하게 포착한 산 풍경은 그가 티롤을 여행하며 받은 인상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 / 16세기 후반, 캔버스에 유화.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든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목에 건 대공을 둘러싼 화환은 티롤 통치권자의 권위를 강조한다. 대공은 종교 대립이 심했던 티롤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그 결과 다양한 종파가 자리 잡고 예술이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티롤에 유입됐고
이는 그의 수집품에 반영되어 암브라스 성에 남았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 프란스 라위크스(1604~1668), 1648년경, 캔버스에 유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프랑스식 옷차림을 한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1628~1662)의 모습은 그가 패션에 민감하고
허영심이 많았음을 드러낸다.의복을 장식하는 리본과 나비모양 매듭은, "갈랑"이라 불리던 프랑스 패션의 요소로,
17세기 중엽 유럽에서 유행했다. 작품을 그린 프란스 라위크스는 루벤스(1557~1640)에게 훈련을 받은 후
티롤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야자열매 잔 /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전반, 야자열매, 은, 도금.
17세기로의 전환기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항해사들과 상인들은 외국에서 온갖 이국적인 물건들을 들려왔다.
낮선 물건에 값비싼 부속을 장식해서 만든 공예품들은 유럽의 예술 애호가 들과 수집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럽인은 야자열매를 해독제와 치료제로 여겼기 때문에 야자열매를 잔으로 변형시킨 작품이 드물지 않게
제작 됐다. 뚜껑에는 "란츠크네히트"라고 부르는 16세기 용병 복장을 한 작은 인물상이 있다.
야자 열매 주전자 / 16세기 후반, 야자열매, 은, 도금.
16세기 유럽에 야자열매는 바다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라고 알려지면서 낮설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여겨졌다.
인도로 떠난 유럽인들은 항해 도중 야자열매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전자를 장식한 물고기 모양
물의 정령은 야자열매가 바다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또 야자열매가 해독 성분을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다.
성,聖 히에로니무스 / 페루지노(피에트로 바누치, 1446~1523), 1502년경, 패널에 유화.
성 히에로니무스는 십자가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는 돌로 가슴을 치며 고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에서도 오른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다. 사자는 히에로니무스가 고행을 할 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성인 옆 빨간 추기경 모자는 그가 추기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는 로마,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로,
참회하는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을 이탈리아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우물가의 리브가와 엘리에셀 / 오타비오 바니니(1585~1643년경), 1625~26년경, 캔버스에 유화.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으 고르기 위해 시종 엘리에셀을 라반에게 보낸다. 그는 우물가에
멈춰 서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여성이 신이 신부로 정한 사람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작가는 리브리가 낙타에게 먹일 물을 엘리에셀에게 주는 순간을 그렸다.
17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화가 오타비오 바니니는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와 강렬한 색채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성,聖 가족 / 안젤로 솔리메나 (1629~1716), 17세기 중엽, 캔버스에 유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사이의 애정 어린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요셉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배경에는 양과 소, 당나귀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안젤로 솔리메나는 주인공들 사이의 안정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원형 틀 안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카를 5세가 있는 메달 / 1535~40년경, 금, 흑요석, 나무.
카를 5세(1500~1558)가 1535년 튀지니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메달이다. 월계관을 쓴 황제는 고전주의풍의
가슴 갑옷을 입고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다. 황제 주위로는 카를 5세를 아프리카 황제로서 축하한다는 의미의
"CAROLV(S) V IMP AVC AFRICANVS"문구가 새겨져 있다. 메달 제작자는 한 거푸집으로 같은 모양의 메달을
많이 만들어 전쟁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수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스페인 왕 펠레세 4세(1605~1665)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1634~1696)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의 공주를 보고 싶어 하던 페르디난트 3세(1608~1657)를 위해
그린 초상화이다.공주는 훗날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1640~1705)와 결혼하게 된다. 두께와 농도를 달리한
붓질로 소매와 드레스의 질감을 생동감 있고 정교하게 만드는 벨라스케스 특유의 화법이 잘 살아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 / 1580~88년, 캔버스에 유화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나이 든 왕을 축복한다. 왕의 오른편으로는
터번을 쓰고 코트를 입은 무어인 왕이 금 그릇을 손에 들고 아기 예수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성모 뒤에 있는
요셉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세명의 동방박사"는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인기가 많았던 주제로,
동양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 /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 1625~28년경, 패널에 유화.
