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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집안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말기 안휘성의 빈농 한족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믐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사대부집안의
멸시와 견제속에서 시달려야했다.
나는 송곳하나
꼿을 땅이 없었던 빈농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때
조차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천하를
회복한 명나라의 초대창업황제가
되었다.
-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
<참고자료>
홍무제(洪武帝) 주원장
명 태조(明太祖,
원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 또는 홍무제(洪武帝)는 명나라의 태조(재위 : 1368년 ~ 1398년)이다.
그의 성은 주(朱)이고, 이름은 원장(元璋)이다. 아명은 중팔(重八), 흥종(興宗), 덕유(德裕)이고 자는 국서(國瑞)이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이다. 절일은 천수성절(天壽聖節)이다.
호주(濠州)의 한족 빈농가문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다. 그 뒤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탁발승으로 지내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1366년 스스로 오왕이라 칭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킨 뒤 1368년 스스로 자립해 황제에 올라 대명을 건국했다.
이후 그는 한족 왕조 회복의 기치를 명분으로 하고, 지방관의 행정, 입법, 군사 권한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중서성을 혁파하고 6부 상서들에게 직접 결제받는 등,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황권 강화를 꾀하였다.
반원, 반몽골과 한족의 국가 재건을 기치로 북벌군을 일으켜 직접 지휘, 1388년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왕조 성립 뒤에는 지역 토호 및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지방관 파견과 제후국 봉지 임명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시켰다.
또한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자급자족 농경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1] 공신들의 대량숙청을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초기 생애
원나라 말기 천력 원년(天歷 元年, 1328년) 호주(濠州) 안후이성 봉양현(鳳陽縣)에서 가난한 농부 주세진과 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후에 주흥종(朱興宗)으로 개명했다가 주덕유(朱德裕)로, 홍건군에 참가하는 무렵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했다. 자는 국서(國瑞)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그 당시 전인구의 20%를 죽인 페스트였다. 이는 흑사병이라고도 불린다.) 부친 주세진이 죽고 이어 맏형과 여러 형제들이 연이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둘째와 셋째 형수, 그리고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 진씨마저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다.
그와 그의 둘째 형 주중육(朱重六)만이 살아남았고,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주 유씨 댁에 찾아갔다가 면박만 당했다. 한 마을에 살던 이웃이 자신의 땅을 제공하여 낡은 옷에다가 시신을 감싸서 겨우 매장했다. 뒤에 황제가 된 뒤 부친을 인조 순황제로 모친을 순황후로 추존하고 황릉비를 쓸 때 이 일을 기억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큰 형수는 조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되돌아갔고, 백부 역시 아들과 손자를 잃고 어렵게 살았으며, 이씨 집으로 출가한 누이와 다른 1명의 누이 역시 사망하여 의존할 데가 없었다. 늦게 두 딸을 두었던 외할아버지는 이미 99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외할아버지에게도 아들이 없어서 그는 혈혈단신 고아가 됐다. 이에 그는 할 수없이 황각사(皇覺寺)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탁발승으로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다.
홍건적의 난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 지변에 전염병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그는 허베이 지방과 그 일대를 떠돌아다녔는데, 당시 이 일대는 원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고, 당시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으로 7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봉기를 촉진시켜 1325년경부터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처지에서 근근히 생존하던 그는 비적(匪賊)의 무리에 가담한다. 평민 출신의 비적이 이끄는 반란군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351년 탁발승으로 있던 그는 홍건적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곽자흥(郭子興)의 휘하에 들어갔다. 곽자흥은 1352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호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주원장은 이 반란군의 일개 병졸로 참가했으나 실력으로 관군을 거듭 패퇴시키면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곽자흥의 참모로 승격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 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주원장은 곽자흥 반란군의 일개 병졸로 참가하여 그 뒤 참모를 거쳐 제2인자가 되었다. 비적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곽자흥은 실력과 지략을 갖췄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주원장의 공적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곽자흥의 경계심은 주원장이 곽자흥의 양녀인 효자고황후 마씨와 결혼함으로써 해소되었다.
