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내 나이 80살이 되는 해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것도 없이 일모도궁(日暮途窮) 역진신피(力盡身疲)하여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께 받은 은혜는 어차피 갚을 엄두도 못 낸다하더라도 스승님께서 주신 전가보장(傳家寶藏)은 꼭 누구에겐가 전해주어야 하겠는데 그 길이 없어 걱정이었습니다.”
지난 2월15일 이른 아침. 능엄학림 졸업식이 열리는 교종본찰 봉선사의 다경실(茶經室). 운허스님의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지었던 이곳에서 올해 팔순의 대강백은 졸업식에서 학인들에게 해 줄 말을 기자에게 먼저 일러주었다. 평생을 해 온 일이지만 여전히 만족스럽게 손을 놓을 수 없는 경학과 역경에 관한 걱정거리다.
“자기의 깃대 놓지 않고 가면 수행자의 길”
1965년 역경위원 위촉된 후 43년간 경전 한글화
“남은 생도 이 길을…후학들 나를 밟고 지나가시길”
동국역경원 원장인 월운스님. 현재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조실로 주석하며 능엄학림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해 왔다. 1947년 남해 화방사로 입산, 1949년 운허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니 60년을 넘어서고 있다.
“어릴 때부터 유서(儒書)만 봐서 불경(佛經)은 못 쓸것으로 알았는데 몇 장 읽어보니 좋았어요.” 새벽예불부터 각종 재를 지내기까지 습관적으로 경을 외는 주위 스님들이 뜻을 새기며 경전을 보는 18살의 행자 아닌 행자를 보며 권했다. “봉선사에 운허라는 대학승이 있다. 그 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너에게 맞을 것 같다.”
운허스님을 실제로 만난 것은 휴전직전인 1952년 범어사에서였다. “출가 목적이 성불(成佛). 불조의 은혜를 갚고 사회에 회향하는 것인데 경(經)을 보라 하시더군. 거기에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 있다며 말이야.” 이렇게 시작된 60여년 수행자의 길. 월운스님에게 있어 그 길은 생사(生死)의 무상함을 거창하게 얘기하기보다 아직까지는 ‘낙엽처럼 밀려 여기까지 온 자신’을 밟고 지나갈 후학을 찾아 헤맨 대장경의 숲일지 모른다.
“바람 따라 흘러가는 낙엽과 인생이 다른 것은 무엇이겠는가? 한 생각 놓지 않고 그 목적지를 찾아가면 수행자의 길이고, 그저 바람 따라 흘러가면 낙엽의 길이지. 자기의 깃대를 놓지 않고 가면 수행자의 길이 아닌가.”
1965년 역경위원으로 위촉되었으니 역경의 깃대를 잡은 세월만 해도 43년이다. 비구-대처 분규의 종지부를 찍으며 시행하기로 한 ‘역경-도제양성-포교’ 사업의 한 축을 맡아 온 셈이다.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지도했고, 1993년부터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2002년에는 <한글대장경>을 완간(完刊)했다.
“원래는 ‘초고(礎稿) 완간’이 맞는 얘기야. 떳떳하게 내 놓을 수 있어야 완간이잖아” 어쨌든 비구-대처 분규의 종지부를 찍으며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번역하겠다고 한 선인들의 약속을 해 지킨 셈이다.
“역경원장을 맡아 6년간 고려대장경을 집중적으로 번역했어. 하지만 완간하려면 사실 어려워. 그래서 한문원전 교육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대장경 전산화’를 서두르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야.”
스님은 “경전을 보는 데는 박사학위도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한문경전 공부를 중시한다. 완간을 위한 재간(再刊)도 준비하고 있지만 할 일이 결코 적지 않다. 대장경에도 순서가 있는데 종단과 학교의 여건에 맞춰 일하다 보니 다 지킬 수 없었다. 교정을 보라고 하면 빠진 것 보완하기 보다는 ‘옛날 분들의 표현이 어색하다며 요즘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아예 다른 말로 바뀌어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한문 불경을 공부해야 가능합니다. 역경은 일생의 원력으로 삼아 두고두고 해야 되는 일입니다. 깨닫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선방수좌들을 알아주듯이 남들이 이해를 안 해줘도 역경을 보람 있게 생각하도록 종단에서 그런 풍토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재정을 투자해서 젊은 인재들이 여기(학림, 역경분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장경 우리말 완간. 이것은 미래를 위한 사업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직접 나서서 설립한 것 중의 하나가 봉선사 능엄학림. 종단의 전문교육기관이다. 두 마리 토끼를 생각한 사업이다.
