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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 22장 42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설교제목 : 마음의 공간(THE SPACE OF THE MIND)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 이 시간 저의 부족한 증언을 청취하시는 모든 분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증언 내용은 제가 창안한 심리학 용어인 “마음의 공간”(THE SPACE OF THE MIND)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다소 생소한 “마음의 공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마음의 공간”이란 세상과 나 사이에 충격 흡수기능인 완충(緩衝)역할을 하면서 존재하는 극히 심리학적인 가상(假想)의 공간(空間)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죠. 만약 인간이 세상과 대면할 때 마음의 공간이 텅 비어 있거나 그 공간 안에 부정적인 생각들, 즉 우울, 좌절, 절망, 허무, 분노, 공포감으로 뒤덮여 있을 때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요?
그렇게 되면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은 날카롭고 강력한 세상의 공격 앞에 어떠한 방어벽도 없이 노출되어 여지없이 파괴되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은 때로는 선한 천사들도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흉악한 악마들이 공중에서 떠돌아다니며 인간을 호시탐탐 공격해 오는 실로 기괴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 마음의 공간, 악마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즉 완충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의 공간 안에는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요소가 긍정적인 요소를 압도한다면, 인간의 삶은 파괴되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긍정적인 요소가 부정적인 요소를 이겨 낸다면, 그의 인생에는 찬란한 승리와 영광이 찾아올 것입니다.
긍정적인 요소 중에는 사랑이 잔인한 세상에 대해 대항하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마음의 공간에 채워 넣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험한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부여하신 그 사랑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랑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형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이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 한반도에서 약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1392년∼1897년) 시대를 한번 조명해 볼까 합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성격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임금인 제10대 왕인 연산군 이융과 22대 왕인 정조 이산의 경우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연산군 이융의 행적을 보겠습니다. 연산의 어머니 중전 윤씨는 아버지 성종 임금의 어머니인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성종의 후궁들에 대한 사랑을 투기한 나머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었습니다. 이를 본 인수대비는 진노하였고, 얼마 안 되어 윤씨를 폐비시켰고, 급기야는 사약을 마시게 하여 목숨을 끊게 만들었습니다. 연산군은 왕이 되고 난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마음의 트라우마(TRAUMA)가 생겼고, 이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그의 성격을 극도로 잔인하게 만들었고, 또한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신하를 처형하고 유배를 보냈습니다. 또한, 집권 말년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그를 최측근에서 보필한 환관인 김처선을 잔인하게 죽인 것이었습니다.
연산군 11년 4월 1일 김처선은 “나는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부인에게 말하면서 집을 나선다.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섬겼으며, 세조를 거쳐서 성종 대에는 내시의 최고위직 상선(尙膳)까지 오른다. 연산군 대에도 김처선은 어서(御書)를 신하에게 전달하는 등 왕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이날 연산군은 처용 놀이를 하고 있었다. 김처선이 보기에 처용 놀이는 매우 음란한 행위였다. 그동안 처용 놀이의 음란함이나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서 김처선은 몇 번이나 충심으로 간언을 했다. 그 간언으로 하옥을 당하기도 하고 장 백 대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일이나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주색에 빠지고 신하들을 다반사로 죽이고 백성을 벌레보다도 못하게 업신여겼다. 일부 간신과 여인(장녹수, 흥청 등) 외는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조선 최악의 포악한 왕이다.
김처선은 결심을 단단히 했다.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는 곳에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이 늙은 몸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저도 경서와 사서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연산군은 화를 참지 못했다. 활시위를 당겨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다. 김처선은 그래도 할 말을 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을 더 쏘아 김처선을 넘어뜨리고 칼로 팔과 다리도 자르곤 일어나서 다니라고 했다. 김처선이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라고 대꾸를 하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몸소 자르고 창자까지 끄집어냈다. 김처선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않았다. “사악한 행동을 버리고 착한 임금이 돼라”라는 충언이 죽어서도 그의 입안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상선 김처선을 극도로 잔인하게 죽인 연산군의 마음의 공간에는 사랑이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분노와 증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마침내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다음은 연산군보다 어릴 때 더 마음의 고통을 겪은 조선조 22대 왕 정조 이산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정조 이산은 조선조 임금 중 가장 비극적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비운의 왕세자 이선은 가장 무더운 한 여름철에 좁디좁은 쌀을 담는 뒤주에 갇혀 처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영조와의 극심한 부자간의 불화가 그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했으니,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친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세력인 집권 노론 강경파들은 즉위초기 그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정조는 당시 군사 및 권력의 80%를 차지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숨도 못 쉴 정도로 압박을 받았고, 극도로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면초가의 위기 속에서도 정조는 그 무서운 마음의 고통과 공포, 원한을 모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정조가 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부친을 죽이고 자신마저도 죽이려던 원수의 무리들에 대해서 살점을 도려내고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았을 만큼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조 이산이 그들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사랑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성덕임이라고 하는, 사랑하는 한 여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는 시아버지에 의하여 지아비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와 사랑이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여동생들, 이복동생들, 신하들, 백성들에 대한 깊고 넓은 사랑이었습니다.