1353년 주원장은 안후이 성 저주를 함락시켰다. 뒤이어 병중이던 곽자흥을 대신하여 곽자흥 군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냈는데 사람의 신분과 과거,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선발했다. 그결과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그 뒤 주원장이 명나라를 개국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그는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을 점령하고, 스스로 오국공(吳國公)에 취임했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명에 달했고 1355년 곽자흥이 병으로 죽자 주원장은 곽자흥의 군벌을 흡수, 반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자 그는 난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역시 난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쑤저우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쳐서 세력을 확장시킨다.
군벌 활동
세력 확장
장강으로 진출하면서 주원장은 중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중국 동부의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하자 그는 그들을 사부나 참모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어린시절 배우지 못했던 주원장은 동부 지방의 학자들로부터 한어와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배웠다. 그들로부터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통치의 원칙을 배웠는데, 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계속 반복하여 독서하여 그 내용을 흡수했다. 이는 훗날 군대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행정제도를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356년 주원장은 난징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난징은 양쯔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군량미와 수송물자를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전략적 군사요충지였다. 스스로를 무공(武公)이라 선언한 그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난징 일대에 효과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했고, 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쓸데없는 약탈을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일을 삼갔다.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아직 개간하지 않은 토지를 하사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을 적극 권장, 장려했다. 여러 차례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지는 않고, 한림아를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한림아의 전폭적인 신뢰 하에 그는 반군의 승상 직위에 올랐으나 1366년 한림아를 비밀리에 암살한다.
패권 다툼에서 승리
그는 백련교를 기반으로 세력을 점점 넓혀갔다. 한편으로 그는 멸몽흥한의 기치를 내세워 몽골족에 대항하는 한족의 민족적 지도자로 이미지를 굳혔다. 그러나 주원장에게도 라이벌은 있었는데, 역시 강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우량과 장사성 등의 군벌이었다.
진우량은 스스로를 한왕(漢王)이라 선포하고 후베이성 우창(武昌) 주변에서 활약하며 중국 서부로 뻗어나가고 있었고, 장사성은 스스로를 오왕(吳王)이라 선포하고 동부의 평강(平江:지금의 장쑤성에 있는 쑤저우 지역)에서 활약하며 동방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1363년 소주의 장사성과 난징의 진우량이 계획, 양쪽에서 협공하여 주원장을 죽이고 그의 영지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장시성 북부 포양호(鄱陽湖)에서 진우량의 대규모 중선단(重船團)과 주원장의 소규모 경선단(輕船團) 사이에 교전이 발생한다.
주원장은 장사성 진우량의 연합군을 파양호 전투(鄱陽湖之戰)에서 상대해 3일만에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는 진우량의 대규모 중선단(重船團)과 격파하고 진우량을 죽였으며 그의 선단은 크게 파괴되었다. 1364년 진우량의 근거지인 우창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 후베이성, 후난성을 모두 점령하고 장시 성을 차지했다. 1364년 주원장은 스스로 왕이 되어 무왕(武王)이라 선포했다. 1365년 장사성도 격파했고 1367년 마침내 장사성과 그 잔당까지 모두 죽였다. 난징으로 압송된 장사성은 곧 자결하였고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원나라에 대항했던 한족 해적 방국진(方國珍)도 주원장에게 투항하여 사실상 그는 중국 남부지방을 제패했다.
황제 즉위
명왕과 황제
1366년 스스로 명왕(明王)이라 하고 멸몽흥한이라 하여 반원 한족 독립의 기치를 세웠다. 푸젠성과 타이완 섬을 지켰던 원나라의 관료 진우정(陳友定)을 격파한 뒤 그를 사로잡아 압송시킨 뒤 난징에서 처형했다. 남부지방이 평정되자 주원장은 서달·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북벌을 도모했다.
1367년 송나라 황제 한림아는 저주에 있던 본부에서 몽골족의 위협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과 피신, 신변보호를 받기 위해 난징으로 도망쳤다. 그 여행중 주원장 부하의 호송을 받았으나 양쯔강을 건너던 중에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이는 홍무제(洪武帝)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다.
