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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제작 / 국내미개봉 / 112분 / 미성년자관람불가>
감독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출연 : 프랑코 시티, 니네토 다볼리,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등
=== 프로덕션 노트 ===
제21회 베를린국제영화제(1971) 심사위원특별상
페스트가 피렌체를 휩쓸었던 역사적 재난을 배경으로 사회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비유적으로 풍자해 당시의 시대상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선을 경쾌하게 풍자하며 재미있는 음담을 풀어놓는 보카치오의 원작 <데카메론> 중 10가지 이야기를 골라 느슨하게 연결시켰다. 벙어리인 척하면서 수녀원의 모든 수녀들과 관계를 맺는 정원사와, 남편이 있는 집안에 애인을 숨기는 유부녀, 부모를 속이고 처녀성을 잃은 처녀의 이야기 등이 초점없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따라 펼쳐진다.
=== 줄거리 === <위키 백과>
중세 말기 피렌체, 페스트를 피하여 피에솔레 언덕에 모여든 젊은 남녀 10명이, 월요일에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일인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 2주일에 걸쳐 모두 10일 동안 각각 하루에 하나씩 총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영화는 이중에서 아홉 편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태로 필름에 담았다.
(데카 Deca 는 그리스어로 '10'이라는 뜻이다)
1.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의 이야기(두 번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하룻밤 사이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다.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말시장이 서는 나폴리에 말을 사러 갔다. 그는 말을 살 돈이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지갑을 자주 내어 보였다. 그때 한 젊고 아름답고 돈에 약한 시칠리아 여자가 그것을 보고 돈을 탐냈다. 여자는 몰래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를 지켜보았는데, 그가 우연히 예전에 알던 한 할머니를 만나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 그 할머니에게 접근하여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의 배경과 친척들에 대해 알아낸다.
여자는 한 하녀를 보내어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를 만나고 싶다고 전한다. 여자는 아름답게 꾸미고 아름답게 치장한 집을 빌려서 그를 맞는다. 그는 여자가 귀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자신은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객기로 임신시킨 여자가 낳은 배다른 여동생이라고 거짓말로 소개하면서, 자라나서는 시칠리아의 귀족 부인이 되었으나 시칠리아의 정변으로 나폴리로 도주해서 살고 있는 처지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지금껏 백방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녔는데, 이제 오빠를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친척관계에 대해서 확인한다. 그러자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여자를 믿게 된다.
밤이 깊을 때까지 여자의 집에 있던 그는 옷을 벗고 잠자려 하다 화장실을 찾아갔다가,잘못해서 오물을 덮어쓰고 담벼락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는 다시 집을 찾아 들어가려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여자는 없다면서 그를 미친 사람 취급 한다.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헤메게 된다. 그는 헤메던 길에서 도둑떼를 만나고,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도둑떼들에게 사연을 이야기 한다. 그러자, 도둑떼들은 이것은 지갑을 잘 때 몰래 훔치기 위한 사기 수법이라고 알려주면서, 그곳은 말페르투치오(악마의 굴) 거리의 악명 높은 악당의 소굴이라 그대로 있었으면 살해 당했을 것이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해준다.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깜짝 놀란다.