이탈리아 시인 로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공주가 은둔자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하자, 은둔자는 그녀에게 약을 먹여 접근한다. 루벤스는 운둔자가 잠든 공주에게 다가가는 순간을
포착해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공주 뒤로 보이는 악령의 표정은 관람자의 감정을 대변한다.
이야기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화가의 재치가 엿보인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은 프리기아라는 마을을 방문한다.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유일하게 이 늙은 부부만이
그들을 성심성의껏 대접했다. 화가는 노인이 손님에게 대접한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아 이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을 그렸다.붉은 옷을 입은 머큐리를 마주보는 필레몬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고, 주피터는 손을 들어
단 한 마리 남은 거위마저 잡으려는 바우키스를 저지하고 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공방을 열고 장르별 대표 화가들과 협업했는데,
이 작품의 정물과 동물은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스네이데르스(1579~1657)가 그렸다.
화환 속 남자
꽃다발을 꽃은 파란 꽃병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있는 술잔 / 요한 안드레아스 텔로트(1655~1734), 1679~83년, 은, 부분 은도금,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다이아몬드.
잔에는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장식되어 있다.
잔 몸통에 장식된 세 개의 원형 창에는 다프네에게 구애하는 아폴로, 다프네를 따라가는 아폴로, 그리고 월계수로
변신하는 다프네가 묘사되어 있다. 뚜껑에는 아폴로가 짝사랑하기전에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즉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피톤을 격파하는 아폴로, 큐피트를 놀리는 아폴로, 아폴로에게 황금 화살을 쏘는 큐피드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1778년, 캔버스에 유화.
마리 앙투아네트로 잘 알려진 마리아 안토니이는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왕비는 실크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1723~1786년경), 1773년, 캔버스에 유화.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1742~1798)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1738~1822)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가운데 테이블을 확대한 사진.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 마르테 판 메이텐스 2세(1695~1770), 1745~50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5)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한다.세 군주국의 위엄은 탁자 위에 올려둔 왕관으로 드러난다.
헝거리의 성 슈테판 왕관,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차례로 놓여 있다.
여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엘리자베트 (시시) 황후 / 요제프 호라체크(1830~1885), 1858년, 캔버스에 유화.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이다.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푸른빛 드레스가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
엄격한 황실은 감옥과 같았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
여행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스테파니 황태자비 / 한스 마카르트(1840~1884), 1881년, 캔버스에 유화.
스테파니는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1858~1889)와 17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꽃으로 장식한 우아한 새틴 드레스를 입은 황태자비의 초상화는 약혼을 기념하여 그린
선물이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내연녀 메리 베체라(1871~1889)와 동반 자살한 뒤, 스테파니는 재혼해서 헝거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 했다.
스테파니 황태자비 / 한스 마카르트(1840~1884), 1881년,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요제프 1세 / 미하이 문카치(1844~1900),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후,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했다.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빈미술사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나폴레옹 1세 / 안드레아 아피아니(1754~1817), 1805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나폴레옹은 녹색 테두리의 오렌지색 현장(懸章)을 두르고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북부 이탈리아 치살피나 공화국의 지방총독이었고, 1805년 자신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승급
시켰다. 이 작품은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아 아피아니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1805년 나폴레옹의 제1 궁정 화가가 되었다.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 / 요한 조파니(1733~1810), 1775년,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대공(1768~1835)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주문해서 그린 초상화이다.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고 있다. 책이 쌓인 탁자에 손을 올린 자세는 그가 후계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대공 뒤 의자에 놓인 삼각모와 흉갑은 기사도적 용기와 고결함을 상징한다.
아침 식사 / 코로 넬리스 데 헤엠(161~1695), 1660~69년, 패널에 유화.
레몬, 포도, 자두 등 하루 중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가벼운 음식을 묘사한 그림이다.
테이블 밖으로 뛰어나온 칼과 껍질을 벗긴 레몬은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주로 쓰이던 소재였다.
리본과 자두의 짙은 파란색을 쓴 대담한 색채 구성과 작은 크기의 작품으로 그린 것은 코르넬리스 데헤엠 특유의
특징이다. 세련된 색 변화와 사실적인 빛 효과는 화가의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사냥 도구 / 요하네스 레이만스 (1633~1688) 계열, 1660년 경, 캔버스에 유화.
