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장로교, 감리교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
서북지방 전도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가족. 앞장선 이가 언더우드목사이며 호튼 부인이 탄 것으로 보이는 가마옆에 선 아이가 아들 원한경이다.
1.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
1)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로서 준비됨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믿음이 두터웠고 화공학 방면에 재주가 있어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였고 타자기와 묵지, 안전지 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 예술원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기도의 사람인 조지 뮬러와 가장 가깝게 지냈으며 주의 재림에 대한 강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어린 호레이스도 그 영향으로 믿음으로 살려는 강한 동기와 재림에 대한 소망이 충만했다. 한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부터 이 소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호레이스는 5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 밑에서 성장했다. 언더우드는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들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집안이나 몹시 가난하여 돈이 귀할 때 언더우드는 어느날 5달러 짜리 지폐를 갖고 식료품 상점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상점에 다다랐을 때 돈이 없음을 보고 놀랐다. 5달러가 온데간데없고 자기 손에 못쓰게 된 돈의 한 귀퉁이만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그 돈을 잘강잘강 찢어 못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만큼 그는 일에 정신을 쏟아 만사를 잊어버리는 성격이었다.
10살 때 형 프레드(Fred)와 프랑스의 볼로뉴 슈 메르 지방에 있는 가톨릭 계통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취침 전에 언더우드 형제가 꼭 기도를 하고 자자 다른 친구들이 야유를 퍼붓고 베게, 장화, 빗 등을 던지며 방해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했다. 나중에는 영국 소년들이 모두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소년들까지 하나 둘씩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취침 전에 기도하느라 조용해지자 결국 기숙사 안의 모든 소년들까지 기도하게 되었다.
폐결핵을 앓던 프레드가 마지막 소원이니 시편 119편이 아주 좋으니까 외우라고 하자 즉시 달려들어 호레이스가 외운 일이 있다. 호레이스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고 최소한 히브리서 전체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외우고 있었다. 네비게이토 선배의 5학년 딸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성경을 신구약 9번째 통독하고 있고, 그 오빠인 중1짜리는 11독을 하고 있는 것을 봤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 자녀 교육에 얼마나 필요한가? 호레이스는 4살 때부터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인도에서 온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결심은 성장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어 인도 선교사가 되려고 자신을 준비시켜 갔다. 오지 선교부에서 일하는데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학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2) 대학, 신학교에서 훈련받으며 한국의 최초 선교사로 파송받기까지
호레이스는 1877년 뉴욕 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생활 동안 델타 입실론(Delta Upsilon)이란 선교단체에서 활동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5시간만 잠자고 19시간을 공부하고 일했다. 뉴브룬스위크의 가장 큰 네델란드 개혁교회 담임목사인 이스튼(Dr. Easton)이 부목사로 쓰자 그는 주일 하루에 일곱번 예배에 참석하며 목회를 배웠다. 신학교에 재학 중일 때 구세군과 함께 가두 집회나 실내 집회를 개최하여 설교를 하면 돌아다니곤 했다. 언더우드는 열정적으로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그리스도인이면 교파를 초월하여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연합 사역을 원했다.
언더우드는 공부하는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돈 씀씀이가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호주머니는 금방 비게 되었고 다음 식사 한 끼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통해 조지 뮬러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 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믿음은 확고했다. 하나님에 대해 신뢰했기 때문에 한 순간도 걱정하지 않았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도 언제나 명랑하고 침착했다. 잘 될거야! 라고 그는 단언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대학 시절 궁핍하게 살아가던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 전날 저녁 교회에서 긴히 쓸 곳이 있어서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다 내어준 다음 날이었는데,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와 오랫 동안 친하게 지낸 교수 한 분이 방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손만 내민 채 그의 손을 잡더니 얼마 동안 살기에 충분한 돈을 쥐어 주고는 도로 가버렸다.
또 그는 사역자로서 일하면서 사례비를 받지 못해서 1882년 여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장사를 했는데 돈도 잘 벌고, 친구도 많이 사귈 수있었다. 뉴저지의 농부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책장사에 성공한 것을 알고 있는 한 자매는 그가 한국에서 사람들이 신앙서적을 비롯해서 다른 책들을 많이 사간다는 말을 듣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에 몹시 추운 겨울에 연탄이 끊어진 적도 있었다. 서울의 상인, 광산, 혹은 항구 어디에도 연탄을 구할 수 없었다. 그 귀한 연탄이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그는 태연했다. 마지막 연탄이 다 떨어지기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석탄이 공급되었다. 한번은 왕이 궁중저장소에 있던 연탄을 넘쳐날 정도로 갖다 준 적도 있었다. 몇 년 후 또 한번은 항구의 한 거래상이 비축해 놓은 것이 조금 있어 매맞춰 보내준 적이 있었다.