이후 그는 도둑의 협박으로 얼마전에 매장된 대주교의 무덤을 도굴하는 일을 하게 된다. 도둑들은 무덤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으므로,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가 도굴을 하게 되는데, 무거운 석관을 열고 들어가 이런저런 값진 물건을 석관 밖으로 던진다. 다만 마지막 귀한 반지 하나만은 던져 주지 않고, 못찾겠다고 거짓말 한다. 그러자 도둑떼들은 무거운 석관 문을 닫아서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를 가두어 버린 뒤에 도주한다.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관 속에 갇힌 채 두려워 하는데, 얼마후 수도사들의 무리가 몰래 도굴을 하러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기고 머뭇거리자 한 수도사는 "시체는 사람을 잡아 먹지 못한다"고 자신만만해하면서 석관 문을 열게 하고 자기가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자 그틈을 타서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튀어 나온다. 수도사 일당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10만명의 악마가 뒤를 쫓아오는 듯이" 도망치고, 안드레우치오 디 피에트로는 무덤에서 얻은 값진 반지를 들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
2. 마제토의 이야기(세 번째 날 첫 번째 이야기)
마제토는 농부였는데, 수녀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사람이 9명의 젊은 처녀인 수녀들의 비위를 맞춰 주며 일하다 보니 도저히 힘들어 견딜수가 없어서 때려치우고 나왔다고 푸념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제토는 이 말을 듣고, 여자들 사이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쉽사리 수녀들 사이에 채용되기 쉽지 않을 듯 하여, 불쌍한 벙어리로 가장하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으로 수녀들과 가까워 진 뒤에, 마침녀 수녀원의 정원사가 되는데 성공한다.
마제토는 늠름한 청년이었으므로, 어느날 수녀들의 호기심에 남자를 경험해 볼 대상으로 여겨져서 하나 둘 수녀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수녀들은 마제토가 벙어리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데, 결국에는 마제토의 벗은 몸을 우연히 보고 수녀원장까지도 마음이 동하여 마제토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결국 마제토는 혼자서 몰래 열 명의 수녀와 수녀원장을 당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종교적인 기적이 일어나서 벙어리인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가장하여, 수녀원장에게 사태를 말한다. 결국 수녀원장과 수녀들은 서로 협의하여 모든 일이 소문나지 않고 평안하게 해결되도록 조치한다.
3. 페로넬라의 이야기(일곱 번째 날 두 번째 이야기)
페로넬라는 요염한 여자로 어느 미장이의 아내였다. 그런데 페로넬라는 한 젊은이와 바람이 나서 남편이 집을 비울 때마다 젊은이와 밀회를 즐기게 된다. 하루는 남편이 집을 비웠을 때 문을 잠그고 젊은이와 쾌락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돌아왔다. 페로넬라는 당황하는데,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젊은이를 커다란 통 속에 숨도록 한다.
그리고 젊은이가 통 속에서 옷차림을 갖추고 나자, 아내는 남편에게 젊은이는 이 커다란 통을 사러 온 사람이라고 둘러댄다. 젊은이는 맞장구를 치면서 통 안을 좀 긁어 내면 통을 바로 사겠다고 한다. 남편은 통을 팔게 되었으므로 기뻐하며, 통 안에 들어가 통을 긁어 내고, 남편에 통 안에 있을 동안 젊은이와 아내는 다시 쾌락을 즐긴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통 밖으로 나오자, 젊은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돈을 주고, 남편에게 통을 사서 배달까지 시킨다.
4. 차펠레토의 이야기(첫 번째 날 첫 번째이야기)
데카메론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되는 인물. 고리대금업과 각종 위조업을 하는 사리사욕만 탐하는 악인. 그런데 죽을 때가 되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주 제대로 큰 속임수를 한 번 부려보고 죽겠노라고 공언한다. 차펠레토는 이름난 성직자를 불러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낱낱히 고백하는데, 매우 큰 죄를 범했다고 하고는 사실 별 것 아닌 사소한 죄를 말하는 수법으로(예를 들어 신성모독을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너무나도 큰 죄를 지어 부끄럽다고 하면서, 교회 바닥에다가 침을 뱉은 적이 한 번 있다고 답하는 식), 자신의 도덕 기준이 아주 높고 성격이 매우 결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덕분에 차펠레토가 결백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성직자는 크게 감동을 하고,죽은 후에는 성자로 널리 소문이 나면서 더욱더 그 인성이 거룩하다고 과장된다.
