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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대신 무자비한 장맛비 속에 7월을 보냈습니다. 이러다 올 여름 냉해를 겪지나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해 보는 날보다 비 보는 날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잖아도 물가가 만만치 않은데 그 좋은 과일들이 잘 익어줄라나 걱정됩니다. 일단은 수량이 많아야 값이라도 내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행여 날씨로 인하여 흉작이 된다면 올 가을 과일 먹는 것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마가 7월에 다 끝난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팔팔 뛰어야 할 8월에까지 이월시키는지 모를 일입니다. 정말 하늘 보기 쉽지 않습니다. 뭔 여름이 이 모양이람!!
하기야 외출하는 날도 많지 않습니다. 나갈 때는 괜스레 걱정이 되고 두려워집니다. 행여 반갑지 않은 것을 받아 오는 것은 아닌지, 혹 나도 모르게 내가 건네주고 오는 것은 아닌지, 거 참!! 사람들이 곱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스파이도 아닌데 서로 경계를 해야 한다니, 이 무슨 경우입니까? 코로나19가 만들고 있는 해괴한 현상입니다. 너도나도 접근 금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반년이 훌쩍 지나갔는데 앞으로 반년도 이렇게 지나갈 듯합니다. 살맛 안 나네요.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때로는 시장도 나갑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영화에서도 못 본 사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8월에는 햇빛이라도 쐬고 하늘이라도 보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왕 살 바에는 건강하게 즐겁게 그리고 8월답게 팔팔하게 살기를 기대합니다. ^&^
2020년 8월 1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7-26주일설교(누가 알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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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
인생, 길입니다. 그냥 가는 거죠. 때로는 목적지를 알고 가고 또 때로는 모르고도 갑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니까요. 어떤 길을 가는지, 무슨 길을 가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혼자 갈 수도 있고 함께 갈 수도 있습니다. 함께 가다가 따로 갈 수도 있습니다. 또 혼자서 가다가 같이 갈 수도 있습니다. 같이 간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은 대부분 따로 놉니다. 길을 가며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이야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재밌다고 손뼉 치며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재미없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혼자서 흥얼대며 갈 수도 있습니다. 한가롭게 가다가도 때로는 급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온 길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잘못 왔나? 그러나 잘못 온 것은 없습니다. 단지 길을 잘못 들어설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한 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바꿀 뿐입니다. 새로운 길을 갑니다. 이 길이든 저 길이든 어차피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함께 가는 사람도 처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나눕니다. 마음이 맞으면 또 같이 갑니다. 아니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혼자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면 새로 사귄다는 것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길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게 때문이지요.
어른이 되어도 어릴 적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픈 상처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즐거운 추억으로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자라온 사람이라면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것들도 크고 나면 별것으로 간직하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시골을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조용한 풍경이 마음에 담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번화한 도시생활을 하며 간간이 동경하는 세계로 생각 속에 그려집니다. 더구나 그곳에 아직 부모님이나 친지들이 살고 있다면 날 잡아서 가보곤 합니다. 마음의 풍경을 현실로 불러옵니다. 그 공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까지 불러옵니다. 입가에 미소를 만들기도 하지요.
사람들과 일하며 바쁜 시간들을 보냅니다. 때로는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시골 어머니가 전화합니다. 좀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듣습니다. 가자! 자기 집도 아닌데 웬 난리람? 그러나 마음은 이미 부릉거립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 속에 힘들고 곤한 몸이 이미 날개를 답니다. 그래, 가자! 그렇게 해서 ‘스나다’와 ‘기요우라’ 두 여자가 시골로 달립니다. 그냥 신납니다. 도시의 번잡한 생각일랑 일단 접어두자 하는 마음입니다. 남편도 별다른 불평 없이 응해주니 다행입니다. 하기야 평일에도 붙어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바쁘게 살았으니 말이지요.
이상합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시계의 속도는 다르지 않을 텐데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속도가 더디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 적어서 그런가요? 도시에는 차들도 빠르고 사람들도 빠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운전하고 가는 승용차 외에는 차도 없습니다. 있어봐야 아주 드물게 봅니다. 사람도 드뭅니다. 가족들 외에는 떨어져 있는 가게에나 가야 만납니다. 아니면 저녁에 주점에나 가야 봅니다. 그래서인지 좁은 주점이 왁자합니다. 어디 떠들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요. 모처럼 사람들을 보았으니 반갑기도 하고 떠들 상대를 만난 것이 기쁘기도 할 것입니다.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모이면 그러는 것이지요.