신학교 마지막 학년인 1883년 여름 동안에 그는 뉴저지주 폼프톤(Pompton)의 한 교회를 담임했다. 그가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는 재정적인 면에서 반발이 있었다. 당회가 선교지에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언더우드의 사례도 지불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이 확고해졌고, 의예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해외선교열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신앙적이고 진취적인 미국 젊은이들 중에는 해외선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1880년에 시작된 미국의 전국신학교연맹은 이같은 선교열을 더욱 구체화. 조직화시 켜 주어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남장로교의 초대 한국선교사들도 이 연맹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1884년 11월 그는 목사안수를 받았고 인도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1년간 공부했다.
1883년 초 앨트먼(Rev. Dr. Altman) 박사는 장로교 뉴브룬스윅 신학교의 선교지망생들을 모아놓고 최근 서양각국가 조약을 맺고 개국하기에 이른 은자의 나라 한국에 관한 글 한편을 읽어주었다. 복음을 받지 못한 1천 3백만명에 대한 이야기... 1882년 슈펠트 제독과의 조약체결(한미수호조약)로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교회측이 무관심하여 1년여를 거저 보냈다는 이야기... 거기 갈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도 시기상조라는 말을 내세우고 있을 때 언더우드는 왜 네가 가지 않느냐'?"는 말씀이 가슴에 울려퍼졌다.
1883년 알렌이 한국에 도착하기 일년 전, 한국 정부는 서울에서 성경을 판매한 그리스도인 중국 병사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체포되었지만, 권력있는 친구의 덕택으로 사형은 모면되었다. 일본은 어느 정도 빛 가운데 들어왔지만, 중국은 무섭고 어두운 무지의 나라였다. 더구나 한국은 그동안 교육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조차도 백이면 백 모두가 들어본 적고 없고, 어디에 있는지 추축도 해 보지 않은 나라였다. 이 청국 군인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서울에 파견된 자로, 도착 즉시 전도를 시작했다. 그의 석방은 마건충으로 추측되는 기독인 청군 장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언더우드의 형제들은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한다면 최소한 영국에 가서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1884년 여름 언더우드는 대서양을 건너 삼촌, 숙모, 사촌들을 짧은 기간 동안 방문했다. 그러나 사촌들 가운데 인도에 둘, 아프리카에 하나, 호주에 하나, 그리고 곧 브라질에 갈 사람이 하나 있을 정도로 영국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휩쓸고 다녔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은 언더우드의 일에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3) 당시 한국에 대해 그가 들은 이야기
언더우드의 삼촌은 에드워드 존스 목사는 런던 선교회 총무였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간다고 하자 그곳에 거의 20년 전에 그 선교회에서 토마스 목사를 보냈는데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장사만을 위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위험을 냉정하게 받아들였다면서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 낙심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말도 모르고 낯선 일본인 집에서 자는데 <만세 반석>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와 기도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었다. 로마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라든가, 한국인의 야만성이라든가,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지저귀는 새도 없으며, 한 포기의 꽃도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갑신정변 때 혁명가들과 일본인들이 간신히 항구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당시 한국은 길이 협소해서 우기만 되면 말의 배에 두른 안장띠까지 흙투성이가 되어버리는 실정이어서 통행이 불가능했다. 개천에는 시궁창 물이 흐르고, 작은 초가집이나 기와집들이 이었고, 넓은 마당이 있는 양반의 저택 그리고 궁궐이 있었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 살았는데 지하실도 없었고, 창문에는 창호지를 발랐을 뿐이었다. 가끔 호랑이와 표범이 성 내에 나타나기도 하고, 방충망이 없어서 모기와 파리떼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천연두, 이질, 설사와 장티푸스, 발진티푸스가 자주 발생했고, 이런 병에 걸려 죽는 외국이 많았다.
한국인들은 온갖 종류의 미신을 믿고 있었다. 무당들이 집안 일에 깊이 관여하여, 생일을 맞았을 때나 병들었을 때,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무당을 불렀다. 무당들은 절대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힘을 가지고, 백성들뿐만 하니라, 통치자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귀신, 도깨비, 조상의 혼 등 눈에 보이지 않은 두려운 것들에 대한 미신이 하층민들이나 여자들뿐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가득 차 있었다.
키플링(Kipling)이 쓴 인도의 오지에 근무하는 서양인의 이야기 <민간인과 군인의 삶>(Tales of Civil Service and Army)라는 책에 보면 서양 선교사들은 이렇게 문명사회에 접촉할 기회가 없는 외딴 오지에서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일시적으로 나가있어야 하며, 적어도 5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선교활동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건강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4) 초기부터 한국어 학습과 전도에 열정적이었던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임오군란때 민비를 보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1882년 말 일본에 유학했다. 그때 일본의 유명한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인 쯔다센(律田仙)으로부터 기독교를 소개받아 1883년 세례를 받고 제3회 일본 기독교인 친목대회에서 한국어로 대표 기도를 하여 참석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를 요코하마에서 간행했고 1885년에는 한글성경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번역 간행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2달간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운 후 이 한글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같은 배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부인이 임신중이고 한국정세가 불안하다는 미국 공사관의 요청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한국은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교사의 신분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입국한지 3일후 설립된 광해원(알렌이 민역익을 치료한 공으로 병원 설립을 허락받았다)에서 약제사로서의 일을 시작했고,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선교부 재정을 맡았으며, 1886년 3월 29일 광해원이 제중원이 되자 제중원 교사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제중원 교사의 직함은 어디나 통했기 때문에 선교사업을 하는데 유리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배운지 1년만인 1886년초 서양인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 했고,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었고, 간단한 소책자도 출판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한국어를 배우는데 할애했으며, 저녁마다 정기적으로 그의 교사인 한국인 친구들을 접대하였고, 이상한 새로운 소리를 들으면서 먹고 마시는 가운데 가능한 빨리 한국에에익숙해 지려고 노력했다. 이미 그는 사전과 다른 한국어 학습서를 준비했다.