결국 이후에, 인근 사람들 사이에 역설적이게도 실제로는 악인이었던 차펠레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와 축복을 하는 풍습까지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
5. 리차르도 마나르디의 이야기(다섯 번째 날 네 번째 이야기)
리차르도 마나르디는 로마냐에 사는 한 명문가의 집안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러다 그 집안의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런데 그 집안 사람들은 엄하게 딸을 키웠으므로, 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리차르도 마나르디는 딸에게 창문 바깥 발코니 턱에서 밤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자기가 찾아가 보겠다고 한다.
딸은 더워서 도저히 자기 어렵다고 하면서, 자기와 같은 처녀의 뜨거운 몸은 더위를 견디기 어려우며, 밤꾀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발코니 턱에 나가서 시원하게 자겠다고 한다. 부모는 이상하게 여기지만, 결국 이를 허락한다. 마침내 밤이 되자 벽을 타고 기어올라온 리차르도 마나르디는 딸을 만났고, 딸과 두 사람은 밤새 격렬하게 사랑을 표현한다.
두 사람은 지쳐서 아침이 밝아 올 무렵에는 곤히 자고 있었는데, 딸은 알몸이 되어 리차르도 마나르디의 몸 한 곳을 붙잡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 딸의 어머니는 놀라서, "밤꾀꼬리가 어떻게 딸을 재웠는지 보라"면서 아버지에게 말한다. 결국 모든 일이 들통나자,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라고 하도록 한다. 안심한 딸과 리차르도 마나르디는 밤새 여섯번 하고 그쳤던 일을, 그 자리에서 두 번 더 하게 된다.
6. 이자베타의 이야기(아홉 번째 날 두 번째 이야기)
이자베타는 수녀로 우연히 한 청년과 눈이 맞아 밤마다 몰래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일이 발각되어 수녀들이 수녀원장에게 이자베타와 청년이 침대에 같이 있다는 것을 밤중에 알려 왔다.
그런데, 마침 수녀원장도 다른 남자를 끌어 들여 즐기고 있었으므로, 당황한 나머지 수녀원장은 베일을 덮어 쓴다는 것이 남자의 바지를 덮어 쓰고 이자베타를 찾아 간다. 수녀원장은 이자베타를 훈계하며 죄를 물었는데, 이자베타가 덮어 쓰고 있는 남자의 바지를 지적하자, 슬며시 말을 바꾸며 "이러한 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라고 얼버무린다. 이후, 수녀원의 수녀들은 저마다 남몰래 남자 애인을 두려고 궁리하게 된다.
7. 리자베타의 이야기(네 번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리자베타는 한 부유한 집안의 딸로, 오빠 삼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다. 리자베타는 혼기를 놓치고도 결혼을 하지 않아서, 오빠들은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사실 리자베타는 몰래 열렬히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자가 있어서 그 남자와 내밀하게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들은 그 사실을 알고, 리자베타의 혼삿길을 위해서는 그 남자를 떼어 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 남자를 죽여서 몰래 묻어 버린다. 리자베타는 이후 날이 지나가도 그 남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어느날밤 꿈속에 남자가 나타나 억울한 사연을 말하자, 리자베타는 꿈속에서 말한 장소에 가서 땅을 파보니, 과연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리자베타는 매우 슬퍼하였는데, 시체를 끌고 갈 힘이 없어서, 머리통만 잘라서 들고 간다. 리자베타는 잘린 머리를 들고 방에 틀어 박혀 그 머리에 입을 맞추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리자베타는 남자의 머리를 통에 집어 넣고 흙으로 묻어 주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난다. 오빠들은 그 꽃을 이상하게 여기고 통을 파 보는데, 거기에 두개골이 있었으므로, 이것이 자신들이 죽인 남자의 머리라는 것을 알고 놀라서 통을 없애 버리고 멀리 떠난다. 리자베타는 이후 실성하여 꽃을 돌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떠돌아다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버린다.
