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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송설당' 제21장 김천고등보통학교

1932년 개교당시 준공된 김천고등보통학교 건물(앞쪽 붉은 벽돌 건물)
최송설당은 개교가 확정되자 두 가지 욕심이 생겼다. 하나는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셔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을 교사를 조선에서 제일가는 건물로 짓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학교를 운영할 교장선생님과 교무주임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 귀비가 진명과 명신여학교를 세울 때 능력 있는 인물을 선생님을 모셔오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최송설당은 자신도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결심이 서자 경성행 열차에 올랐다. 이제는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송설당은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가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경성역에 내리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인 변호사를 찾았다. 약속한 대로 훌륭한 교사 추천을 요청하였다. 이인 변호사는 중동고보의 최규동1) 선생을 만나보도록 했다. 최송설당은 약속 날짜가 잡히자 최규동 선생의 자택으로 갔다.
1) 최규동 선생은 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에 부임한다.
“최송설당입니다. 이인 변호사님께서 소개해 주셔서 왔습니다.”
최 선생은 이미 이인 변호사로부터 내용을 듣고 알고 있었다.
“큰 결심하셨습니다. 사실은 우리 학교도 선생님들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약속을 했으니 추천을 해 드려야지요.”
“꼭 부탁드립니다.”
“저희 학교에는 ‘최대수 안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수에는 저 최규동을 말하고 기하는 안일영 교무주임을 말합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꼭 보내 주십시오.”
“국내에는 그만한 수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안일영과 최규동 선생의 수학 논문(출처 : 중동고보)
이러한 추천 과정을 통하여 안일영 교무주임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선생님 명성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주시지요?”
“여사님이 간곡히 요청하시니 내려가겠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교장을 맡아 주십시오. 봉급은 이 학교에서 받는 것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안일영 선생은 경성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도 기꺼이 시골학교로의 부임을 승낙했던 것이다.

안일영 교장 선생(출처 : 송설 역사관)
이인 변호사가 추천한 다른 한 분은 자신과 함께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는 정열모 선생이었다. 정열모 선생도 중동고보에서 국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최송설당과 면접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선생님은 어느 과목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예, 저는 조선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고 조선의 얼을 가르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얼’을 가르친다는 정열모 선생의 답변에 최송설당은 선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신의 마음에 품었던 선생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의 면접은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 시골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학교의 교무주임을 맡아 주시지요. 급여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급여가 문제가 아니라 제 이상을 펼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선생님 같은 분이면 절망에 빠진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소신대로 가르쳐주세요.”
“좋습니다.”
이렇게 하여 김천고보는 초대 교장으로 안일영 선생을, 교무주임으로 정열모 선생을 중동고보에서 모셔오게 되었다. 1년 후에 안일영 교장선생님은 다시 중동고보로 가셨다. 제2대 교장이 된 정열모는 충북 보은 출신으로 호가 백수(白水)였다. 김천을 지극히 사랑한 마음으로 김천(金泉)의 천(泉) 자를 파자(破字) 하여 호를 ‘백수(白水)’로 지었다. 김천고보 초창기 기틀을 마련하는데 안일영, 정열모 두 분 선생의 노력이 컸다.
짧은 봄이 지나고 초여름 장마가 왔다. 최송설당은 하루빨리 교사 신축이 이루어져서 멋진 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장마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이 더위가 시작될 무렵 최송설당은 최동열 재단 이사를 불렀다.
“이사님 경성에 가서 중앙청과 경성역 구경 좀 하고 오시지요.”
“구경이나 다녀오라는 말씀은 아니실 테고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 조선에서 제일가는 건축물은 1925년에 준공된 경성역과 1926년에 준공된 중앙청일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사님께서 이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공부 좀 하고 오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학교도 최첨단 공법으로 지어 보고 싶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알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얻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최동열 이사는 열흘간 경성에 머물면서 총독부와 경성역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시공되었는지 탐문을 하고 돌아왔다. 최송설당은 재단 이사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했다.
“최 이사님 경성 다녀온 얘기 좀 해보시지요."
“제가 경성에서 듣고 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독부 건물은 설계에 관해서는 비밀로 되어있어 제대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성 역에 관해서는 많이 듣고 왔습니다.
경성 역을 설계한 사람은 도쿄(東京) 역을 설계한 다츠노 긴고의 제자로 도쿄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는 츠카모토 이스시라는 사람입니다. 건축은 총독부 공무과 건축계에서 담당했습니다.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외벽을 마감했습니다.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로 마감했으며 일부는 동판으로 이음을 했습니다. 중앙에는 비잔틴 풍의 돔을 올렸습니다. 측면으로 아치형 창을 달아서 1층 광장에는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했습니다.”