한국어를 약간 알게 되자마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골목길이나 샛길로 나가거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나 약수터 옆에 있는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가서 책을 한권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질문을 하면 그 책과 진리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을 했다. 후에 보다 큰 거리나 마을에서 모임을 열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가두 예배당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국에는 극장이나 강연장이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집회에 익숙지 않았고, 사랑방을 사람들 만나는 장소로 자주 이용했다.
언더우드가 어느 집에 심방가서 음식 대접을 받는데 사람들이 별 희안한 인간도 다 있다고 구경을 했다. “저게 밥도 먹을줄 아네!” “예, 제가 국도 먹을줄 압니다.” “어, 저게 말도 할줄 아네!” “예, 제가 글도 쓸 줄 압니다.” 언더우드와 한국인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알렌의 한국어 교사인 노경춘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노경춘은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자신은 영어를 배우러 왔다. 읽기만 해도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른다고 말했는데도 알렌의 서재에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복음서를 훔쳐서 몰래 읽었다.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 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1886년 7월 11일 노경춘은 몰래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는 처음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여관에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알렌의 빈축을 산 일도 있었는데 어디서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거의 1.6km 밖에서까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게다가 전도에 열정적이서 모든 면에서 장로교 선교사답지 않게 보였다. 언더우드는 “고래고래 소리치는 감리교인(the Roaring Methodis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남한 최초의 교회라 할 수 있는 새문안교회는 한국의 신자 14명과 함께 1887년 9월 17일 시작했다. 이들 중 13명은 로스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이었다. 놀랍게도 창립후 1년후 교인은 50명으로 늘어났고 1889년에는 263명, 1901년에는 401명으로 늘어났다.
언더우드는 여러 번에 걸쳐서 한국 내륙 깊숙이 전도여행을 했다. 가는 곳마다 광적인 호기심으로 사람들은 언더우드를 대했다. 사람들은 언더우드를 환영했다. 그는 가지고 간 복음서를 모두 팔 수 있었으며, 머무는 곳에서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주로 여행수단은 조랑말이었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파송 만주 선교사인 로스와 맥킨타이어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서상륜은 동만주, 사만주 일대에 복음서를 나눠주면서 전도했고, 의주에서도 한동안 동일한 활동을 했다. 그는 그후 자기 고향인 황해도 소래마을에서 복음서를 나눠주며 전도하여 20명 가량이 매주 모였다. 로스가 만주 사정 때문에 세례를 주러오지 못하자, 그는 1886년 서울에 와서 언더우드에게 자기 마을에 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1866년 7월 11일 언더우드는 소래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후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을 방문했고, 제2차 전도여행(18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는 명동성당이 궁궐보다 높게 지어지는 것에 반감을 가진 왕실이 1888년 4월 전도금지령을 내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후 5월에서 9월까지 학교에서 아침예배와 주일예배가 금지되었고 신자들은 공포에 싸여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불태웠고 종교의식도 행할 수 없었다.