1367년 장사성이 생포되어 난징으로 압송된 뒤 자결하면서 다른 반란군들은 그에게 귀순, 투항하였다. 옌안 지대에서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원나라에 대항했던 방국진(方國珍) 등이 주원장에게 투항하자 공신으로 삼았지만 실권은 주지 않았다.
1368년에 남경에서 칭제건원하여 황제라 칭한 뒤 명나라를 건국했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정하고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을 세웠다.
홍무제라는 명칭은 일세일원의 원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둥성, 허난성이 명에 항복해왔다. 건국 초 호풍(胡風)을 없애고 당 · 송 전통으로 복귀할 것을 명하였으며,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전통적인 중국 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유생계급을 복권시켰고 성리학을 국시로 반포하게 한다.
몽골족 축출
홍무제는 건국한 직후에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여 1368년 8월 명나라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국함에 따라,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결국 1388년 원정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 왕조를 복원시켰다. 한편 몽골족이 북원의 대도로 후퇴한 뒤에도 번번이 타타르로 자객을 보내 원 순제와 황태자 원 소종을 암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372년 서달을 보내 북원까지 정벌하려 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반격을 받아 명군이 크게 패배했다.
체제 개편과 제도개혁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송대의 성리학적 규범을 규율로 정해 민중들에게 전파하였으며(6유), 행정사무는 직접 처결하여 중앙집권체제와 황권 강화의 확립을 꾀하였다.
명나라를 건국한 직후부터 그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는 한편 학자들을 관리로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들 신진 학자들로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서히 공신 세력을 대체해나갈 기틀을 마련한다.
학자들을 관리로 훈련시키기 위해 홍무제는 1369년 직접 칙령을 내려 각 지방 행정 구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행정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국가의 교육보조금이 지급되었고 이 중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은 과거 제도를 거치지 않고도 중앙의 한림원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한림원에서는 학문 강학 외에 교육정책을 수립했고 각급 학교의 학사행정을 감독했다. 이 칙령을 발표한 결과 각지에 서원과 서당이 세워졌고 중국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학교가 명대에 설립되었다.
한편 행정기관의 일부 개편을 추진하여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고, 육부(六部)를 각각 독립시켜 육부의 상서들에게 직접 결제를 받았으며, 도찰원(都察院)과 군사기관인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신설,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어 군권을 장악했다.
지방과 정복지에도 행정기관인 포정사사(布政使司)와 군사기관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검찰기관인 안찰사사(按察使司)를 새로 설치, 파견하여 행정, 군사, 사법권한을 분리시켜 지방관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켰으며, 이들로부터도 직접 결제를 받아 중앙으로 권한을 집중시켰다.
또한 공신들 대신 24인의 황자(皇子)들과 서자들을 전국의 요지에 제후왕으로 봉하여 분봉(分封)하여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를 설치하여 시골의 범죄와 유랑민 속출을 단속하는 한편,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와 부역의 징수, 징발을 감독하며 정책의 지방 확산, 침투를 꾀하였다. 또한 법률의 편찬에도 힘써 대명률(大明律), 대명령(大明令) 등의 법률과 법령을 제정하였다.
통일 이후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 조사 및 인구 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한편 황후나 환관들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고, 황후의 친족들이 월권행위를 보인다고 봤을 시에는 가차없이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지위가 비천한 농민출신이었기 때문에 행정의 부패가 민중에게 주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리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하였다.
말년에는 한 고조 유방을 능가할 정도로 건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으로 유명했다. 1379년 재력가 심만삼을 낙향시키고 1380년 좌승상 호유용을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1만 5천 명을 죽였으며 이 사건을 확대시켜 결국 일당 3만여 명을 처형했다.