그림은 새 사냥과 연관된 도구가 벽에 실제로 걸린 것처럼 묘사했다. 화면 하단에 길게 놓인 총이 있고, 작은 새장과 모자,
미끼를 넣는 주머니, 호루라기 등이 보인다.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린 "트롱프뢰유" 즉 눈속임 기법의 그림은
17세기 중엽 정물화의 하위 장르로 발전했다. 눈속임 정물화는 작품이 걸릴 장소의 빛의 방향까지 고려해 주문
되었을 정도로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주된 특징으로 했다.
얀 케이트(1611~1661), 1647년 추정, 캔버스에 유화.
나무 아래 죽은 새와 사냥개 한 마리가 있다. 왼편 숲 너머로 대성당의 높은 탑과 더불어 화가의 고향인
안트베르펜 도시가 배경으로 그려졌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야생동물 그림은 정물화에서 특히 중요했던 장르로,
부유한 계급이 집안을 장식할 목적으로 주문해 수요가 높았다.
얀 페이트는 이 분야에서 가장 이름을 알렸던 프란스 스네이데르스(1579~1657)의 제자였다.
범과 독수리 / 필리프 페르디난트 데 해밀턴(1667년경~1750), 1722년, 캔버스에 유화.
대머리 독수리가 표범이 갓 잡은 흰 닭을 낚아채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 표범은 고개를 뒤로 돌려 대머리 독수리를
노려본다. 목가적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진 극적인 대립 구도는 관람자가 다음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화가는 카를 6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고 황실 기록에 남아 있다.
화가는 작품에 '신설로마제국 황제의 궁정 화가'라는 뜻의 "S, C, M, C, P"라는 머리글자를 남겼다.
성.聖 세바스티안 / 알브레히트 폰 호른(1581년경~1665), 1634~35년경, 은, 도금, 나무.
고대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인 성 세바스티안은 기독교 신자들을 몰래 도왔다. 이를 알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311)는 사형 선고를 내리지만 그는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결국 두 번째 선고에서 세바스티안은
순교한다.작품은 세바스티안이 첫 번째 사형 선고로 나무에 묶여 화살을 맞는 장면을 묘사했다.
비록 몸에는 화살이 꽂혔지만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전염병을 막는 수호성인의 상징이 되었다.
기름 부음을 받는 솔로몬 / 코르넬리스 데 포스(1584~1651), 1630년경, 캔버스에 유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그렸다.기름 부음은 왕위 계승 의식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화려한 대야 위로 몸을 숙이고 그 뒤로 어린 시종 두 명이
왕실의 상징인 홀(笏)과 왕관을 놓은 베개를 들고 서 있다. 뒤로 보이는 나선형 기둥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솔로몬 기둥을 연상시키며, 기름 부음의 주인공이 솔로몬임을 나타낸다.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 / 얀 스테인(1626~1679), 1670년경, 캔버스에 유화.
한 여관에서 열린 왁자지껄한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다. 나이 많은 신랑은 지푸라기 몇 가닥만 꽂은 모자를 쓰고
있다.볼록한 신부의 배에 손을 올린 아이가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어 신랑이 바람 난 신부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다.
플랑드르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풍속화가 그려졌는데 얀 스테인은 대표적인 풍속화가였다.
이 그림은 부부의 정절을 지키고 간통을 삼가라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 얀 브뤼헐 1세(1568~1625), 1595년경, 동판에 유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혜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도중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 천사는
그들의 여정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16세기 숲 풍경화는 주로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의 배경으로
그려졌다. 숲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 가족이 쉬어가는 장면은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이 작품에서 얀 브뤼헐 1세는 풍경을, 한스 로덴함머(1564~1625)는 인물을 그렸다.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 얀 브뤼헐 2세(1601~1678), 1626년 이후, 패널에 유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수풀과 꽃은 , 꽃 정물에 뛰어났던 얀 브뤼헐 2세의 화법을 보여준다.
유명한 블랑드르의 화가 가문의 전통을 잇는 얀 브뤼헐 2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때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궁정 화가였던 다비드 테니르스 2세의 소개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작품 의뢰를 받으며
부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꽃다발 / 안 판 덴 헤케(1620~1684), 1650년경, 캔버스에 유화.