금지령이 내려진 두달 후 일종의 외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외국인에 대한 헛소문에 기인하였다. 외국인들이 한국인 악질분자를 돈으로 매수하여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으며 그 눈알을 빼어다가 안경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내다가 양약을 만들어 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은 아이를 잡아먹는 도살장이고 공사관은 아이를 먹는 곳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격분한 군중들은 외국인들에게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외국인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에 미국 공사 딘스모어는 외아문 독판 조병식에게 공문을 보내어 허무맹랑한 헛소문에 대해 정부의 조처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며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의 태도는 신중하였다. 북부지방 여행시 소환결정에 신속히 응하였고 애기소동이 있을 때에는 출근하는 호튼여사를 호위하며 가마에 숨기기도 하였다. 기독교 전도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한국정부의 명령에 순응함으로써 관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이미 약혼한 여자가 있었으나 선교사로 한국에 간다고 하자 파혼을 당했다. 결국 한국에 들어와서 1889년 3월 30세때 자기보다 8살이 많은 릴리아스 호튼(Lilias S. Horton) 양과 결혼을 했는데 이때 신혼여행으로 3차 내륙전도여행을 했다. 이때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을 방문했는데 그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때 의주 교인 33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지역에서 세례를 주었다. 내륙전도여행은 아펜젤러가 1887년 4월 13일 헌트(J.H. Hunt)와 함께 시작했는데 언더우드도 역시 내륙전도여행에 힘썼고, 언더우드의 부인은 가마타고 한국내륙을 여행한 최초의 서양여인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구령이 열정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발견된다. 한번은 새로운 개척전도지 안산읍 발왈 장터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한 사람이 불치병을 얻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는데 아마 신장계통의 병을 얻어 소변이 배출되지 않아 부어오른 것 같았다.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부모가 무당을 불러 굿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아버지가 70노인이었다. 전도했더니 내 아들만 살려주면 나는 무엇이든 믿겠소이다. 노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무섭게 언더우드가 말했다. 당신 아들이 죽을지 살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예수 믿고 그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때 예수 믿는 그 마을 사람 몇이 들어와 언더우드에게 인사하자 노인은 언더우드에게 당신이 원하는대로 무엇이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해주시오 하고 부탁을 했다. 언더우드와 같은 동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환자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자 그는 믿겠습니다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부터 언더우드와 함께 있던 교우 2명은 금식하며 3일 밤낮을 그곳에 남아 쉬지 않고 기도했다. 3일째가 되던 날 붓기가 가라앉기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에 붓기가 다 사라지고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그런후 그 집에서 귀신을 숭배하던 모든 것들을 다 부셔버리기 시작했다. 이 일로 그의 전 가족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언더우드는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신유를 경험하게 된다. 오, 주님! 언더우드가 가졌던 그와 같은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우리 모두가 본받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들에게도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와 같은 신앙이 있게 해주시옵소서.
한번은 임종이 가까운 사람에게 최대한 복음을 전했다. 언더우드는 발왈장터를 떠나 새로운 개척지 들목을 향해 떠났다. 그곳에서 형제 하나가 얼마 앓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었다. 함께 기도하며 마지막 순간에 위로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를 위로했다. 언더우드가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거의 의식이 없었으나 잠시후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언더우드의 깊은 열정과 죽음의 순간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젊은 영혼과의 만남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한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긴장감 속에서 언더우드는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천국복음을 증거했다.
그 젊은이는 그 짧은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고 죽기 직전 하늘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게되었다. 잠시후 의식을 되찾은 그 젊은이는 언더우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건너 수많은 색깔로 채색된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아치문의 길이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무지개와 같습니다. 아치 너머에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 문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제가 가야 하니 창문과 문을 열어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그 젊은이의 얼굴표정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이 가득했다. 그가 요구하는대로 누군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자 그는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언더우드와 그곳에 모인 이들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현장에서 극적인 장면을 목격한 언더우드의 고백대로, 그것은 승리의 입성이었다. 언더우드와 그 일행은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께 감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의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선교사들의 나이가 모두 20대였고 이들 젊은 선교사들을 이끌어 나갈 인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감리교의 경우는 일본에 있는 원로 선교사인 맥클레이 목사의 지도를 받아 충돌이 잦지 않았으나 장로교의 경우는 선교사들을 이끌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알렌과 헤론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전도 방식을 택했지만, 언더우드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전도 방식을 택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관에서 언더우드는 알렌과 헤론과 충돌했다. 알렌이나 헤론은 공개적인 전도를 꺼렸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나 언더우드의 방식에 의해 신자의 수가 급증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목사였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헤론이 1890년 7월 사망하자 알렌은 미국공사관 서기관에 발탁되어 주한 미국변리공사겸 총영사 등의 외교관으로 변신함으로써 선교부를 떠났다. 그후 1905년까지 알렌은 한국에서 활동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언더우드는 결국엔 자신의 방식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공사관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교육이 법에 위배된다고 선교활동을 제한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국정부와의 문제보다 미국공사관 때문에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5) 순회전도여행의 결실
당시 전도방법은 순회전도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자가 생기면 그곳에 '선교지점'을 마련하고 '선교거점'과 연락하도록 하고 주일이면 예배를 위해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모이게 하였다. 이것들은 교회'라기보다는 '회중'이었으며 조직되지 않은 신자들끼리의 모임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선교거점'과 '선교지점'을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고 신자들을 돌보며 다스렸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1906년 통계에 의하면 3,621명의 신앙고백자, 15,079명의 준교인, 정규교인 16,000명, 그밖에 6만명의 구도자가 생겼고 619개의 자립교회, 344개의 학교가 세워졌으며, 334개가 완전자립되어 등록된 학생 수는 7,504명이나 되었다.
1909년에서 1910년에 걸쳐 '백만구령운동'이 일어났을 때 언더우드는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의 의장으로서 이 운동의 책임자가 되었다(당시 조선의 교인 수는 약 20만명 정도였다).
언더우드의 전도여행은 국내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1891.4-1893.2) 미국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미국에 조선의 실정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이 여행을 통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91년 10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강연, 10월 내쉬빌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 강연은 신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강연으로 테이트, 존슨, 레이놀즈, 젼킨 등이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캐나다에서의 강연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 R. Avison)으로 하여금 조선으로 오게끔 한 기회가 되었다. 애비슨은 한국에 와서 제중원을 맡았다.