호유용을 처형시킴과 동시에 일반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완전히 폐지하는 한편, 6부의 사무결재권한 역시 직접 전담하여 결국 6부의 상서들은 황제의 자문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384년 봄 자신의 외조카이자 건국 1등 공신인 조국공 이문충을 독살했다. 이문충은 무재와 지략 외에 문재도 출중했으나 외숙부에게 고언을 자주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티무르, 일본과의 관계
1388년 몽골의 세력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에 만주까지 원정하여 만주의 남부지역을 명나라에 편입시키고,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영토에 복속시켰다. 또한 조선, 류큐, 안남, 일본 등 기타 국가에서 사신을 보내 종주권을 확립시켰으며, 이들 국가들은 자국이 명나라에 복속되었다는 표시로 조공 사절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의 요동 정벌을 내심 불쾌해하던 홍무제는 조선인 사신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이성계, 정도전 등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던 홍무제는 직접 원정군을 편성, 2차례에 걸쳐 몽골로 보내 수도인 카라코룸에 도달하게 했다. 그러나 멀리온 탓에 몽골족을 위협하고 바로 회군하는 수준이었다. 명나라의 군대는 중앙아시아에까지도 보내 고비 사막에 있는 하미를 함락시키고 돌궐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칭기즈칸의 후계자를 자처한 티무르가 나타나 몽골 제국의 부활을 천명했다. 그는 티무르를 알아보기 위해 사절을 보냈는데, 명나라의 사절이 토번을 지나 사마르칸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티무르는 토번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고 그 영향력을 인도 북부에까지 확장했다. 주원장의 몽골 공격을 내심 불쾌해하던 티무르는 그가 보낸 명나라의 사절단을 억류시켜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풀어주었다. 주원장은 티무르를 칠 계획을 세웠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일단 중단하고 화친을 청한다.
그의 제의를 티무르가 받아들이면서 티무르제국과 명나라는 사절단을 여러 번 서로 교환했는데 명나라는 티무르의 사절단을 조공사절단으로 여겼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티무르는 명나라 침략을 준비하던 중 1405년에 죽었다.
홍무제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연안까지 나타나서 괴롭히고 약탈하던 왜구를 여러 번 정벌하게 했다. 그러나 왜구들이 계속 출몰하자, 일본 조정에 사신을 보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에 사절단을 3번 보내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으나, 쓰시마섬 등을 근거로 한 왜구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도 다른 대책이 없었기에 왜구를 소탕할 수는 없었고 형식적인 답변만이 돌아왔다.
생애 후반
공신 숙청
1385년에는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장인이기도 한 노장 서달도 석연치 않게 죽었다. 서달은 몸에 종기가 퍼져서 만년에 고생했다. 이에 주원장은 서달에게 거위를 선물했는데, 거위는 종기와 상극이라고 한다.
서달은 자신에게 자결을 강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통곡하며 거위를 달인 물을 마시고 죽어갔다. 그러나 고대하던 대업을 달성한 주원장은 문신들이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공신들을 견제하고 그 자리를 새로이 뽑은 사람들로 대체해 나가면서도 문인 관료들에 대한 경계심은 늦추지 않았다.
1390년 초대 승상 이선장 등이 호유용의 역모에 다시 연루되어 관료들의 탄핵을 받았다. 홍무제는 호유용 사건을 빌미로 삼아 이선장에게 자결을 명한 뒤, 1만 5천 명을 처형했고, 1393년 양국공(凉國公) 남옥도 역시 역모 혐의를 받고 2만 명의 연루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남옥을 처형한 죄목은 원나라가 보낸 여자 간첩을 받아들여 미인계에 호응하여 내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4대 선생이던 유기도 낙향한 뒤 죽었고 송렴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가 학살극을 감행한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황위 계승자는 황태손(건문제)으로 바뀌어야 했다. 황위 계승자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홍무제는 노련하고 정치감각이 뛰어난 공신들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하였다.
결과적으로 숙청 작업은 다시금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건문제의 지지기반을 거의 상실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문제는 대대적인 숙청 후 건문제의 주변에 훌륭한 대신이나 장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한편 군벌 출신 공신들을 서서히 숙청해나가면서 군사문제의 관리에는 문인 출신의 관리가 임명되어 군무를 담당하게하였다
.
주원장 그는 효과적인 행정을 펴려면 학자들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을 장려하고 관리양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학자들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학자들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학자들의 권세와 지위를 박탈하려 노력했다.