8. 돈 잔니 디 바롤로의 이야기(아홉 번째 날 열 번째 이야기)
돈 잔니 디 바롤로는 성직자로 한 암말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가난한 신부였다. 돈 잔니 디 바롤로는 한 가난뱅이의 아름다운 아내가 자신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것을 보자, 자신은 암말을 처녀로 바꾸고 처녀를 다시 암말로 바꾸는 마법으로 암말과 친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암말과 떨어질 수 없어서 따로 잘 수 없다고 거짓말 한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에게 이 마법을 배우면, 자신이 말로 변해서 남편의 일을 도울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남편에게 마법을 배우라고 한다. 남편이 돈 잔니 디 바롤로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돈 잔니 디 바롤로는 말에게 꼬리를 달리게 하는 절차가 가장 어려우니, 결코 성공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날 밤 아내를 말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돈 잔니 디 바롤로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의 옷을 모두 벗게 하고,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의 갈기가 되라고 하고, 아내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말의 다리가 되라고 하고, 아내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의 가슴이 되라고 하고, 아내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의 궁둥이가 되라고 한다. 그리고 꼬리를 달아야 한다면서, 자신의 바지를 벗더니 아내의 몸에 달라 붙는다. 그러자, 남편은 흥분하여, "꼬리를 달면 안돼!"라고 소리친다. 돈 잔니 디 바롤로는 남편이 말을 하는 바람에 마법이 실패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유유히 떠나간다.
9. 메우치오 디 투라의 이야기(일곱 번째 날 열 번째 이야기)
메우치오 디 투라는 그 친구와 함께 한 여인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유부녀였으므로, 여인과 친해지기만 할 뿐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고, 두 사람은 여인이 낳은 아들의 대부가 된다. 대부는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메우치오 디 투라는 이제 여인의 몸을 탐하게 되면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참지만, 친구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여인에게 덤벼 결국 여인과 환락을 즐긴다.
결국 친구는 너무 심하게 쾌락에 빠져 몸을 사리지 않다가 일찍 죽어 버린다. 친구와 메우치오 디 투라는 죽고 나면 죽은 후의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유령이 되어 말해 주기로 약속했으므로, 죽은지 사흘이 지나자, 친구의 유령이 메우치오 디 투라에게 나타났다. 메우치오 디 투라는 죽고나서 자신이 죽어서 대부가 된 아이의 어머니와 바람이 난 죄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불길 속에서도 덜덜 떨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그런데, 저승에서 그 정도는 죄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메우치오 디 투라는 매우 기뻐하며, 이후로는 마음껏 실속을 차리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10. 화가(파졸리니)가 그림을 완성하며..."꿈을 꾸는게 더 쉬운데 왜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마지막 이야기
=== 원작 === <부산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 박상진 교수>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부활하는 리얼리즘
데카메론
부활의 힘
흔히들 고전이라고 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며 거듭나는 작품을 가리킨다. 죠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Decameron)』도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왜 이것이 고전에 속할까 하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대개 『데카메론』에 대해 갖는 인상은 아마 성과 쾌락에 관계된 재미난 혹은 여흥거리 이야기 모음집 정도일 텐데, 그런 인상은 고전에 대한 기존의 개념과는 잘 맞지 않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메론』은 어떤 점에서 고전으로 평가받게 된 것일까? 우선 내용의 탁월성은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보편적 원리나 진실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구석으로 밀려나는 대신에 무수히 다양한 현실의 편린들이 펼쳐진다.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하게 정리될 수 없을 테지만, 이른바 리얼리즘에 기대어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과 체험을 구체적인 언어로 재현하는 리얼리즘의 자세와 방식이 생명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은 중세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한 내세 중심적 세계관의 무거운 장막을 들추었고, 현실세계에서 펼쳐지는 삶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당대 대중의 언어였던 이탈리아어에 담아내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데카메론'이라는 말에는 그리스어로 '10'이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과연 이 책에는 10이라는 숫자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선 페스트를 피하여 피에솔레 언덕에 모여든 젊은 남녀는 10명이다. 이들은 월요일에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일인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 2주일에 걸쳐 모두 10일 동안 각각 하루에 하나씩 총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루마다 이야기의 주제가 정해져 있으며, 하루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춤과 노래로 마무리한다. 100편으로 이루어진 단테의 『신곡』을 흉내냈다는 말도 있으나, 다루는 내용과 형식은 크게 다르다. 단테는 치밀하게 운율을 맞춘 복잡한 운문 형식으로 신의 거대한 세계를 쌓아올리지만, 보카치오는 쉽고 친근한 산문으로 사랑과 욕망, 행복, 운명과 같은 인간의 주제를 일상의 삶에 연결하여 풀어낸다.