아침에 일어나 목장(?) 구경을 갑니다. 이름이 목장이지 젖소의 감옥입니다. 말 그대로 조그만 우리 안에서 평생 주고 생명을 마치는 곳입니다. 우유를 주다가 아니다 싶으면 도축장으로 넘어갑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먹고 자고 싸고 한 평이나 될까 조그만 공간에서 한 생애를 보내야 합니다. 그곳을 떠나는 날은 생명이 끝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목적은 하나 우리 인간을 먹이기 위한 것입니다. 개체로서의 생명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것을 불쌍하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해봅니다. 움직이는 생명체인데 움직임이 극히 제한됩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생길까? 그 스트레스가 젖으로 나올 것이고 고기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하고 먹는 것일까?
도시의 시끄럽고 번잡스러움과 시골의 조용하고 한가로움, 과연 그렇게 대조될까요? 고요한 풍경은 있습니다. 시간조차 잔잔하게 흐르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들어오면 달라집니다. 시끄러워지고 혼잡스러워집니다. 아마도 그래서 윤리도덕을 만들고 질서를 세워야하는가 봅니다. 자연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자연은 흐르는 물처럼 그냥 내두면 됩니다. 가만있어도 춘하추동처럼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껴들면 조절해주어야 하고 또 조정하려고 서로들 싸웁니다. 가끔은 자연으로 들어가서 저절로 흐르는 것들을 보며 느끼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쉼이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결국은 나온 자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루 아워’(Blue Hour)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심은경 배우가 나오지만 일본 영화입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물론 국가의 안전이 백성 개인의 안전보다 우선합니다. 개인보다는 다수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 국가라는 테두리에 사실 국가보다는 제한된 권력의 이익이 숨어있다면 어쩌겠습니까? 소위 국가라는 거대 조직을 빌미로 사욕을 채우려는 의도가 숨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를 이야기의 소재로 하여 나온 영화나 드라마가 많습니다.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이야기도 만들어집니다. 아마도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겉으로 나타난 경우보다 훨씬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그 권력의 소유자가 사실을 드러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그냥 모르고 넘어갑니다. 소위 어쩌다 들통이 나야 알게 됩니다.
개인정보 보안이 우선인가, 국가의 안보를 위해 개인의 정보를 비밀히 침투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국가안보가 우선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생활을 함부로 침투해서 그 정보를 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기본권 우선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도청은 불법입니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안전을 빌미로 하여 마구잡이로 드나들며 개인의 생활을 침범합니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기야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평범한 시민이 자기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겠습니까? 사실을 알고 나면 살고 싶은 마음까지도 달아날 것입니다. 24시간 감시당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천지사방에 CCTV가 걸려있습니다. 물론 그 유용성을 인정합니다. 근래 범인 검거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범죄 예방에도 공이 크지요. 함부로 나쁜 짓을 하겠습니까? 누가 어디를 지나가는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만났는지 등등 다 나타납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의 삶을 다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모릅니다. 때로는 도난방지를 목적으로 자기 집안에도 설치해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목적이 있지만 어쩌면 스스로의 삶을 유출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킹당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연생태계를 녹화하려고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유명인사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국가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함부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반대하는 의원입니다. 그의 협조를 얻어 개인정보 수집활동을 가능하도록 하는 법률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기관의 고위인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국가의 안전을 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기 권력을 최대한 유지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듯합니다. 협력을 청했다가 만약 거부를 당한다면 그 뒤에 어떤 조처를 해야 할지도 미리 다 계산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위장 사고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생태계 녹화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멀리서 감시하고 있던 요원이 그 카메라 필름을 수거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가만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일을 추진했던 고위인사에게 보고하고 당장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필름을 수거해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 확인한 평범한 이 사람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고사로 보도가 다 되었는데 사고가 아닌 것이 필름에 담겨 있으니 말입니다. 섬뜩 위험을 감지합니다. 만약을 위해 복사본을 만들어 가지고 피해 도망합니다. 그러나 막강 권력이 모든 힘과 수단을 동원하여 추적합니다. 역시 만약을 위해 다른 사람 선물보따리에 슬쩍 넣어버리고 도주합니다. 얼마 가지 못하여 사고로 죽음을 당합니다. 아무리 뒤져도 그 사람에게서 테이프를 찾지 못합니다.