“불에 타 버렸지만 남대문(숭례문)도 도시발전의 논리로만 보면 뜯어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정신 자체를 헐어버리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역경도 마찬가지예요. 능엄학림의 교육방식이 구식이라고 지적도 받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교학의 모든 자료들이 대부분 한문으로 돼 있으니 옛사람들이 글을 배우고 풀던 방식을 그대로 익히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역경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학을 하거나 강사에 뜻을 둔 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전통방식의 수업이라고 스님은 누차 강조한다. 역경의 기본인 교상해석과 교의판단의 안목도 제대로 키울 수 있다. <화엄경>을 주교재로 하는 경우 사기(私記)를 주로 본다. 사기는 역대 선배 수행자들이 경전을 공부하며 나름대로의 주석을 단 일종의 ‘학습 메모장’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한다. 대부분이 초서로 필사본이어서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된 경학의 지식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보배’나 다름없다고 한다. 사기와 함께 경전의 주제별 목차인 과도(科圖)도 살펴본다. 과도를 통해 무슨 경전을 어떻게 봐야 할지, 사기를 통해 어떻게 경전을 읽어야 할지 배우는 것이다. 자연히 역경의 기본기를 터득하게 된다고 한다. ‘이력(履歷)식’ 공부다.
“옛날에 한 것을 갖고 하나하나씩 맞춰 보는 것. 하나하나 새겨보는 훈련이 안되면 경전을 소화시킬 수 없어. 그것을 운허스님이 우리에게 전수하셨지” 현 총무원장 지관스님도 그 때 함께 공부하신 분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바쁘시겠지만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력식은 글을 쪼개나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논리적으로 공부하다 보면 경안(經眼)이 열린다고 해요” 이런 생각에서 시작한 능엄학림을 통해 배출한 인재가 어느덧 30명이 넘었다. 전문과정이 제4기까지 30명이고 올해는 연구과정에서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하는 경사가 있었다.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온 게야” 정화의 산물로 시작된 일이지만 중간에 그칠 수는 없는 일이 또한 이 공부가 바탕이 돼야 하는 역경불사. “부처님 일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 줘야 합니다. 배를 운항하는 데 선장도 중요하지만 노 젓는 사람도 있어야 해요. 이 역경분야가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능엄학림 졸업식이 끝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스님은 후학 두 명을 강사로 모시는 추대식으로 전강식(傳講式)을 대신했다. “막히면 상담해주마. 이렇게 돼 있거든요. 가르치는 일도 연습해야 합니다. 졸병도 연습하면 조교를 잘 하듯이…. 하루아침에 안 되는 것이니 보완(교육)하는 것이 종단에도 교리 보전에도 필요한 것 이예요. 긴 세월에 걸쳐 역경을 해 내려면 꼭 이 전통교육 방식이 유지돼야 합니다.”
스님은 “우리 같이 시대에 뒤떨어진 공부를 고집하는 사람을 ‘후진 사람’이라고 하는 데 불교신문이 그런 사람을 취재하러 왔으니 ‘후진 기자가 후진 사람을 취재하러 온 격’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터뷰 하는 동안 학감을 비롯해 학인 스님 4명까지 자리를 함께 해선지 졸업식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스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보였다.
봉선사=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봉선사와 역경불사 /
운허스님 역경에 총력…월운스님 대 이어 계승 한글대장경 완간
<사진> “죽어 사리 대신 후학을 남기고 싶다”고 밝힌 월운스님이 봉선사 경내를 거닐고 있다.
봉선사(주지 인묵스님)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이자 교종본찰(敎宗本刹)로 이름이 높다. 1551(명종66)년 교종의 수(首)사찰로 지정되어 승과고시를 치르기도 했다. 전국 사찰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16개 중법산(中法山)의 하나로 조선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은 근세에도 계속됐다.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의 초대 교장인 월초(月初)스님이 주지로 봉직하면서 후학양성을 위해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했다. 해방 후에는 운허(耘虛)스님이 광동학교와 동국역경원 설립에 앞장서 인재양성과 역경에 총력을 기울였다.
종단과 정부의 지원 그리고 대를 이어가는 봉선사의 지원에 힘입어 2002년에는 월운스님이 운허스님의 역경불사 시작 이후 37년 만에 우리말 대장경 총318권을 완역하여 교종본찰로써 그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공로로 월운스님은 2003년 포교대상, 2005년 대원상과 문화훈장, 2006년 지훈상(芝薰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봉선사는 홍법강원 불사를 시작했다. 첫 해인 올해 강사 스님들이 머물 ‘강주처’를 건립하고 연차적으로 강원과 강당을 건립하여 교학도량의 맥을 이을 계획이다.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행을 드러내 보여라. 세상에는 마음에 먼지와 때가 적은 자도 있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쇠퇴할 것이지만, 법을 듣는다면 잘 알게 되리라. 비구들이여!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
[불교신문 2407호/ 3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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