본관 건물 신축 장면(출처 : 송설 역사관)
“잘 보고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학교 교사 신축에 바닥재는 익산산 황등석을 쓰고자 합니다. 황등석은 포천의 화강석과 더불어 조선에서는 제일 좋은 석재입니다. 황등석은 단단하고 철분 함량이 적어 눈비를 맞아도 붉게 부식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게 됩니다. 2층 건물에 철근콘크리트로 시공하고자 합니다. 콘크리트로 시공하면 수명이 적어도 백 년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외벽은 평양산 적벽돌을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우아한 빛깔을 발할 것입니다. 창문틀은 희 창틀을 사용할 것입니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처리해서 학생들이 휴식시간에 올라가 전망을 즐기도록 할 것입니다.”
최송설당의 해박한 건축 지식에 재단 이사들은 깜짝 놀랐다. 최송설당은 경성을 오르내릴 때마다 경성 역을 유심히 보아왔다. 이미 당시의 첨단 공법을 공부해 두었던 것이다. 최송설당의 의중대로 신축 교사는 설계되고 착공되었다. 평양에서 출발한 벽돌은 김천역에서 우마차로 운반했다. 본관은 2층 12개 교실을 배치하는데 3만 원이 들었다.
8천여 평의 운동장을 구축하기 위해 개미 떼처럼 많은 인부가 지게로 흙을 날랐다. 당시는 김천에서 제일 큰 공사 규모로서 장관이었다. 이를 처음 보는 군민들은 최송설당은 학교를 쇠로 짓는다고 하여 구경 오는 사람이 많았다.
1931년 3월 27일부터 이틀 동안 김천보통학교에서 제1회 신입생 선발시험이 실시되었다. 지원자 411명에 91명의 합격생이 나왔다. 동아일보에서는 합격생의 명단을 실어주었다. 정원 50명 모집에 91명을 합격시켰으니 경상북도 당국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재단 이사와 학교장이 도청을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제1회 입학생 학격자 명단(출처 : 동아일보)
“학무국장님, 선생님들은 과목별로 5년을 가르칠 수 있도록 10명을 뽑았습니다. 1학년 생도가 5학년이 될 때까지 선생님이 남아돕니다.”
“그건 학교 사정이 아니겠소. 규정은 규정이오.”
“이뿐만 아닙니다. 시골학생들이 자퇴를 하게 되면 중도에는 채울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이번만은 눈감고 넘어갈 테니 다음에는 그런 일 없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도청도 학비부담에 의해 중도에 자퇴하는 학생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였다. 묵인하고 넘어갔다.
경상북도 당국의 까다로운 트집으로 입학식을 바로 거행하지 못했다. 5월 9일 임시 강당이 준공되면서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입학생 중에는 중절모를 쓴 청년도 끼어있었다. 동급생이라고 하더라도 5살까지 차이가 났다. 당시 서울지역 교사들은 봉급이 40-45원 정도였는데 김천고보 초봉은 75원에 사택까지 제공하였다. 초빙된 선생님은 서울에서도 명성이 높은 최종환, 이기원, 이선, 송병돈, 원희덕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20%는 일본인 교사로 채워졌다. 일본인 교사는 국어(일본어)와 국사(일본사)를 가르쳤다.
입학식에서 안일영 교장 선생의 축사가 이어졌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경성에는 배재고보, 양정고보, 보성고보, 휘문고보, 중앙고보가 있습니다. 지방에는 평양의 광성고보, 개성의 송도고보, 함흥의 영생고보, 고창의 고창고보, 정주의 오산고보가 있습니다. 이제 김천고보가 탄생한 것입니다. 앞에 열거한 학교들을 보십시오. 학교설립자 분들은 외국 선교사들이거나, 내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기부금으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천고보의 설립자는 다릅니다. 설립자가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하여 세웠다는 점에서 정주의 오산고보와 더불어 조선의 유일한 민족학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앞에 열거한 학교들은 한일합방 전에 설립되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 세워진 학교는 고창군민이 세운 고창고보와 우리학교가 사립고보로는 유일합니다.”
교장선생님의 축사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어서 웅변가인 여운형 선생의 축사가 진행되었다.
“이 삭막한 우리나라 교육계에 새로운 꽃을 피우고, 우리 인재들을 양성해서 새 국가민족을 위해 이바지하게 된 김천고보…….”
이렇게 시작된 축사는 입학생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학교 간부들은 동석한 형사들에 의해 축사가 중지 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입학식을 맞이하여 최송설당은 자신의 건학 정신을 한시로 남겼다.
담장 안에 심은 소나무 한 자 남짓하여2)
가지와 잎 몇 성상 겪었냐고 물었더니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하듯