『데카메론』에 실린 100편의 이야기가 모두 보카치오의 순수한 창작물은 아니다. 중세부터 전해 내려오던 역사적 사건과 설화, 민담 등에서 소재를 따온 얘기들이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다양한 얘깃거리들을 자신의 세계관에 비추어 재해석하여 수평적인 구성과 사실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첫 번째 날부터 열 번째 날까지 100편의 이야기는 단지 나열되어 있다. 열 번째 날의 주제가 전체를 총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전체 이야기들을 수렴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세상의 모습을 마치 자갈들처럼 늘어놓는다. 게다가 사실적인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독립적인 나열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30대 중반에 피렌체에서 썼다. 그 전의 작품들은 나폴리의 밝은 궁정 사회의 분위기에서 쓴 것이라 느낌이 사뭇 다르다. 피렌체로 옮기면서 그는 당시 번성하던 상인 계층의 세계관에 호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근대 부르주아의 시민의식과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근대 여명기의 사회와 인간 내면의 풍경들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한편, 『데카메론』은 작가 자신의 에로틱한 삶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또 어머니를 모르는 사생아로서, 어머니를 낭만적으로 채색하여 여러 작품에 등장시켰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듯 보카치오에게도 일생동안 창작의 영감을 준 피암메타가 있었는데, 그녀도 어머니의 변형이라는 말이 있다.
『데카메론』을 쓴 이후 보카치오는 거의 창작을 하지 않고, 대신 라틴어로 된 학술서를 집필하는 일에 몰두했다. 당대를 대표하던 인문학자 페트라르카를 만나 우정을 키워가면서 보카치오는 문학을 버리고 학문적 집필과 연구로 기울어졌다. 그러면서 그는 『데카메론』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다른 문학 작품들도 부끄럽게 여겼으며, 더욱이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썼다는 것을 후회했다.
페트라르카가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작품들을 불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홀대한 작품들 중 하나가 지금까지 그를 영원한 고전 작가로 살아있게 만든 것은 묘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데카메론』에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일상의 인간들이 살아 있으며, 그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새로운 얼굴로 부활하고 있다.
사랑과 명성
『데카메론』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인간의 삶을 다채롭게 재현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결속시키는 하나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에 대한 것이든 남에게 받거나 주는 사랑이든, 선하거나 악하게 표출된 것이든, 어떤 식으로든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여기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은 사랑의 힘으로 행동하고 살아간다. 사랑은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역동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숲,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밤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도시의 흔한 뒷골목들까지도 우리가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데카메론』에서 사랑은 늘 고결하지는 않다. 때로는 더러운 술수에서 나오거나 지저분한 욕정으로 치달리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렇듯 다채롭게 『데카메론』을 가득 채우는 사랑이 마침내 고귀한 결말로 향하는 것은 열 번째 날에서다. 열 번째 날의 주제는 사랑이 깃든 관대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는 사람들의 얘기다. 하루마다 주제가 정해져 있지만 유독 첫 번째 날과 아홉 번째 날은 정해진 주제가 없다. 마치 그 사이의 두 번째 날부터 여덟 번째 날까지를 양쪽에서 묶어주는 것 같다. 이런 구조는 열 번째 날이 아홉 번째 날까지의 이야기들을 사랑의 주제로 총 정리하는 효과를 낸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인간다운 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데카메론』은 영원하게 지속될 가치로서 '명성'을 제기한다.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일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고 유지하며 지속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세월과 죽음으로 황폐해지기 마련인 인간의 운명을 방어하는 역할을 가리킨다. 보카치오는 이렇게 지속적이고 선한 사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으면서 인간의 운명을 위안하려 한다.