노란 오스트리아 들장미를 중심으로 청백색 나팔꽃은 화면 왼쪽에서 색감을 뽑낸다. 하얀 백합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옆으로 주홍빛 깍지콩꽃은 꽃다발의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불꽃무늬
튤립이 꽃다발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춘다. 화가는 얀 브뤼헐 1세(1564~1625)가 유행시킨 꽃다발 정물을
변형하여 풍성함은 적지만 세련되어 보이도록 구성했다.
꽃다발 / 안 판 덴 헤케(1620~1684), 1652년경, 캔버스에 유화.
창문 앞 난간에 놓인 유리병에는 튤립, 카네이션, 수선화, 팬지, 재스민으로 가득하다. 오른쪽 벽은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어 왼편의 도시 너머 광야로 관람객의 시선이 향하게 한다. 꽃병 뒤로 보이는 도시 그레벨링켄 성벽으로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튤립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 아름다운 허상을 의미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공격받는
도시가 아닌 화려한 꽃다발에 머물게 하고 있다.
산 풍경 / 요스 데 몸퍼르 2세(1564~1635), 1620년대, 캔버스에 유화.
화가는 전경, 중경, 원경을 구분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그림의 아래에서 시작해 가운데의 회색 봉우리를 지나
먼 곳에 있는 계곡으로 향하게 한다.
안트베르켄 출신의 요스 데 몸퍼르 2세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화가로 풍경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이 작품은 스위스의 생고타르 고개를 묘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화가가 1580년대 스위스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 연작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담은 10점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을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판 앨스트가 태피스트리를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미터였고 모두 합친 총 길이가 42미터일 정도로 장대했습니다.
그중 7점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설치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받았습니다.
교황은 판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베드로의 삶 5점.
사도 바울의 삶 5점.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 연작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담은 10점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을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판 앨스트가 태피스트리를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미터였고 모두 합친 총 길이가 42미터일 정도로 장대했습니다.
그중 7점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설치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받았습니다.
교황은 판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이 작품은 사도 바울이 설교를 위해 아테네에 머물렀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법 평의회 종
광장에서 양팔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에는 불멸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513년 영혼불멸에
관한 칙령을 내린 교황 레오 10세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의 하나로 프란츠 2세가 1804년 나폴리 왕비로부터 매입하여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기적의 물고기 잡이.
이 작품은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베드로, 안드래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안드래는 팔을 저으며 풍성한 수확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적을 체험한 후 어부들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된다. 이 기적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베드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기적의 물고기 잡이>와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투구와 갑옷 / 조선, 1890~94년경.
1892년 조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과 수교하면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은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에게 선물로 조선의 투구와 갑옷을 보냈다.
네 조각으로 구성된 투구의 앞면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뒷면에는 봉황 무늬가 있으며 양옆과 뒤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가리개를 달았다.갑옷은 상체뿐 아니라 허벅지까지 감쌀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이 직접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투구와 갑옷이다.
중세로부터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왕가는 어디일까요?
합스부르크는 127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루돌프 1세를 시작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진출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뒤 황제에서 물러난 카를 1세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간 유럽의 정치, 경제,
예술의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서양 미술을 대표하는 걸출한 예술가들의 후원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스,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가문의 후원은 합스부르크
사람들이 가진 예술 사랑과 예술품 수집에 담은 남다른 철학 덕분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합스부르크가 수집하여 빈미술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걸작 96점을 소개합니다.
특히 1892년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준 선물도 130여년 만에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19세기 말 조선과 오스트리아가 나눈 마음의 증표입니다. 600년의 매혹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더 가까이, 오스트리아에 전한 조선의 마음.
합스부르크 왕가의 600년 역사 속에 조선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2년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 상인들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교를 맺었습니다. 수교 선물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낸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1894년 합스부르크 의 수집품으로 등록되었고, 1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조선이 주고 받았던 마음의 증표입니다.
1892년 12월 8일 극동항해를 준비 중인 오스트리아 - 헝가리 보호 순양암 ' 카이세린 엘리자베트'의 사진이다.
이 순양함은 1893년 10월 우호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이 순양함에 실려 오스트리아로 갔고,
1894년 2월 10일 황제의 수집품으로 등록된 것으ㅗ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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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5060 원문보기 글쓴이: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