사고(?)를 넘겨받은 변호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사실 마피아와 겨루고 있던 상태에서 엉뚱한 사고에 말려든 것인데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쫓깁니다. 그래서 마피아가 복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처합니다. 차츰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마피아의 거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던 중간책과 연결이 되고 그와 더불어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함께 도망자가 되었으니 싫어도 협력해야 합니다. 그만한 실력자이지만 역시 권력에 대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미 신상 털기로 모든 활동에 제약이 생깁니다. 그런 속에서 말 그대로 고군분투합니다. 중요한 증거물인 테이프까지 망가집니다. 삶을 망가뜨린 복수를 해주어야 하는데 증거물까지 날렸으니 어쩝니까?
아슬아슬 쫓아가지만 보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저렇게 권력을 사용(私用)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더욱 속이 뒤집힙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모두 감시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그러나 대화 속에서 나온 말이지만 ‘정부가 우리 집에 들어올 권리는 없어요,’ 하는 말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과연 그 상태로 삶이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끌려들어갈지 어찌 알겠습니까? 참으로 무섭습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를 보았습니다. 쫄깃합니다. 1998년 작품이네요. 과연 누가 또는 무엇이 국가의 적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성경 이사야 29 : 11 - 12 2020년 07월 26일
설교 : 누가 알고 믿는가 김종우 목사
우리나라 경기도 이천에 가면 도자기 공장이 많습니다. 매년 때를 따라 도자기 축제를 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시되는 도자기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흥미 있을 것입니다. 흙을 빚어서 형태를 만들고 불에 굽지요. 시간과 노력, 정성이 많이 들어갑니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고려청자는 지금도 따라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 기술을 그대로 전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사를 배우며 정말 안타까워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 요즘도 예쁘고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먼저 재료와 그 재료를 섞는 비율과 불에 구워내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따라 붙습니다. 영화 속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고 그 장면을 잊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흘러간 옛 팝송이 함께 어우러져서 정말 명장면을 연출하였지요.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죽은 남편의 영혼이 한데 어우러져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장면 말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그릇으로 말씀하시지요. 사 64 :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진흙,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면 사용하는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깨뜨립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과정을 보여주십니다. 렘 18 : 1 - 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하나님이 토기장이의 집을 보여주신 것은 너도 보고 잘 배워서 그릇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그릇은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일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도 바울을 택하시고는 말씀하십니다. 행 9 :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 마음에 안 들면 깨뜨려 다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특성을 먼저 알아야 하겠지요. 그릇의 사명은 먼저 물건을 담는 것입니다. 물건을 담으면 누군가에게 전달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당연한 일이 잘 안 된다는데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담겨있지 않고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겠습니까?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소위 가짜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5 : 37 - 38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자 여기서는 그릇을 가죽 부대로 바꾸어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에야 포도주를 병에 담습니다만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병이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가죽 부대에 담아가지고 다녔습니다. 오래 사용하면 낡아지겠지요. 거기다가 막 담은 새 포도주를 담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효가 될 테니 부피가 늘어납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터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 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두는 것이 바른 일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요?
포도주가 어디서 생깁니까? 당연히 포도나무 열매에서 생깁니다. 요 15 :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포도나무가 누구라고요?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요 17 :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 아멘! 17절 “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전하는데 그 백성 유대인들이 받지를 않습니다. 특히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할 목자들이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 23 :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자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외우고 가르치고 행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이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초림 때의 이 사건이 곧 재림 때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자들이 특히 이 말씀을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백성보다도 먼저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슥 13 :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즉 목자가 잘못되면 양이 잘못되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를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중요하지요. 하나님이 당신의 양떼를 맡기셨으니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제대로 돌보는지, 제 때에 먹이는지, 무엇을 먹이는지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습니다. 마 24 : 45 - 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은 바로 이런 종을 찾고 계시는 겁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들은 율법 곧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그 자부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리로부터 웬 초라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기적도 행한다고 합니다. 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일이 있는가 하면 문둥병도 낫게 하더랍니다. 더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병자를 안식일 날 고쳐주느냐 그 말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도무지 인정해줄 수가 없지요. 그 대답하는 것이 너무 건방집니다. 마 12 : 9 - 10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자 예수님을 책잡으려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대답하십니까? 11 - 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아멘! 결국 고쳐주십니다. 할 말은 없지만 도무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네가 지키고 있는 하나님 말씀과는 너무 다르지요. 그래서 죽이려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 1 :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수님이 오시고부터 율법의 시대는 종을 쳤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길이 막힙니다. 율법에 매여 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율법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안타깝게도 모르면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을 읽고 설령 다 암송을 한다 할지라도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요. 말씀을 기억한다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인들도 전문서적 읽다 보면 읽기는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그렇다는 것이지요. 읽는다고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을 끼고 살던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성경도 여러 군데서 지적합니다.