1905년에 이르러 언더우드는 심한 질환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하여 스위스로 갈 것을 권유받아 1906년 7월 동남아 코스로 지중해를 거쳐 스위스에 도착하였다. 1907년 4월 병이 호전되자 프랑스 '파리'로 가서 형의 회사인 '언더우드타이프회사'의 지점을 잠시 운영하였다. 지배인이 파리로 돌아오자 스위스로 건너갔다가 조선으로의 환국을 준비하였다. 이즈음 미국을 방문한 그는 선교본부를 찾아가 조선에 대한 선교를 역설하여 1907년 10월 29일 실행위원회가 열려 한국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충원과 선교비의 지원을 요청하여 선교부는 기부금 모집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뉴욕과 시카고, 신시내티 등지로 여행하며 1907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한국의 호소'(The Call of Korea, 한국개신교수용사로 번역됨)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909년 초겨울에는 미국 서부를 여행하였고 1910년 5월 17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기부금은 평양의 중학교, 신학교, 병원, 강계와 선천의 학교와 병원, 서울의 학교와 조선성교서회, 청주의 병원등에 보내졌다. 그는 평양에서 연차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시베리아를 거쳐 8월에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6) 다방면에 걸친 활동과 죽음
언더우드는 경신학원을 설립했고, 연희전문을 설립하여 교육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어 학습에 관심이 많은 그는 초기부터 사전 편찬을 시도했다. 또 로스나 이수정의 번역이 사투리가 많고 언해식이라 불편했기 때문에 아펜젤러와 함께 한글성경을 번역하여 문맹퇴치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찬송가를 간행했다. 신문을 발행하고, YMCA를 설립하기도 했다. 교도소 선교에도 열심을 내어 큰 결실이 있었다. 또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에 네비우스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여 한국 교회가 초기부터 자립적인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후 일본 정부는 언젠가부터 일본어를 하지 않으면 교육사업을 할 수 없게 했다. 1916년 1월 일본에 건너가 하루 9시간씩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던 중 과로하여 3월에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 회복이 되지 않자 4월 5일 경 미국으로 돌아간다. 9월에 병원에 입원하여 1916년 10월 16일 오후 3시에 소천했다.
한국과 한국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일생은 한국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불타는 선교에의 열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개화기 풍전등화와 같던 한국의 큰 빛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했고 그 안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들의 열정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오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력히 지시하고 있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는 "한 역사적 인물을 당시 시대상황과 완전히 유리시켜 평가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전제하고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의 기독교뿐 아니라 서양문화 도입에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마디로 한국근대문화는 그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했다.
7) 언더우드 약력
1859 런던 출생
1872 전 가족 도미
1881 뉴욕대 졸업 뉴브룬스윅 신학교 졸업. 한국선교사 임명받음
1885 일본 거쳐 제물포 도착. 광혜원에서 일하며 한국어 연마
1886 고아원설립 노도사에게 세례. 구세학당 창설(현 경신중고 전신)
1887 1차 전도여행(소래 평양 의주). 새문안교회 창립
1889 '한국어문법' '한영자전' 간행. 예수교 성교서회 창설. 호튼양과 결혼. 2차 전도여행 (압록강 세례 집전)
1890 1차귀국 (한국실정 알리고 선교사 파송 요청). 92년 귀한
1893 한국 첫 찬송가 출간
1895 '춘생문사건' 발발
1897 '그리스도 신문' 창간
1900 기독청년회 조직
1901 2차 귀국(안식년)
1903 기독청년회 회장 피선
1906 건강 악화로 3차 귀국
1907 조선장로회 독노회 창립
1908 귀한. 대학설립 계획. 'The Call of Korea'출간
1910 'The Religion of East Asia'출간
1912 조선장로교 총회 창설. 휴가차 일시 귀국(4차)해 대학설립자금 모금
1913 조선장로교 총회장에 피선
1915 연희학원 설립
1916 건강악화로 귀국. 10월 별세
1927 새문안교회에 기념비 건립
1928 연희학원 교정에 동상 건립
8)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2.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소서"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의 방한 첫 기도다.
1) 성장과정
그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스위스계 독일인이었다. 어머니는 독일어 밖에 몰라 가정에서는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을 읽었다. 어머니는 성경을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아펜젤러는 독일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해하는 어학의 천재였다. 사범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랭카스터에 소재한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다녔다. 우등생이었고, 운동선수와 지도자로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재학 시절 사범학교 때 조직했던 모임을 YMCA로 개편해서 발전시켰다. 대학에 다니면서 교직 생활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후 드류 신학교를 다녔는데 희랍어를 너무 잘했다. 결국 언어에 대한 그의 재능은 성경을 번역하는데 한몫을 하게 만들었다.