『데카메론』에서 열 명의 남녀가 모인 것은, 그 머리말에서 보카치오가 실감나게 묘사한, 당시 피렌체를 휩쓴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페스트에 직면한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사라져 없어지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열 명의 남녀는 페스트의 공포를 피하려 했고, 쉽게 사라지는 인간의 삶에 저항하여 쾌락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려준 100편의 이야기들에서 인간의 삶은 쉽게 사라지는 만큼 치열하게 응전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삶은 언제라도 사라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과 도전 의식으로 자신의 불행을 언제라도 뒤집는 낙천적이고 투지에 찬 개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면적인 특징이었으며, 당대의 인간이 추구한 구원의 내용이었다.
단테가 영원한 진리를 상상한 것처럼 보카치오도 역시 영원한 구원을 상상한다. 보카치오가 꿈꾼 구원은 지상(地上)의 구원이다. 단테의 구원은 신앙과 섭리로 이루어지지만 보카치오의 구원은 삶에 대한 사랑과 도전 그리고 그를 통해 쌓아올리는 명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명성은 인간이 스스로의 기억을 영원하게 만드는 길이며 스스로의 유한성을 이 세상에서 연장하는 길이다.
보카치오가 명성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제시한 것은 스러져 없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단테처럼 인간의 운명을 내세에 맡기기보다는 현세에서 해결해보려는 시도였다. 『데카메론』은 그렇게 지상의 구원을 꿈꾼 흔적이며, 그런 면에서 보카치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희구했던, 지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을 예고하고 개척한 작가였다.
개인과 재능
명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 중 하나였다. 보카치오가 쓴 『단테의 인생』에는, 이미 고대 로마 작가들은 강고한 개인의식을 지니고 세속의 명성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며 단테 역시도 그들을 본받아 시인의 월계관을 쓰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명성에 대한 관심은 개인 존재의 자각과 직결된 것이었다. 이는 개인을 집단 속에 가두어 놓은 채 잊고 무화시켰던 중세 기독교의 거대한 자기중심적 환상에서 깨어남을 의미한다. 보카치오는 기독교 교리를 잠재적으로 거부하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정신을 고귀하게 다듬어 표출하고자 한다.
보카치오는 기독교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종교들과 동등하게 놓는 입장에 있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기독교 성직자들은 당대의 지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반면, 이교도들을 편견 없이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도 여럿 발견된다.
여러 종교를 긍정하는 보카치오를 회의론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카치오 역시 확고한 종교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인문주의적 의미에서 말하는 재능의 덕(德)이라는 새로운 종교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재능의 덕은, 중세의 낡은 내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13세기 이래 봉건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었던 이탈리아 반도에 일기 시작한 변화와 관계가 있다.
도시들 사이에 경제와 정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현실적 가치에 무게를 둔 새로운 시대의 인간이 지녀야 할 새로운 삶의 원리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재능은 부를 창출하거나 명성을 얻게 해주며, 욕망을 충족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하여 제도와 법을 정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가리켰다. 누구나 다 사회적 삶에 직접 관여하면서 재능을 발휘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당시 여전히 지배적이었던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보카치오가 탈주하는 모습은 강렬하다. 하느님의 빛 속에서 해체되며 행복을 느꼈던 단테가 제시한 기독교적 구원과 달리, 보카치오는 험난하지만 개인의 실존을 지속시키는 지상의 구원을 추구한다. 보카치오의 인물들은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기보다는 삶의 세계가 제공하는 즐거움을 더 골똘히 생각한다. 『데카메론』의 성취는 이런 시대정신의 쾌활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거기서 다른 세상의 신비는 급진적으로 거부되고 죄의식은 부드럽게 사라진다.