동시에 건국 초기의 학자 우대책과는 달리 궁중에서 체벌을 위해 대나무 막대기를 도입하여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이 막대기로 벌을 가했는데, 때로는 태형이 심하여 학자와 관리들이 장을 맞다가 죽기도 했다.
사망
그는 즉위와 동시에 장남 주표를 태자로 삼았으나 주표는 1392년에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장남의 사망으로 어린 황태손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괴롭혔고, 자신의 아들들의 야심과 나약한 황태손을 염려하여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들이 상례를 치르기 위하여 남경으로 오지 말고 각자의 영지를 지키라는 유서까지 남겼다.
장례라는 구실로 아직 어린 주윤문의 숙부들이 남경에 몰려오면 혹시라도 무슨 변란이 생길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이런 행동들은 공신들과 관료들에 대한 의심을 부추겼고, 주원장은 만년을 고독하게 보냈다. 이어 둘째 아들 진왕도 곧 병사하였다.
1398년에 홍무제가 10월 21일에 사망하니 묘호는 태조, 사후 성신문무흠명계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聖神文武欽明啓運俊德成功統天大孝高皇帝)로 추존되었고, 가정제 때인 1538년에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로 재추존되었다
. 손자인 의문태자의 장남 주윤문(朱允炆, 건문제)이 즉위한다. 그러나 손자 주윤문의 자리를 노렸던 것은 제후나 공신이 아니라 그의 26명이나 되는 후궁 소생 아들들이었다.
체제 정비
주원장은 지방관의 인사임명을 직접 담당하여 중앙의 지방통제권을 강화했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과 승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황제가 직접 관장하고 결제받게했으며,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등을 설치하여 황제가 이들 기관을 감독, 규찰했다.
지방 관제도 병권과 행정, 감찰권을 분할하여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각각 독립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군사, 행정, 사법의 절대권한을 장악했다.
지방관 외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제후국왕으로 분봉(分封)하여 변방의 반발을 최소화했다.[4]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세율을 조정케 했다.
주원장은 황족에 대한 율령도 직접 작성했다. 율령에 따르면 황제의 장남은 황태자, 황태자의 장남은 황태손으로 하고 황제의 아들과 황태자의 아들은 친왕에 봉하고, 친왕의 직위는 장남이 세습하고, 친왕의 다른 아들들은 군왕(郡王)으로 봉한다. 황제와 황태자의 딸은 공주, 친왕의 딸은 군주(郡主), 군왕의 딸은 현주(縣主)로 임명하고, 황제와 태자의 사위는 부마, 친왕과 군왕의 사위는 의빈으로 하라고 직접 지시하였다. 군왕직은 장남이 세습하고 군왕의 차남 이하는 진국장군(鎭國將軍), 군왕의 손자는 보국장군(輔國將軍), 군왕의 증손은 봉국장군(奉國將軍)으로 임명한다.
황족은 절대로 명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했는데, 지역 번국의 국왕이나 절도사로 파견되었던 친왕과는 달리 영토나 부임지가 없었던 군왕 이하의 먼 황족들은 생계에 지장을 초래했고 이들 중 일부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관료를 능멸하기도 했다. 군왕의 4세손 이하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아 이는 뒤에 문제가 되었다.
외교
그는 조선의 재상 정도전을 몹시 경계하였는데,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계획, 이를 목적으로 사병 혁파를 단행하고 조선국의 국가 군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점은 주원장이 정도전을 끝까지 경계한 이유가 되었다.
기타
그는 학자들이란 황제를 위해 일하는 국가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건국 초기의 학자 우대정책과 달리 학자들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자 그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많은 문인, 학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공신 숙청
공신들의 존재를 두려워한 그는 즉위 직후부터 공신 숙청에 나섰고, 개국공신 중 일부 무장들은 자발적으로 은퇴하여 시골로 내려갔다. 악몽에 시달린 이후에 공신들에 대한 의심은 심해졌고, 장남 주표와 차남 주상이 요절하면서 공신들에 대한 의심과 박해는 심해졌다.