집안은 원래 장로교였고 그가 18세 때 신앙적으로 결정적 회심을 한 것도 장로교회에서였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면서 여러 신앙유형을 접하게 되고 결국 오랜 갈등과 기도에 감리교로 옮겨간다. 이 결단은 나중에 언더우드와 교파를 초월해서 연합활동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로버트 맥클레이 선교사에 의해 한국선교적임자로 뽑힌 사람이 신학교 시절 그의 동창생이었던 워즈워스와 스크랜톤 의사였다. 그러나 워즈워스가 한국행을 포기하자 대신 아펜젤러가 가게 되었다. 약혼자인 엘라 닷지(Ella J. Dodge) 양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이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 결국 1884년 12월 17일 결혼하고 대대적인 드류 신학교 교수와 동창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파송받았다. 부부를 태운 기차가 출발할 때 신학교 재학생 전원이 역까지 나와 찬송가를 합창하면서 열광적으로 환송했다. 예일대, 뉴욕 의대를 졸업한 스크랜톤 박사와 일행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은 선교거점인 일본으로 갔다.
2) 입국 초기의 상황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때 그는 갓 결혼한 27세의 새신랑이었다. 아펜젤러가 평생 선교동역자 장로교의 언더우드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에 오기 두해 전인 1883년 하트포트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연맹 집회에서였다. 그리고 이 집회를 계기로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사실 두 사람의 친분관계로 후일 한국에서의 장․감 양 교파 선교구역 분할도 큰 마찰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전도여행과 교도서 선교, 성경 번역 등 많은 사업을 함께 해 나갔다. 그러나 입국 직후 두 사람의 형편은 완전 상반된 것이었다. 언더우드와는 달리 아내를 동반했다 는 이유로 아펜젤러는 인천서 일주일을 머무르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지 채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서울의 정세는 불안하였고 외국인 여성의 입국은 무리라는 미국 대리공사 폴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우리정부(미국)의 대표자들은 우리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10년후에 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봐 한국인들보다 더 염려하고 있다"
3) 교육사업과 전도, 성경번역, 청년운동에 힘쓴 아펜젤러
사실 선교사들도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부응, 적극적인 전도활동에 앞서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19일에 재 입국한 아펜젤러도 우선 교육사업부터 시작한다. 폴크를 통해 "고종황 제께서는 당신이 한국사람의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니 대단히 고마운 일이라 말씀하셨다"는 전갈을 들은 아펜젤러는 사람들이 눈빛도 다르고 키도 큰 서양인을 두고 "무슨 동물이 진화되어 그렇게 되었는가 했지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했던" 상황에서도 우선 8월부터 스크랜튼이 소개한 이겸나, 고영필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출신들이 외국공관 통역으로 기용되자 학생들은 점차 늘었고 이듬해 6월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으니 오늘날 배재학원의 전신이다.
1887년부터 보다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개시했다. 부활절에는 한국에서 출생한 첫 외국인인 그의 맏딸 애리스와 일본대사관 통역관 다카히라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어 배재학당 학생 2명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이 해에 한국감리사로 임명된 그는 선교본부에 학습인 1명, 원입인 1백명, 주일학교 30명, 학교학생 30명을 보고할 수 있었다. 아직도 종교자유령이 내려지지 않았고 한국인 기독교인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 라는 1866년 이래의 법령이 유효한 때였다.
또 정동에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물인 벽돌집(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세워 학교로 사용하였고 인근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교회로 삼았다. '벧엘예배당'에서 10월9일 처음으로 정식예배를 드리니 바로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1888년 4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 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 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전도여행을 통해 소래와 의주 교회 등을 보고는 한국 현지인을 통한 전도가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고 1888년 정동교인 2명에게 개신교 첫 전도사 증명서를 주었다. 이때 임명된 유치겸은 1892년 수원, 공주, 대구, 전주 지역에 파송하여 1년여 동안 책을 팔면서 전도했다. 또 한 사람은 나중 정동교회 2대 목사가 된 최병헌이다.
그는 교도소 선교에도 힘을 쏟았다. 특별히 교도소에 있던 이승만을 돌봐주어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아펜젤러의 제자로 사제관계 이었고 서재필이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게 되면서부터 이승만은 또한 그의 제자가 되어 만민공동회에서 활약하다가 만민공동회에 대한 총 검거령이 내려지고, 1899년 1월 체포되어 6년 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렇게 이승만이 옥살이를 할 때에 아펜젤러가 찾아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1899년 12월 28일자 일기에 이승만으로부터 받은 두 통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오늘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약 11개월 전에 서울에서 스크랜톤 의사와 함께 걷고 있다가 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권력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였는데, 사복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의 체포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풀려나올 바로 그 무렵에 탈옥하라는 설득을 받았으나, 도망하는데 실패하여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성탄절에 나는 침구를 약간 보냈는데, 아래와 같은 답장 받았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1899. 12. 28. 받음
·제 부친께서 편지로 선생님의 크신 도움에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 집이 아주 곤경에 처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황량한 겨울이기 때문에 이곳 어둡고 축축한 감방은 요즈음 너무나 춥습니다. 대부분의 수형자들은 의복과 음식, 그리고 모든 것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선생님의 자비로 저는 지금 옷이 충분하며, 그래서 추위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1900. 2. 6.받음
·사모님(Mrs. Appenzeller)께 새해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친의 편지를 통해서 선생님의 소식과 선생님께서 저를 풀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신다는 것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이승만을 백방으로 도와주고 가족까지 보살펴주려고 노력한 것은 아펜젤러의 제자에 대한 사랑의 발로이기도 하겠으나 그 보다도 만민공동회의 일원이었던 이승만이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전도하려는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과 신흥우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좋은 영향을 받은데다 동료 김정식이 무디의 설교집을 읽고 거듭난 간증을 하자 이상재도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다. 아펜젤러, 게일, 벙커, , 헐버트, 언더우드 등의 교도소 선교를 통해 개화파 지식인들 윤치호, 김정식, 이승만, 유성준, 이원긍, 이상재,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등이 변화되었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지원했으며 배제학교가 독립군의 도피처 내지 모임 장소가 되는 것을 묵인했다. 그는 또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활동을 지원하여 명목상 독립신문의 편집자로 되어 주기도 했다. 서재필이 한국에서 추방되자 윤치호를 통해 독립신문 발행을 하도록 돕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의 정치에 관여하는 문제로 주한미국공사관과 마찰이 있었고, 압력을 느꼈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변함없었다.