다른 날 동량됨을 보지 못 하리라네.
院裏裁松一尺强,
問渠枝葉幾經霜
以笑吾人年己老,
2) 최송설당의 한시개관’에서 권태을 번역
송정의 소나무에서는 송화 가루가 날리고 뻐꾸기는 둥지를 틀었다. 매일 학생들의 노랫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메아리치자 학교는 생기가 넘쳤다. 일주일 후 안일영 교장선생이 최송설당을 방문하였다.
“교장선생님 어서 오세요. 입학식 때는 수고 많았습니다.”
“예, 여사님 덕분에 모든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입학식 때 정주의 오산학교와 우리 학교가 유일한 민족학교라고 하셨는데 제 마음을 꿰뚫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십니까?”
“저는 평소에 마음깊이 그분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
“우리 학교도 민족학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선생님들이 노력해 주세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남강 선생님은 지난해 돌아가시지 않았나요?”
“예, 지난해 돌아가셨는데 유언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무어라고 하셨는데요?”
“자신의 백골을 오산학교 학생의 교육용으로 하라고 하셨지요.”
“유언대로 되었나요?”
“유언대로 경성에 운반하여 경성대학에서 표본으로 제작 중이었는데 일본 경찰이 이를 알고 중지시켰답니다.”
“저런…….”
“유골을 학생들이 볼 때마다 남강의 조선 혼이 살아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랍니다.”
최송설당은 자신의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교장 선생님! 오늘은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최송설당은 자신도 그렇게 하리라 다짐을 하였고 교장 선생에게도 당부했다.
좁은 관문을 통과한 학생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지역사회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기대도 컸다. 인기가 좋다보니 처녀들도 자연히 학교 뒷산으로 놀러왔다. 봄바람에 치맛자락 날리며 파라솔을 받쳐 든 여인을 보자 까까머리 소년들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다. 이른바 연애사건이 곳곳에서 터진 것이다. 이런 소문이 나자 경상북도 도청에서 지도 감사를 나왔다. 감사를 마친 감독관의 보고서가 걸작이었다.
‘학교 교정에 코스모스를 많이 심어놓아 아이들의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개교 당시 운동회 장면(출처 : 송설 역사관)
어느 학교나 그러하듯이 세월이 흐르면 전통이 생기게 마련이다. 김천고등보통학교도 초창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에는 운동회가 있다. 개교 3년차부터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보통학교 운동회만 보아오던 터라 김천고보의 운동회는 새로운 볼거리였다. 그날은 김천군민의 잔치 날이었다. 보기 좋게 발달한 근육의 벗은 몸들이 펼치는 곤봉 체조, 텀블링을 위시해서 각종 체능묘기가 연출되었다. 점심시간 직전에 개최되는 가장행렬은 익살과 해학이 넘쳤다. 주민과 학생이 한 덩어리가 되는 가장 큰 볼거리였다. 특히 원희덕 선생님의 400파운드에 가까운 역도 시범은 모두의 입을 벌리게 했다.
다수동의 들판이 황금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열모 교장이 송정의 최송설당을 찾았다.
“교장선생님, 오늘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오셨나요?”
“예 오늘은 마라톤대회 계획을 가지고 왔습니다.”
“올해 양정고보의 손기정 선수가 제3회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1등 했다는 것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1931년에 동아일보에서 제1회 전국마라톤 대회를 개최했는데 김은배 선수가 1등한 일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로스엔젤레스 제10회 올림픽 대회에서 김은배 선수가 6등을 했습니다.”
“마라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만약에 1936년에 개최되는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선수가 1등을 하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라톤을 통해 조선 사람이 일본사람보다 체력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도 매년 마라톤대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강인한 정신력에 건강한 체력을 갖출 수 있겠네요.”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라 전 구간을 달릴 수는 없고 학교에서 감천교까지 12Km를 달릴 계획입니다.”
“언제 실시할 건가요?”
“12월 하순 겨울방학을 앞두고 실시할 계획입니다.”
“저는 교장선생님의 의도에 적극 찬성입니다.”