손자인 건문제가 그에게 잔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어느 날 그는 장미 나무의 가시를 꺾어서 손자에게 손으로 쥐어 보라고 하였다. 손자 윤문이 장미가지를 들다가 손에서 피가 흐르며 고통을 느끼자, 그는 내가 생전에 이 가시들을 다 제거하여 너에게 주려 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나친 공신 숙청은 훗날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윤문을 도와 줄 세력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 격이 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명나라의 관료, 지식인층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라고 조롱했다.
금기어
그가 재위에 있는 동안 생(生)과 칙(則)은 금기어였다. 그가 소년기에 탁발승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컴플렉스로 남아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자, 적(賊)과 비슷한 칙 등은 금기어로 설정했는데, 간혹 생(生)이라는 자를 써서 상소를 올리는 신하나 홍건적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적(賊)자와 모양이 비슷한 측(則)자를 써서 상소를 올리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
초상화
그의 실제 얼굴은 약간 살이 붙고 덕스러운 얼굴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를 비방하는 이들은 태조를 아래턱이 툭 튀어나오고 못생겼으며 얽은 자국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일부 초상화에서는 그가 다른 황제들 못지 않게 잘생겼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만 가장 부정적인 묘사에 들어맞는 그림 몇 점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화가가 그린 초상화 외에 그의 실물과 가깝게 그린 초상화 3점 이 어느 사찰에 보존되다가 현재까지 중국에 전래되고 있다.
효자고황후
1352년 경에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곽자흥이 그를 사위로 받아들인 배경에는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음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곽자흥의 사위가 된 뒤에는 곽자흥이 그의 능력을 꼬투리잡아 광에 가둔 일이 있다. 이때 부인 마씨는 광의 구멍을 파고 그에게 먹을 것을 들여주기도 했다. 또한 양아버지 곽자흥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양모 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한다.
황후가 된 뒤에도 검소했다 하며 주원장의 유일한 친조카가 민가에 피해를 입혀서, 사건에 연루된 관료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고 조카 역시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유일한 친혈육임을 들어 구명하기도 했다. 나중에 효자고황후가 죽은 뒤에도 주원장은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후계자 문제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재능을 알아본 홍무제는 장남 주표의 사후 연왕 주체를 황태자로 올리려 하였으나, 유학자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홍무제는 이를 심히 애통해했다고 한다.
고려인 관련 논란
홍무제가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그 근거는 한국에서 전해지는 홍무제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1894년 발행된 「조선기문」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고 다른 몇몇 책에도 실려 있다.
설화에 따르면, 홍무제는 고려 말 경상도 웅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이에 홍무제의 고려인설을 부인하며 그 근거로 「주원장전」을 들었다. 「주원장전」은 1945년 발행된 홍무제의 전기인데, 이 전기문에는 홍무제가 지금의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부친의 이름은 주우시이고, 모친의 이름은 천 엘밍이라고 나와 있다.
이 전기문을 근거로 든 중국 학자들은 홍무제는 틀림없는 정통 한족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홍무제의 고려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 학자들의 반론에 대한 반박을 제기했다. 「주원장전」의 내용과 「조선기문」의 내용이 흡사하고, 「조선기문」이 51년 먼저 발행되었기 때문에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의 내용을 참고해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홍무제의 고려인설 지지학자들은 영락제의 모친이 고려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영락제의 모친과 영락제 모두 고려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애제자(愛弟子)를 공신(功臣)과 황실 외척에 올린 인간 관계
서달과 목영이 원나라 토벌 장군 시절의 주원장 그를 사부(師父)이자 주군(主君)으로 섬기었으며 훗날 홍무제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서달과 목영은 명나라의 공신 작위에 올랐고 특히 서달은 홍무제 자 영락제의 장인(丈人)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 외척 반열에까지 올랐다.
중국 부자의 상징인 심만삼과의 관계
명사에서는 홍무제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할 때, 심만삼의 재력의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심만삼이 개인 출자로 난징(남경, 건업) 성벽을 쌓고 군대를 포상하는 주제넘은 짓을 하여 결국 주원장의 미움을 사서 심만삼은 윈난 성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고 나온다.
[출처]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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