그는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닫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887년 언더우드, 게일, 존스와 함께 분담하여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성경을 번역했다. 90년에는 언더우드 등과 협의, 「한국성교서회(기독교서회 전신)」을 창설했다. 3년 동안 그는 너무 심혈을 기울어 번역하느라 머리가 노인처럼 하얗게 백발이 되었다. 결국 1900년 9월 9일 서울제일교회에서 신약성서 완역 기념예배를 드렸다. 현지인 전도사나 현지어 성서번역은 초기 선교사들의 전략적 탁견으로 오늘날 한국 의 해외선교사업에서도 유념할 대목이다.
한편 아펜젤러는 한국청년운동에도 큰 공을 남겼다.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1896년)한 서재필과 손잡고 기독교청년운동을 벌였으며 독립협회 운동도 적극 후원하였다. 1897년 정동교회 안에 엡워드코 청년회를 조직했고 99년부터는 언더우드와 함께 YMCA운동을 주도, 1901년에는 배재에 최초로 학생YMCA가 설립되기도 했다.
4) 군산 앞바다서 생애 마감
1902년 성서번역자회 참가차 조사 조한규, 목포출신 정신여학교 학생과 함께 일본상선을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안개로 배가 침몰하여 그의 열정 어린 한국선교 18년의 종막을 고한다. 그 배에서 살아남은 미국인 탄광기술자 보울비가 '물에 잠기면서도 함께한 비서와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할 뿐이다. 이 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1남 2녀 자녀 모두 뒤를 이어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역시 이화학교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 정동교회에 아펜젤러 기념비가, 1989년 배재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5)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너무 과로한 탓에 나이 40에 노쇠현상을 보였다. 그런데도 선교본부에 “나의 편의를 봐주려고 하지 말고 더 어려운 임무를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건강이 아주 나빠지자 부인의 주선으로 휴가가 허락되었다. 1900년 12월 23일 뉴욕에 도착했다. 폭싹 늙은 아펜젤러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국에 가지 말고 미국에서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내 몸은 이미 한국에 바쳤어. 나는 고국에서 보다는 한국에서 더 필요한 사람이야.”
그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는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은데 나의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나의 야망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라고 아펜젤러에 대해 썼다. 1898년 배재 학교에 대한 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학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생은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은 마땅한 일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도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있으며, 우리가 가르치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일하고 있는지 기본 원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라고 썼다.
