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299 (8권 7. 김홍신. 펌글)
가게로 돌아와서 전화번호부를 뒤져 서울역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역장님 좀 바꿔 주세요."
내 첫마디였다.
"어디시죠?"
고운 여자 목소리였다.
"드릴 말씀이 있는 시민입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가요?"
"역장님께 직접 드릴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먼저 말씀하셔야죠."
"시민이 불편해서 역장님께 직접 신고하라고 방을 붙여 놨더군요. 그러니까 직접 말씀 드려야잖겠습니까?"
"우선 저한테 먼저 말씀하세요."
"그럼 뭐하러 그런 방을 붙여 놨습니까?"
"지금 역장님께서 역내 순시 나가시고 안 계세요."
"이해가 안 됩니다. 순시를 자주 다니시나요?"
"자주 다니세요."
"그렇게 자주 다니시는 분이 대합실에 선풍기 하나 없어서 승객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걸,
그냥 두고 보실 리도 없고 써 붙인 안내문 전화번호가 일 년도 넘은 옛날 번호 그대로일 수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순시를 그리도 잘 하셔서 그 모양입니까? 써 붙이긴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 라고 했더군요."
"도대체 지금 뭣 때문에 전화를 하셨나요?"
목소리가 아주 냉랭해졌다.
나는 이 여자와 얘기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납득이 갈 만하게 역장님이 안 계시면 책임자라도 바꿔 주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사정해도 여직원은 중간책임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버티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여직원 생각에도 이렇게 쓸데없는,
밥먹고 할 짓 없는 사람의 전화질을 상대할 간부직원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도저히 괘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다시 돌려 다른 직원을 바꾸어 달라고 졸랐지만 전화 받은 직원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높은 사람을 바꾸어 주면 도리어 그 직원이 혼나리라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것이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긴 정부에서 세수입을 위해 아직도 인체에 해롭다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
국민 건강을 해치는 상품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전매청이란 직체를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갑시다' 라는 글귀를 작은 글씨로 마치 가능하다면 읽지 말라는 투로 써 붙어놓고,
이 해악한 담배를 정부의 관할하에 판매하고 있다.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엄청나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고 수입을 위해 어떤 폭리를 취해도 상관 없고 국고 수입을 위해 어떤 위해물질을 국민에게 팔아도 된다는 것일까?
기호품이긴 하지만 명백하게 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형식만이라도 정부 직할 직체가 아닌 자유경쟁으로 담배의 질을 높이게 하고,
공정거래가 될 수 있도록 가격도 당연히 인하해야 할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다른 건 다 문제를 삼으면서 전매청의 폭리를 아직까지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었다.
국민의 편이라고 떠벌리는 국회의원들도 그렇게 말재간이 좋으면서 아직 담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하긴 누가 말해도 코방귀를 뀔 수 있는 힘이 국고 수익이라는 명분 아래 시행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이렇게 배짱 좋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국민을 위한답시고 어깨에 힘 주고 사는 공무원을 보신 적 있냐구요?
필리핀이나 얼추 그렇고 그런 나라를 보라 이 말씀입니까?
에끼 여보슈, 여긴 엄연한 민주주의가 숨쉬는 대한민국이란 걸 까먹지 좀 마슈.'
몇 해 전인가 텔레비전에서 담배를 놓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논쟁을 삼은 적이 있었다.
담배가 해롭다는 걸 알면서 자꾸 피우는 문제와 금해야 할 곳에서 피워 대는 못된 습관을 한쪽에서 지적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에게는 조금 육체적으로 해롭더라도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을 수도 있고,
정신집중이나 사람마다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옹호한 쪽의 인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전매청 고위층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받았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 인사는 담배를 정성이라며 가져왔더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렇게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 전매청 당국자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용감하게 '이 담배는 피우면 피울수록 몸에 해로우니 되도록이면 피우지 마십시오' 라고,
담배 포장지 전면에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붙일 용기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 어떤 면에서 인체에 해로운지를 약 포장지처럼 상세하게 써 붙여서,
국민들이 가능하면 담배를 줄이게 해야 할 것이다.
국고 수입을 위해서 국민 건강을 해치기로 말하자면 마약이나 대마초를 정부에서 호된 값으로 팔아야 되고,
수도나 전기요금을 대폭 올려 폭리를 취해도 국민은 대책 없이 당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팔고 사는 일엔 적절한 이윤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물며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는 담배를 그렇게 많이 이윤을 남기고,
그것이 명백하게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사는 세상이어서야 무슨 살 맛이 있을까?
국민에게 해로운 물질을 정부에서 팔아먹은 우스꽝스런 시절도 있었다는 걸,
역사책에 기록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도 책임 있는 발언을 해 줄 사람과 통화할 수가 없었다.
찾아가서 따져 봐야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나는 오기가 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바꾸어야만 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를 그쪽에서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못된 짓인 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책임 있는 사람과 통화할 재간이 없었다.
시민이 신고를 하면 잘못 됐으니 뜯어고치겠다든지 알아보고 조치를 하겠다는 답변만 들어도 할 말이 없을 터인데,
그들은 아예 상대조차 않으려고 했다.
"A일보 민원 기사 담당자입니다."
나는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고분고분해졌다.
"방금 시민의 제보가 들어와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서울역에 써붙인 공고가 옛날 전화번호 그대로라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또 선풍기가 새마을호 대합실에만 있고 통일호 대합실에 없다고 합니다."