제74회 마라톤 장면
이렇게 하여 겨울 방학을 앞두고 전교생이 팬티만 입고 교문을 나서서 달렸다. 추풍령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학생들의 고환이 다 오므려들게 했다. 읍내 상점을 돌 때는 시민들은 춥다고 오버에 목도리까지 하고 다녔다. 그러나 옷을 벗고 맨몸으로 달리는 학생들은 건강하고 비장한 무게감이 있었다. 일본인들의 앞을 지날 때는 무언가 분개심을 느꼈다. ‘우리가 이렇게 건재하고 있다. 두고 보자.’는 무언의 질주였다.
교육과목도 수신, 국어, 영어, 수학, 조선어급 한문,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체조, 음악, 미술로 편성되었다. 안타깝게도 국어는 한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라 했다. 식민지의 굴욕이었다. 역사 또한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였다. 학생들의 기억에 남는 수업은 과학 실험이었다. 충분한 실습기자재의 확보로 마그네슘의 작용과 수소와 산소의 분리 실험을 하였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실험이었다.

개교 당시 실험 장면(출처 : 송설 역사관)
민족을 구할 인재양성에 무게 중심을 둔 김천고등보통학교의 개교는 최송설당의 성공작이자 나라를 위한 든든한 투자였다. 이를 두고 김수길은 <삼천리> 잡지에서 최송설당을 문화인물로 극찬했다.

1930년5월 삼천리 잡지
“최여사는 조선여성사와 조선문화사의 제1항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춘원 이광수는 1932년 6월2일 <동광(東光)>에서 조선정신을 강조했다.
“최송설당의 갸륵한 행위가 서양식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전설적 조선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개벽> 논단에서는 ‘남(南)의 최송설당 북(北)의 백선행’이라는 두 여성 부호를 찬양하였다. 최송설당은 자신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종교 교육을 일체 강조하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학사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항상 궁금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이면 교장선생님이 정걸재로 올라왔다. 지난 일들을 보고하고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상의를 했다. 학교가 개교한지 4년이 지났다. 정열모 교장선생이 정걸재로 최송설당을 찾아왔다.
“교주님 강녕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학교는 별 문제가 없나요?”
“학교는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상의할 일이 무엇인가요?”
“학교가 개교된 지 4년이 지나도록 교기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교기를 만들까 합니다.”
“교기는 어떤 때 사용하시게요?”
“본관 옥상에 교기를 게양하고, 교장실에도 행사용 교기도 하나 만들어 두겠습니다. 시가행진을 할 때면 교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도록 할까 합니다.”

김천 중.고등학교 교기와 교가(출처 : 송설 역사관)
“그것 좋은 생각이네요. 당장 시행하시지요.”
“교주님께서 어떤 뜻을 담아 만들 것인지 지침을 주시지요?”
“그래요, 내가 평소에 창송이라는 가사를 지어놓은 것이 있는데 이 가사에 맞는 교기를 만들면 어떨까요?”
송설 당은 자신이 지은 가사 중에서 <창송(蒼松)>이라는 가사를 보여주었다.
바람서리(風霜疾苦) 늙은 몸이
본색(本色)본심(本心) 불변(不變)하니
천만(千萬)종류(種類) 초목(草木) 중에
너 같은게 또 있느냐
백운(白雲)명월(明月) 좋커니와
흰 눈(白雪)아래 빛이 난다.
창송백설(蒼松白雪) 두 글자를
조합(相合)하니 송설(松雪)이라
“좋은 지침이십니다. 일본사람들은 자신의 군기(軍旗)를 ‘욱일기 ’라고 하고, 중국 국민당은 ‘청천백일기3)’ 라고 합니다. 우리학교는 ‘청송백설기’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운만 띄웠으니 교장선생님이 여러분과 상의해서 결정하세요.”
교기는 그해 5월에 교주의 의중을 받들어 설중송(雪中松) 같은 그림을 형상화 하여 ‘청송백설기’로 제작되었다. 모든 행사 때마다 앞장서서 행진하였다. 이때부터 김천고등보통학교는 ‘송설학원’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3)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국기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소련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다. 3.1운동 이후 무기력해진 조선민중에게 민족주의 성공 모델로 인식되었다.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생 공산주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0년대 초부터 민족독립을 갈망하던 지식인들 중에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당시 김천고등보통학교도 조선의 지식인 그룹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의 침투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이용필은 수원고농(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 과학대학) 졸업 후 김천농회의 기수였다. 김천고보 1회 입학생이 4학년이 되었을 때 김한수, 나복기, 석희경, 김기진, 김진섭 등을 끌어들였다.
“학생 여러분! 학교 교과서만으로는 민족의 독립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진정한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추천하는 서적들을 읽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면암전’을 읽어야 합니다.”
“위인전만 읽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외국의 독립운동사로 ‘중국혼4)’, ‘월남망국사5)’, ‘미국독립사’, ‘이태리독립사6) ’를 알아야 합니다.”
4) 제국주의 확대의 위협 앞에 놓여 있는 당시 조선의 상태를 비판하고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간행된 것
5) 월남이 프랑스 보호국이 되기까지의 약사
6) 1907년 발간된 번역서로 이태리 독립의 과정을 다룬 역사서다.
“외국도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외국도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했습니다. 그 투쟁의 과정을 알아야합니다.”
“또 다른 것도 있습니까?”
“이밖에도 '자유종7)', ‘몽견재갈량8)', '20세기 조선론9)' 등 40여종의 서적이 있습니다. 차근차근 읽어 주기 바랍니다.”
7) 1910년 이해조의 신소설로 국가발전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8)1908년 유원표가 쓴 국한문혼용 소설. 당시의 동양 삼국의 관계 및 경장대개혁(更張大改革)의 제반사항에 관한 것이다.
9) 1907년 김대희(金大熙)가 지은 경제계몽서로 일본의 대한공략(對韓攻略)의 전말(顚末)을 설명하고 농상공의 진흥, 정신적 교육배양, 실력에 의한 자유 획득이라는 기본 방향에서 구체적으로 대책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학생들에게 암암리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김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포착되었다. 불온책자를 소지하였다는 죄목으로 옥고를 치렀다. 일명 독서회 사건이었다.
독서회 사건이 있은 후 정열모 교장선생이 최송설당을 찾아왔다. “교주님의 뜻대로 우리학교는 수학여행을 통해 역사교육을 시켰습니다. 2학년은 경주로 3학년은 부여를 다녀왔습니다. 이제4학년은 학생들에게 호연지기를 심어주기위해 금강산을 다녀올까 합니다.”

