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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03편 1-14절
찬송 / 105장 · 오랫동안 기다리던
성서 / 잠언 17장 1-6절,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말씀 /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 17장 1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린도전서 11장 23-24절)
충남 예산에 가면 추사 김정희 고택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하면 무엇보다 그의 글씨가 떠오르지요.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글씨는 문자를 넘어 예술에 이르렀다 할 수 있고, 조선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추사 고택에 가면 그의 유품과 글씨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추사의 글씨 중에도 특히 고택의 기둥에 걸린 글씨들은 유명하지요. 고택 기둥에 있는 글씨 중에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추사가 말년에 쓴 것인데, 최고의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다, 그런 뜻입니다. 추사는 스물넷에 중국에 유학해서 서예를 배우고, 서른셋에 과거에 급제해서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지요. 그러니 평생 나라 안팎을 다니면서 얼마나 진귀하고 맛난 요리를 많이 먹어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소박한 푸성귀 반찬이 최고의 요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관리는 모름지기 청렴해야 한다, 그런 말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랏일을 한다는 자들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쇠고 그저 폭탄주만 탐한다면, 그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글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택 기둥에 있는 다른 글씨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 옆 기둥에는 이런 글귀가 있지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모임은 부부와 자녀와 손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모임, 가장 행복한 자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둘러앉은 밥상이다, 그런 말입니다. 추사의 두 글귀를 함께 읽으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나누는 밥상이 최고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사실 글귀의 내용만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 자체가 기름기를 다 뺀 소박한 밥상 같은 글씨라고 합니다. 추사체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면서 완성된 글씨랍니다. 가장 행복한 밥상은 소박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긴 밥상입니다. 우리가 그런 밥상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잠언에서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특별히 17장 1절의 말씀을 한 해를 마무르면서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 17:1, 새번역)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잠언은 인생의 지혜를 모은 책이지요. 그런데 잠언은 특별히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불립니다.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의 이름으로 모은 것이지요. 실제로 열왕기서는 솔로몬이 3,000가지 잠언을 말하고 1,500편의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왕상 4:32)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지혜가 솔로몬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왕 중에서도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밥상은 어땠을까요? 우선 솔로몬의 밥상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만 올랐습니다. 먹고 마시는 데 쓰는 식기를 다 금으로 만들어서 은은 귀금속 축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온통 금빛으로 번쩍이는 금 그릇이 놓인 그 식탁은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그 식탁에 오르는 기름진 요리는 또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열왕기상을 보면, 매일 솔로몬의 먹거리로 고운 밀가루 서른 섬, 거친 밀가루 예순 섬, 살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가 쓰였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 쓰였습니다.(왕상 4:22-23)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앞다투어 진귀한 진상품을 가져다 바쳤으니까, 솔로몬의 식탁은 말 그대로 산해진미요 진수성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잠언은 그 모든 진귀하고 기름진 진수성찬보다 ‘마른 빵 한 조각’이 낫다고 말합니다. 아니지요. 솔로몬의 잠언이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요리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 화목하게 사는 사람이, 진수성찬을 누리며 다투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음식/요리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은 어쩌면 평생 마른 빵을 화목하게 나누는 식탁, 그 소박하고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은 평생 부모 형제와 함께 나누는 화목한 밥상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밥상은 아비와 자식이 맞서고, 형제가 서로 칼을 겨누는 서늘한 밥상이었지요. 그의 밥상이 더 기름지고 화려해질수록 형제들은 더 원수가 되었고, 이웃 나라들은 적이 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밥상에 화목이 있고, 평화가 있겠습니까?
