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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청주] 절망은 없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아가 3,1-4ㄴ
† 복음 요한 20,1-2.11-18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 젊은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찾는 애절한 마음을 시적으로 노래한다.
성읍을 돌아다니며 야경꾼의 눈에 뜨일 위험을 무릅쓰고 밤에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마침내 그를 만나 붙잡고 놓지 않는다(제1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녀는 주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 비로소
그분을 알아 뵙고 응답한다.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뜨거운 사랑’이 신앙생활에서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싶을 때면 이 여인,
곧 마리아 막달레나가 생각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만 그 형상을 얻는다.’는 신학 명제를 완성했습니다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만이 죽음마저 이기는 믿음에 이르게 해 준다는 것을 보여
준 생생한 증인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위대함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험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찾으려는 뜨거운 사랑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녀가 사랑한 이는 ‘아무’가 아니라 바로 한 분 ‘주님’
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결코 감상적이거나 유약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그 끈을 놓지 않고, 길을 찾지 못하였더라도
더듬어 끝끝내 찾으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점점 자라나고
강해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어느덧 마리아 안에는 ‘약함의 힘’이 자라나 있었습니다. 아가의 주인공인,
사랑에 눈떠 사랑이 죽음만큼 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은 젊은
여인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가에서 눈물을 흘릴지언정 절망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아가의 주제를 이렇게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가는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을 찾습니다. 연인의 얼굴을, 그의 현존을, 그
현존의 기쁨을 찾습니다. 아가에서, 우리가 찾는 분이 현존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흔들림 없는 희망에 기초한
‘추구’라는 주제를 보게 됩니다. 그 추구에서 생겨나는 ‘기다림’이라는
주제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십자가와 돌무덤
앞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어떻게 다시 만날지 그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번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 초조함, 기다림, 슬픔의 시간
동안 주님께서는 그녀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게 단련되었는지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녀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파견하시는 데서 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절망은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화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요한 20,1-2. 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2014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오늘 복음과 같은 장면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16,1-8 참조)을 보면, 주간
첫 날 이른 아침에 세 여인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요. 그런데 무덤을 찾아가면서 하는 걱정이
나옵니다. 그것은 누가 무덤 앞을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 줄 것인가였지요.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굴릴 수 없는 매우 큰 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걱정에 사로잡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향해 계속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중의 한 명이며 오늘 축일로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세상에 부활을 알리는 커다란 사명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어느 식당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먼저 남자가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가위로 자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래 이런 것 하지 않거든. 너니까 해주는 거야.”
그러자 여자는 수저통 속의 수저를 꺼내 앞에 놓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원래 이런 것 하지 않거든. 너니까 해주는 거야.”
‘너니까 해 준다’는 말.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해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소에 하지 않는 것이지만 해 줄 수 있다는 말이 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릴만한 힘이 없음에도 무덤으로
향했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그런데 위안이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굳게 믿고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의심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녀는 예수님을 드디어 알아보게 됩니다. 다른 일로
바빴던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 듣는 것에 익숙했던
마리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평소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어느 순간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간직하면서 주님께 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이니까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에게 예절바르고,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적이
되지 않는다(벤자민 프랭클린).
위대한 일보다는 선한 일을...(루돌프 슈테프텐브링크)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하게 될 모든 일에 앞서 이렇게 물었다.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점에서 유익한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뿐이었고 다른 사람의 안전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사는 동안 감정은 점점 더 메말랐고 삶의 기쁨은
현저하게 감소되었으며 그의 나날은 언제나 단조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또한 경직된 무관심이 그의 마음속에 넓게 퍼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던 어떤 여자를 만났다. 그는
그 만남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도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반드시 선한 정신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물결이 흐른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너는 날마다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선한 일을 행할 수는 있다.”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훨씬
내 영혼에 유익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위대한 일만을
행하는 자신을 꿈꾸고 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삼각형[단상]
2014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2014년 7월 22일) 사랑의 삼각형
완전한 사랑은 삼각형의 각 꼭지점인 열정, 헌신 그리고 친밀감이 온전히
정삼각형을 이룬 것이라고 합니다.
열정만 있는 사랑은 자기 혼자만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도취적인 사랑’이고,
헌신만 있는 사랑은 ‘공허한 사랑’이며, 친밀감만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만 하는 것’입니다.
또 열정과 헌신만 있다면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곧 실망하게 되고
헌신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얼빠진 사랑’이라 합니다. 그리고 열정과
친밀감만 있다면 ‘낭만적 사랑’이 되고, 헌신과 친밀감만 있다면 ‘우애적
사랑’으로 고착됩니다. 이것들은 다 부족하고 미완성된 사랑일 뿐입니다.