『데카메론』의 기둥을 이루는 것은 재능을 지니고 발휘하는 개인들이다. 그들은 예정되어 있는 불변의 엄격한 원리에 시큰둥해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펼쳐낸다. 여기에는 기지와 재치, 술수, 결단, 모험을 통한 세속적인 살아남기와 명성의 추구에 관련된 내용이 수도 없이 출현하고 있다. 이는 부르크하르트가 부활시킨 르네상스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보카치오는 이미 세속의 평등의식과 명성의 가치를 열렬히 추구하고 옹호한 현실적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여성성
『데카메론』에서 개인의 실존적 가치는 여성성과 함께 두드러진다. 오랫동안 이 책이 포르노그래피-도색서적-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은 보카치오가 창조한, 재기 넘치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장면들과 그 사실적 묘사 때문이다. 오늘날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생각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발랄한 모습은 어쩌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성애의 묘사는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고 더욱이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딱히 외설적인 부분은 없으며 언어도 암시적일 뿐 상스럽지 않다. 그러나 『데카메론』은 최근까지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낙인찍힌 고전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서 몰래 읽었다.
등장인물은 대단히 다양하다. 수적으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고 귀족과 성직자가 상인과 하층 계급보다 많지만, 여성과 상인 그리고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빠지면 얘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여성의 역할은 지대하다. 보카치오는 스스로 그 「서문」에서,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안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여성이 자신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는 신이라고 공언한 적도 있다.
『데카메론』은 현실에 기초한 합리적 쾌락주의가 결을 이룬다. 쾌락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개 활발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낙관적이다. 세상의 도덕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교리에도 무심하다. 그들의 언어는 발랄하고 음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논리정연하고 설득력을 지녔으며 때로는 사회 개혁의 힘을 내비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섯 번째 날의 일곱 번째 이야기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필립파의 얘기다. 그녀는 남편에게 고소를 당하자 법정에 서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사회의 법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만인의 동의 위에 세워져야 하지만, 자기를 법정에 세운 법은 여성을 고려하지도, 여성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도 남성처럼 욕정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욕정을 충족시킬 권리 또한 남성과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또한 사회의 근본 체제를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필립파가 표출한 체제전복적인 힘은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필립파의 죄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소위 간통이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의 여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하지 않게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여성을 신비하게 혹은 그 반대로 비하해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성적 해방은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장려하는 새로운 인문주의 시대에 걸맞는 것이었다.
인문주의 시대에 실제로 그러한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의아해할 것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인문주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여성의 해방은 오히려 현재 더 활기를 띠고 있으니까. 반면 우리 시대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은 오히려 『데카메론』에서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소외와 차별, 비정상의 범주에서 이탈하여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현대의 진보적인 페미니즘 참고서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리얼리스트의 길
여성에 대한 보카치오의 입장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개인의 실존과 재능을 강조하지만, 한편 여성은 남성이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모임조차 유지하지 못한다고 비하하거나 남성은 여성보다 훌륭하다고 단언한다. 욕정에 휘말려 여색을 즐기는 남자보다 그렇게 만드는 여자를 죄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분명 보카치오는 여성에 대해 모호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보카치오가 여성성 자체보다도 더 크고 중요한 성취를 이루어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카치오가 진정한 리얼리스트였다는 점이다.
이 책에 실린 백 가지 이야기에서 음울한 분위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당시 페스트가 돌던 끔찍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어두운 지옥의 그림자도 없지만, 깊은 명상의 흔적도 없다. 다만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경쾌한 필치로 그려내고 새로운 세계를 쾌활하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보카치오를 리얼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당대의 현실을 어떠한 이념이나 관습, 혹은 헛된 희망의 메시지로 가리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적 신념일 것이다.