그 예를 보도록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사 6 :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렇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언서이니 이 말씀이 이룰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 가지고 지적하셨거든요. 마 13 : 13 - 14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 22 : 29절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렇지요. 그들은 성경을 읽고 외워도 알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요. 행 13 :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그러고 나서 간단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26 - 27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요점은 그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함으로 예수를 정죄하여 죽였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성경을 안 읽었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경을 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이 말을 한 사도 바울 자신이 그랬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몰랐지요. 누구를?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도 다른 유대인과 같은 운명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고자 택한 그릇이었기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골수분자가 변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성경에 통달하고 달달 외우는 자라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즉 예언의 말씀은 응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요. 사람이 임의로 해석해봐야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마치 봉한 책과도 같습니다. 유식하든 무식하든 모르기는 마찬가지지요. 그것은 세상의 유식과 무식하고는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지 아니하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 3 :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문제는 하늘에서 와서 전하는데 그것을 받는 자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랬습니다. 때문에 자기네 생각과 다르다 하여 정죄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율법을 담고 있는 그릇 즉 묵은 포도주를 담고 있는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는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도무지 담을 수가 없었지요. 예수님의 복음은 그들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새 말씀이었습니다. 새 포도주였지요. 따라서 새 가죽 부대가 필요했습니다. 부대를 바꾸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뒤집어버려야 하지요. 가지고 있던 것을 다 쏟아버려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은혜지요. 주님을 만난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빌 3 : 7 - 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아멘!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버린 것이 재산이겠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여태 지니고 있던 자기 목숨처럼 아끼던 율법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그게 다 쓰레기였다는 것입니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지요. 실은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속의 묵시 즉 예언의 말씀에 대한 무지입니다. 어쩌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말씀을 친히 이루셨지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어뵤었습니다. 오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롬 10 : 2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이야기입니다. 열심은 특심해도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또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셨고 그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다시 보고 기록하였습니다. 계 1: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기 본 것을 다 증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본 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진 것을 증거하는 종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말세에 오셔서 구약을 이루신 것을 증거하셨듯이 예수님이 보내시는 보혜사가 신약 말세에 오셔서 신약을 이루시는 것을 증거하시리라 믿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아멘!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 5 :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셨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도 분명 육체로 오셔서 예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계 22 :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마지막 때 예수님이 교회들을 위하여 당신의 사자를 보내신답니다. 이 사자는 ‘천사’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바로 예수님 이름으로 오실 성령입니다. 그 분이 가르치시고 그 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약을 이루시고 그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목자라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반대하고 비방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왜요? 처음 듣는 말 즉 새 포도주이기에 자기네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 재림 때 다시 한 목자가 나타나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신약의 말씀을 이루고 그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목자들이 순순히 듣고 응할까요? 역시 처음 듣는 말 곧 새 포도주죠. 들어요, 안 들어요? 듣지 않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핍박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린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갑니다. 가만들까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막을 것입니다. 초림 때와 똑같은 상황이 나타나 전개되리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신앙해야 하는가 알아야 합니다. 그냥 믿습니다, 아멘! 하고 따라가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던 순례자가 마침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가는 노인을 만납니다. 저 괜찮으면 함께 타고 가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래서 동승하여 갑니다. 노인장, 예루살렘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시간 정도는 갈 겁니다. 아 그래요? 순례자는 시간이 넉넉하다 싶어 잠시 눈을 붙이고 쉽니다. 얼마 후 깨어나 묻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더 가면 됩니까? 시간 반은 가야 할 것입니다. 아니 노인장, 아까는 한 시간이면 된다고 하더니 한참을 왔을 텐데 어떻게 시간이 더 걸립니까? 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냥 가면 안 됩니다. 바로 가고 있는지, 다른 데로 가고 있는지 알고 가야 한단 말입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면 됩니까? 천국인지 지옥인지 깨닫고 가야 합니다. 건성으로 교회만 들락거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 살고 끝내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냥 성경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 성경을 알고 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성경이 무슨 책이라고요? 구약과 신약 곧 약속입니다. 약속은 왜 합니까? 지키려고. 그러면 누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약속대로 이루어진 사건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약속은 믿었는지 모르지만 약속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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