금강산 수학여행(출처 : 송설 역사관)
“저도 금강산을 몇 번 다녀왔지요. 아마도 금강산은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개교 초기부터 학생들에게 한민족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역사의 고장을 찾아 수학여행을 매년 다녀왔다.
송정의 오래된 소나무에는 묵은 때라도 벗겨내려는지 껍질 끝은 말려 올라가고 진초록 솔잎이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 듯 5년의 세월이 지나 제1회 졸업식을 맞이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그동안의 노고도 위로할 겸 최송설당은 선생님들에게 다과회를 베풀었다.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동안 선생님들 노고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입학은 91명이 하였는데 졸업생은 57명밖에 안되니 안타깝네요. 학업이 어려웠나 보지요.”

제3회 졸업생 사진(출처 : 송설 역사관)
“아닙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가정 형편이 따라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와 하숙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중도에 그만 두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기숙사를 세우면 어떨까요?”
“좋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여 기숙사 설립추진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교주님, 기숙사 위치를 어디로 하면 좋겠습니까?”
“교장 선생님, 기숙사 위치는 수영장 옆 공터로 하세요.”
“그 자리는 교주님 묘를 쓸 자리가 아닙니까?”
“명당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기숙사를 지웁시다. 명당에서 공부를 해야 인재가 배출될게 아닙니까. 묘는 다음에 생각하고요.”
“감사합니다.”

초창기 기숙사(출처 : 송설 역사관)
최송설당은 기숙사 신축 위치를 자신이 묏자리로 쓰고자 했던 가장 명당자리에 짓도록 했다. 기숙사가 완공되자 논어의 ‘학이편’ 첫 머리에 나오는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에서 시(時)와 열(說)을 따와서 시열재(時說齊)라고 명명하였다. 이렇듯 학교의 교세는 일취월장했다. 기숙사 완공으로 지원 학생들의 거주지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최송설당의 학교 설립은 여러 사람에게 자극을 주었다. 특히 당시 김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조선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던 때였다. 일개 조선 여인이 보란 듯이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고 있으니 속으로 놀라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최송설당을 시기와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인 부인회 회장인 이와다(岩田)여사가 주축이 되어 하루에 1전씩 모아 1935년에 김천여학교10)를 세웠다.또한 지역유지 배선규씨가 7천 원을 희사하여 1942년 김천공립상업학교11)를 설립했다. 이들 두 학교가 세워진 것은 최송설당의 장거에 감동받아 학교 설립의 촉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0) 오늘날의 김천여자고등학교다.
11) 오늘날의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