보카치오의 눈에 비친 현실은 특정한 계층이나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잘려진 단면이 아니라, 수없이 자잘하게 세분화된 계급과 직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사는 게 다 그렇지요" 하고 말한다. 그런 한편 그들은 저마다의 운명에 충실하다. 의심스러운 내세에 희망을 두기보다는 자기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관용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도 고집하지 않고 무엇도 추종하지 않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에 나타난 현실은, 어떤 이상도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무이상(無理想)을 대변한다. 소외된 사람들은 도덕에 대해 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들은 도덕적 엄격이나 청결을 내세우는 권력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념과 종교, 체제 등과 같은 모든 권력적 질서에 매이지 않은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서 보카치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이상에 초연한 보카치오는 현실 재현에서도 어떤 전범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재현해낸 세상은 때로는 모순된 것이거나 이중적이다. 여성은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남성에 기대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기독교는 진정성을 갖춘 든든한 안식처인 동시에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순과 이중성은 당대 현실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보카치오는 자유인이었다. 그의 솔직한 상상에 동참하고 그의 발랄한 언어를 읽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삶에 가까이 다가선 보카치오를 만나게 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리얼리즘은 딱히 정의내리기가 곤란할 정도로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개념이긴 하지만, 대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한 작품이라면 리얼리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역시 현실의 결을 어루만지면서 위안을 얻고 또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고자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를 지배한 기독교의 내세중심주의를 거부했는데, 사실 그가 거부한 것은 하느님의 존재가 아니라 현세를 희생시키면서 내세의 구원만 종용하는 교회 제도였다. 교회가 주는 구원의 메시지를 헛되고 기만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는 그런 희망을 접고 현실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2. 『데카메론』은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로 진입하던 시기에 나왔다. 보카치오는 새로운 시대를 일찌감치 감지하고 묘사했는데 그가 재현한 개인성,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은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기본 틀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당대의 일상에서 포착하고 살려낸 보카치오의 작가적 감수성과 자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감수성과 자세는 어떤 것일까? 우선, 일상의 세세한 결들 가운데서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밀쳐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특히 여성과 같은 소수의 목소리를 전면에 울려 퍼지게 만드는 작가의 역할 또한 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밖에 또 어떤 요소들이 있을지 생각해 보자.
3. 보카치오는 주어진 삶에 도전하고 명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종교와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가 관용의 자세를 보였다는 것은 특정 종교를 추종하지 않고 특정한 삶의 원리에 매이지 않으며 특정한 도덕과 이상에 지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여러 종교들을 똑같이 받아들였고 여러 층의 삶의 양상들을 똑같은 자세로 대했으며 스스로의 도덕과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입장에서만 우리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삶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카치오의 그런 태도와 자세가 오늘날에도 유용한 것인가? 보편적 이상과 원리에 묻히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실존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일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자.
[네이버 지식백과] 데카메론 [Decameron] - 부활하는 리얼리즘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 네이버 블로거 영화평 ===
금서로 널리 알려진 보카치오의 원작 중 하층민들의 이야기로만 10개 정도로 뽑아내 만든 영화입니다. 파졸리니 자신이 화가역을 맡아 지오토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절실한 기독교인들이 본다면 신성모독이라 할 정도로. 신부와 수녀를 탐욕적이고 밝히는 세속적인 인물들로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들은...
파솔리니가 각본, 감독, 배우를 겸했으며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가 쓴 소설에 나오는 몇몇 이야기를 풍부하게 직조한 서사 영화이다. 파솔리니는 예술가, 성직자, 마법사들이 거주하는 중세 이탈리아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음탕한 타피스트리로 엮는다. 전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지오토 역으로 나오는 파솔리니는 감각적이고 불경스러운 유머로 관객들을 원숙한 영화적 풍경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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