그 시기와 다툼의 밥상에서 자란 솔로몬의 아들들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식들은 솔로몬이 죽자마자 서로 칼을 겨누고 적대하며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분단은 그렇게 솔로몬의 기름지고 화려한 밥상에서 싹트고 자라났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잠언의 이 말씀, 이 지혜, 참으로 뼈아픈 성찰이며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말씀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갖지 못했던 이 행복한 밥상이 우리의 밥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전해주는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세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좀 의도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그냥 마태복음이 맨 먼저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편지가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바울의 편지보다 적어도 20-30년 정도 앞서 먼저 기록되었지요.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할 때는 아직 복음서가 생기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기록상으로는 바울이 처음으로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 아시아에서 그리스 로마까지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지요. 그러면서 여러 교회에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한 가지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복음서가 없었으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무엇보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예수님의 비유도 없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치유 이야기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보다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배운, 소위 목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부활 이후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을 직접 뵙고 따랐던 다른 사도들이 하고 있었지요.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일을 극히 자제합니다. 교회를 지도하면서도 내 생각은 이러하다고 말하면서 자기 말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요즘 자기는 주님과 직통한다면서 제멋대로 막말을 내뱉는 자들을 생각하면, 바울이 얼마나 복음 전파에 신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직접 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입니다. 그토록 예수님 이야기를 절제하는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라면, 정말 중요한 것이겠지요. 바울은 먼저 이 이야기가 ‘전해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것을 우리는 ‘전승’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전해주셨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이 다시 전해주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바울에게로, 다시 바울에게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전해진 예수님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예수님의 밥상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마지막 만찬은 어떤 밥상이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밥상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음식이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소박한 밥상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밥상에 차려진 음식이 아니라, 빵을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빵을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먼저 빵을 들어서, 다음으로 감사를 드리시고, 마지막으로 빵을 떼셨습니다. 빵을 들었다, 감사를 드렸다, 떼어 나누었다, 이 세 가지 모습/동작이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베푸신 예수님의 마지막 식탁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늘 그렇게 빵을 받아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떼어 나누셨습니다. 빈 들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그랬지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빵을 받들고, 감사를 드리고, 함께 떼어 나누는 밥상은 교회가 시작되면서부터 교회에서도 그대로 실행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교회를 세우며 전도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데,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하는 일, 그게 빵을 떼는 일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이유가, 목표가 빵을 떼는 일이었다, 그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먹기 위해 모이는, 무슨 먹방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빵을 떼는 일은 그 자체가 바로 예배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빵을 떼는 일을 하라고 명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모여서 함께 빵을 떼는 것, 그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먼저 빵을 들었습니다. 빵을 받들었습니다. 이 빵은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빵을 받들고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마른 빵 한 조각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렸습니다. 여기서 감사드린다는 말이 그리스말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에서 ‘유카리스트’ 성례전, 곧 예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본디 예배는 함께 빵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빵을 들고 감사드린 다음에 떼어서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감사드리고 떼어 나누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틀/형식이 되었다면, 그 밥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은 어떤 뜻이 있었을까요? 그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당신의 몸이라 하셨지요. 포도주를 주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모여서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빵을 받아들고, 감사를 드리고 떼어 나누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예배의 알짬이요 본질입니다.
정말 어떻게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제사/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이 자신을 대신해서 제물을 드리고, 신은 그 제물을 받아먹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에도 사이비 교주라는 자들은 참람하게도 자기가 신이라면서 신도들에게 몸도 마음도 돈도 다 바치라고 겁박하고 약탈하고 짓밟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내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함께 빵을 떼고 잔을 나누며, 주님의 몸과 보혈을 받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인간이 제물을 바치고 신이 제물을 받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시고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받는, 그런 종교 그런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잠언과 고린도전서를 통해 먹거리/밥상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밥상이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면 밥상이란 인간의 바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밥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의 몸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생각이 되지요. 우리의 밥상이 없으면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밥상이 부실하면 우리의 몸도 마음도 부실해지고, 우리의 밥상이 악하면 우리의 마음도 악해질 것입니다. 밥상의 문제는 단지 음식만의 문제만은 아니지요. 우리가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밥상을 나누면 우리의 마음도 삶도 평안해집니다. 아무리 기름진 식탁이라도 나쁜 놈들이 모여서 폭탄주나 돌리며 작당하면 거기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지요. 사기꾼의 밥상에서 배운 자식은 더 악한 사기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의 밥상을 정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언의 지혜는 우리에게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밥상을 나누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욕심과 집착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대로, 우리가 주님의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받으며,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말 구유에 오셨던 주님,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밥상에 오셨던 주님께서, 우리의 밥상에도 생명과 평화의 은총으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