직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대꾸했다.
"확인하러 나갈까요? 아니면 역장을 바꿔 주시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만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으니까 아까 어떤 미친 놈이 전화질을 해 대더니 결국 신문사에다가 전화를 해서 피곤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들이 잘못한 것을 지적했는데 미친놈이라고 해 대는 그들의 자세가 영 미덥지 않았다.
책임과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다시 내 소개를 하고 어쩌고 하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것 같아 시치미를 떼고 말을 시작했다.
"시민이 신고해도 안 받고 일 년 전에 사용하던 전화 안내를 그대로 걸어놓는 수가 어디 있습니까?"
내 다그치는 목소리에 과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시민의 신고를 받고 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조금 전에 들으니까 그 시민에게 미친 놈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당한 시민을 미친 놈이라고 해야 옳습니까?"
"아닙니다. 잘못 들으셨을 겁니다."
"잘못 들었다 칩시다. 시민이 진정사항이 있다고 전화를 하면 제대로 바꿔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역장을 바꾸라면 역장을 바꿔주는 게 민원 안내 아닙니까?"
"역장님께서 일일이 민원을 받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럼 민원 안내판에 역장실이라고 쓰지 말았어야죠."
"그거야 형식 아닙니까?"
"형식요?"
"그냥, 서울역의 최고 책임자니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고 칩시다. 도대체 시민이라고 하면 투덜거리고 미친 놈이라고 상대도 않다가,
신문사 전화라니까 이렇게 친절하게 받아 주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야...."
과장은 할 말이 없는지 얼버무리기만 했다.
"내가 신문사가 아니라고 말하면 지금부터 불친절할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일 년도 넘은 전화번호를 아직도 걸어놓고 도대체 무슨 민원을 받았단 말요?
서울역엔 일 년이 넘도록 단 한 건의 민원도 들어오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안 들어올 리 있겠습니까."
"민원 사항을 건의한 사람이 전화번호가 틀렸다는 걸 밝혔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승객들의 안전수송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일에 소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 칩시다. 서울역장이 그렇게 순찰을 자주 한다는데 어째서 여태 그 지경입니까?"
"죄송합니다."
"내 생각 같아선 당신들 그런 태도는 국민을 우습게 아는 태도요. 그래서 책임자들을 데려다가 볼기를 치고 싶소.
아니면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 란 표어를 뜯어내고 '국민을 우롱할 테니 타고 싶으면 타쇼' 라고 써 붙이게 하고 싶소."
"제발 이러지 마시고....당장 시정을 하겠습니다. 민원 안내판을 지금 당장 다시 써 붙이겠습니다.
그리고 선풍기 얘긴데 워낙 대합실이 커서 벽걸이 선풍기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대형 선풍기를 세워 놓으면 위험하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손가락을 집어 넣기나 하면 더 큰일이 아닙니까?"
"듣기로는 외국에서 비싼 기계를 들여다 현대시설을 갖추는 모양인데,
그보다는 우선 승객들이 편리하게 역사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오."
"그렇지요."
"알면서 왜 안 답니까? 그거 직무유기 아니오?"
"여러 가지를 서울 지방철도청에 건의를 했지만 안 들어 주는 걸 우린들 어쩝니까?"
"철도청장하고 그쪽 고위 간부들 모두 서울역 대합실에 무릎 꿇고 앉아서,
땀 뻘뻘 흘려 가며 반성 좀 해야겠군요. 제발 국민 무서운 줄이나 좀 아쇼."
"당장 시정할 테니 제발 기사를 내보내지 말아 주십쇼. 부탁입니다.
확인해 보면 아시겠지만 정말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우릴 믿어 주세요."
"내가 신문사 사람이 아니라도 같은 말을 하시겠소?"
"정당한 건의일 땐 언제나 우리가 명심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도 말 좀 합시다. 난 가엾게도 신문사 기자가 아닌 서울 시내에 살고 있는 보통 시민입니다.
신문사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말이 안 통하니까 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통 시민이든 특별한 사람이든 잘못 된 걸 지적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성 좀 가져 주쇼.
지금 마음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으리란 건 압니다. 또 한편으로 신문사가 아니어서 마음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을 것도 압니다.
시정 좀 하십쇼. 그리고 역장더러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주쇼. 민원 안내판 고치고 시설 점검하자면,
역장이 소리깨나 지를지 모르지만 소리 지르면 정말 그땐 직무유기 행위라고 충고 좀 해 주쇼.
그리고 또 참고로 말씀 드리겠는데 내 전화번호와 주소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드릴 테니,
내 말이 추호도 거짓이거나 공갈을 쳤으면 경찰에 연락해서 잡아 넣어도 좋다고 전해 주십쇼. 준비 됐습니까?"
나는 잠깐 뜸을 들인 뒤에 상세하게 일러 주었다.
그쪽에서 어련히 적어 나가는 것 같았다.
"자, 오랫동안 시달렸을 테니까 좀 쉬시고 우리 봉사 좀 하며 삽시다. 끊어도 됩니까?"
"그러시죠."
힘 없는 목소리였다.
아마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복잡한 세상 살아가는데 그까짓 일을 꼬장꼬장 따지는 사내가 아직도 있다는 게 불쾌할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기 싫으면 고속버스를 타고 그것도 싫으면 자가용을 타고 다닐 일이지,
통일호 타고 다니는 주제에 까탈을 부릴 게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