성숙하고 완전한 사랑은 친밀감과 열정과 헌신이라는 각 구성요소가
골고루 조합해 정삼각형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성숙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친밀하고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을
만들어 갔습니다. 실상 사랑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내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목말라하며 찾아가는 아픔입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노력입니다. 어쩌면 이 생을 마칠 때까지
온전한 사랑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감과 헌신과
열정의 정삼각형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이 여정을 계속 걸어가도록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글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 [서울] 시신 찾느라고 정신 나갔었지요.
2014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시신 찾느라고 정신 나갔었지요.
실종된 사람을 찾습니다. 주로 가족일 경우는 아주 심각합니다.
부모가 잃은 자녀를 찾는 것은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혼신을 다합니다.
시신마저 찾지 못하면 이는 더욱 정신조차 가다듬기 힘들겠어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 찾느라고 정신 나갔었지요.
자신의 영적 죽음을 살려주신 아버지 이상이었고 오빠도 살려주셨고요.
저도 실은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걸 예수님이 이렇게 살려주셨어요.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막달레나의 노래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사랑만이 죄를 제대로 알게 하고, 참된 회개와 용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2014년 가해 7월22일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화요일 복음묵상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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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
이 여인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했던 기쁜 소식,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고 깊은 죄를 지었는가 보다는, 얼마나 지은
죄를 인정하고 깊이 뉘우치며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청백리의 삶을 산다 한들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의 첫모습을 성모님이나 제자들이 아닌 바로 이 죄
많았던 여인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사랑만이 죄를 제대로 알게 하고, 참된 회개와 용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삶은 회개와 보속의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은 작년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에 묵상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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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의 노래
“여인아, 왜 우느냐?” (요한20,13)
1.나의 모든 삶은 저주였습니다.
어이 살아왔다고 입 밖으로 내기조차 싫은 삶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그저
몸을 파는 여자, 일곱 마귀 들린 여자, 죄 많은 여자라 불리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저주를 마감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2.군중의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쳐죽이라는 아우성 속에, 옷은 찢기고
머리채는 억샌 사내의 손에 잡힌 채로 돌팔매질 당할 장소로 끌려갔습니다.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었거든요.
차라리 이 피곤한 세상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3.그런데 당신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끌고 온 이들은 당신에게 나를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요. 당신께서는 아무 말 없이
계시다가 죄 없는 이가 먼저 돌을 던지라 하셨지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그 말씀에, 당신과 나만을 남겨두고 모두들 사라졌지요.
“너에게 죄를 묻던 이들은 어디 있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4.당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몇 날 몇 일을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잠이 들다 다시 눈이 떠지면 밑도 끝도 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찾아야 합니다.
5.어느 마을 권세 있는 집에 당신께서 식사를 하시러 오신다고 합니다.
향유 병을 들고 달려갔습니다.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또 멈추지 않는 눈물입니다.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젖은 발을 훔칩니다.
그리고 향유를 당신의 발에 발라드립니다.
6. 결심을 했습니다.
허락이 된다면 당신의 뒤를 따르면서 당신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내가 걸어온 죄의 길을
보속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저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7.감동입니다.
당신의 말씀에, 당신의 결정과 행동에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졌습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난하고 병든 이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힘든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모두들 행복해 했습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8.요즘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려옵니다.
9. 당신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제자들의 의견이 강합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고집을 굽히시지 않습니다.
10.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칩니다.
결국 당신께서 잡혀가셨다고 사람들이 전합니다.
그것도 제자였던 유다가 당신을 밀고했다고 합니다.
무섭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11.높은 계단 위에 당신께서는 고개를 떨구시고, 로마인 총독이라는
사람과 함께 군중들을 앞에 두고 서계십니다. 군중은 소리를 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모두들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12.사형이 언도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돌 맞아 죽을 뻔했을 때도 이리
두렵지 않았었는데,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설마, 당신께서 진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13.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관을 쓴 채 당신께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십자가 횡목을 지시고 비틀비틀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제자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웬일인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여지없이 채찍질이 날아옵니다.
오, 주여! 오, 주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면서 당신을 따라갑니다.
14.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당신을 눕히고 거침없이 양 팔뚝에 못질을
합니다. 그렇게 당신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가시고 말았습니다.
15. 당신과 함께 한 날들이 생생하게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내게 이제 살
이유는 없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 당신께서는
내 곁에 계시지를 않습니다.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16.사흘이 지났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동이 트기 전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에 당신께서 묻히신 돌무덤이 보입니다.
어디서 오는 슬픔입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아픔입니까?
17.슬픔 가득 안고 돌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보이지를 않으십니다.
곧바로 무덤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미치겠습니다. 당신께서 없어지셨습니다.
18.또 울음이 터져나옵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당신을 어디로 옮겨갔다는 말입니까?
19.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마리아야!” 소리치고 맙니다. “라뿌니! 나의 선생님!”
20.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당신께서 하셨던 말씀, 당신의 행동의 의미를
말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사랑이시여.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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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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