6) 아펜젤러 약력
1858 미국 펜실베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출생
1877 웨스트 체스터 주립 사범학교 졸업
1882 Franklin and Marshall College 졸업, 가을에 Drew Theological Seminary 입학
1884 Ella J. Dodge양과 결혼, 12월 말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85년 4월 5일 한국 도착, 6월 20일 재입국
6월 28일 외국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공식 예배인도
8월 소유지 구입하고 영어학교(배재학당 전신) 시작
10월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성경번역 착수
11월 19일 첫딸 Alice를 낳음
1886년 6월 8일 영어학당(배재학당) 첫학기 공식 개강
여름 서울에 콜레라 만연
7월18일 언더우드 목사에 의한 한국인 최초의 세례식(노경춘)에 참
석해서 도와줌
11월 6일 Union Church 목사로 피선됨
1887년 2월21일 "배재학당" 이름을 하사받음
3월14일 "배재학당" 헌판식
4월13일-5월12일 헌트와 평안도지방 전도여행(평양까지)
감리사로(superintendent)로 임명됨(-1892)
상임 성서위원회 및 번역위원회 우원으로 성서번역사업 계속
7월24일 최초의 감리교인(박중상)에게 세례를 줌
9월 예배처소(벧엘교회) 구입, 배재학당 건물 준공식
10월 9일 한국인 최초의 공중예배(벧엘 교회당)
23일 한국인 최초의 성찬식
26일 두 명의 권서인을 북부지방으로 보냄
12월25일 한국어로 첫 설교를 행함
1888년(30세) 배재학당 완공. 교장으로 이후 줄곧 봉사함
봄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여행(전도금지령으로 소환)
10월 평안도 의주까지 전도여행
가을 배재 제본소 개설
1889년 8월 죤스(Jones)와 함께 부산까지 전도여행
1890년 1월 종로서점 설치
1890년 6월25일 '대한성서공회" 회장으로 피선됨
1891년 인천지방 상주책임자로 임명됨
1892년 6월 안식년 휴가, 감리사직 사임(후임에 스크랜튼) 이듬해 7월 귀임
1895년 존스(Jones)와 함께 월간지 「한국유기」(The Korean
Repository)를 속간(-1898, 12)
1896년 8월 독립협회 창설
1897년 2월 6일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The Korean Christian Advocate)
를 창간하고 편집인 맡음
8월13일 독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
12월26일 정동 제일감리교회 헌당예배
1898년(40세) 서재필 퇴거로 윤치호와 함께 「독립신문」 편집
9월 블라디보스크 여행(건강상 휴가)
12월 감옥에 있는 이승만 도와줌
1900년 영국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 사서로 일함
9월 9일 신약성서 완성 감사예배
9월28일 안식년 휴가 차 출발
10월 1일 부친 사망(9월 8일0 소식 들음
12월22일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미국에 도착. 「북감리교의 한국
선교」 집필
1901년10월 귀임
1902년(44) 5월에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됨
6월 1일 무어(Moor) 감독과 함께 무치내 교회에 예배차 가던 중 일
본인 철도노동자들과 충돌사건 일어남
6월11일 성서번역 모임(실행위원 공독회)에 참석 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안식함
3. 스크랜톤 부인(Mary F. Scranton)
아들인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박사와 함께 초기 감리교 선교사 중의 하나였던 스크랜톤 부인에 대해 알아보자.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여자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외아들인 스크랜톤 의사 부부는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1885년 4월 5일 도착한 직후인 1885년 6월 20일 손녀까지 데리고 들어왔다. 당시 여자 교통수단은 4인교 내지 가마인데 이것을 타고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은 저녁이면 4대문을 닫았고 아침 4시 보신각의 종이 32번 울림과 동시에 대문이 열렸다. 저녁 9시면 다시 보신각 종이 28번 울리면 문이 닫힌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서 일종의 유폐생활을 했다. 그해 11월 1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를 낳자 너무 추워 스크랜톤 부인이 밤새도록 그 아이(앨리스)를 품에 안고 재우며 밤샘을 했다.
스크랜톤 부인은 이화학당을 열었다. 4인교가 와닿더니 김씨 부인이라는 젊은 부인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해서 받아주었다. 김씨 부인에 이어 가난하여 어머니가 데려다 별단이를 맡기자 그녀가 이화의 첫 학생이 되었다. 당시는 서양 도깨비가 학교를 운영한다고 했기 때문에 여학생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다 명성황후 민비가 1886년 ‘이화’라는 학교명을 내려주고, 기수까지 보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수는 왕이 극히 신임하는 신하에게만 보내는 것이다. 왕이 보낸 기수가 스크랜톤을 호위하며 따라다니자 부모들이 안심하고 학생들을 이화학당에 많이 보냈다. 당시 외서감변 김윤식 선생이 스크랜톤 부인이 학생을 얻지 못해 개교휴업상태인 딱한 상정과 당시 한국인들이 그들을 가혹할 정도로 기피하는 어려운 사정을 고종황제와 황후께 말씀드리자 고종은 맥클레이에게 교육과 의료 사업을 허락한 것을 기억하고 황후를 통해 호의를 베풀었다.
이화학당은 주일학교와 성경공부를 함께 했는데 1888년 35명 가량 참석했다. 스크랜톤 부인은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인 남자 선생이 설교했다. 교회를 짓고 1895년 6월에 남대문 부근에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황결예(황메래?), 하란사씨의 도움으로 구약을 공부하고, 세례문답을 공부하게 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울과 수원으로 전도여행을 했는데 이경숙 선생이 중심이 되었다. 이경숙 선생은 한국인 최초의 여성교사였다. 39세의 과부였는데 한국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화학당의 선생이 되었다.
이경숙 선생은 수원, 장지내, 도고개, 오천, 해매, 택선, 여주, 이천 등 꽤 넓은 지역에 가마를 타거나 도보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며 전도했다. 나중에 김활란 박사를 통해 이대생의 전도여행은 전통이 되었다. 이들은 전도하면서 생활 계몽까지 함께 했다. 당시는 음식과 방이 너무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크랜톤 부인은 이경숙 선생과 함께 김사라, 정한나 등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등 기초적인 훈련을 시켜 이들을 전도부인의 일을 하게 했다. 이화 출신 중에 황메래는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최초의 여성의학박사 박에스더가 탄생했다. 김활란 박사는 여성 박사 1호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