넷째는 학자군주로서 학문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첫째 성덕임과의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조와 혼인하여 의빈이 된 성덕임은 모친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사 성윤우의 딸이었습니다. 덕임은 모친이 세자빈이 되어 궁궐로 들어왔을 때, 모친을 시중들기 위하여 같이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한 살 많은 정조 이산과 어릴 적부터 같은 처소인 경춘전에서. 신분은 엄청난 차이지만 한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정조가 세손시절 15세에 덕임에게 사랑의 고백을 했으나 덕임은 정조의 청혼을 감히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손빈이 아직 임신을 못 했는데, 어찌 자신이 먼저 승은을 입을 수 있느냐며 울면서 사양했고, 인품이 훌륭한 세손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정조의 청혼을 거절한 덕임의 이유가 타당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 시대가 절대 왕조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정조의 태도는 상당한 관용과 이해심이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덕임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세손의 청혼을 일개 궁녀가 물리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엄중한 행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정조가 왕위에 즉위하고 난 후에 다시 사랑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무려 15년 세월을 기다려 준 임금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정조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조가 재차 사랑의 고백을 한 그 때도 덕임은 같은 이유로 정조에게 거절했으나, 이번에는 정조가 화를 내면서 덕임의 하인에게 벌을 내렸기 때문에
덕임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결국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약 2년간 2번의 유산을 겪은 후 1782년 마침내 첫아들 문효를 낳았고, 정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2년 후 1784년 문효를 이례적으로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덕임은 그 해 딸까지 낳는 경사를 누렸으나 딸은 안타깝게 생후 2개월 만에 사망하고 맙니다. 15년간 짝사랑했던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까지 낳은 정조가 문효세자를 얼마나 예뻐했을까요? 그런데 소용돌이치는 인생은 정조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문효는 5살의 나이로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맙니다. 그런데 더 큰 불행이 다가왔고, 그 불행은 정조의 가슴을 잔인하고, 처참하게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문효세자 사망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의빈 성씨는 홍역을 앓기 시작했고, 만삭의 상태로 불과 34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조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불과 7년이었습니다.
정조는 단장(斷腸)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의빈 성씨의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어 그녀를 애절하게 추모했고, 그녀의 묘는 사랑하는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 곁에 두게 했습니다.
둘째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정조는 죽은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지극했지만, 살아 있는 모친 혜경궁에 대한 효성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이렇게 정조의 효성을 표현했다. “정조께서 천성이 효성스러우신데, 요 몇 년 사이는 효도가 더욱 지극하시어 날 섬기심이 날로 더 잘하시고 그래도 부족한 듯이 하시니라. 평일에도 아들을 잊지 못하는 노모의 마음을 알아서, 서울 성내의 거동이라도 궐내를 떠나시면 안부를 묻는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더라. 더욱이 수원 화성의 경모궁(사도세자) 산소라도 거동하시면 매양 여러 날이 걸리는 고로, 더욱 나의 근심스러운 마음을 생각하시어 도로에 역마를 세워두고 반나절이 못 되어 소식을 듣게 하시더라.”
정조의 그의 모친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의 절정은 그녀의 60회 회갑연이었습니다. 정조는 이 회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고 회갑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10만 냥이나 준비했습니다. 10만냥은 그 당시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이 돈을 마련하는 데 있어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왕실의 사적 경비인 내탕금을 오랫동안 절약하며 모아 왔습니다. 그는 이 돈을 모친의 회갑, 그리고 잔치에 참여한 신하나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썼습니다. 회갑 잔치에는 모친을 기쁘게 하려고 특별히 종친들과 혜경궁의 친정 식구들이 내려왔습니다. 그중 압권은 모친의 유일한 여형제인 이복일의 처를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회갑을 맞은 모친을 극적으로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복일은 당시 남편 집안의 죄로 인하여 오랫동안 역적으로 근신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조가 어떻게 하면 모친을 기쁘게 할 방법이 있을까를 백방으로 고심한 끝에 찾아낸 묘수중의 묘수였습니다. 20년 만에 그리워하던 동생을 만난 혜경궁의 반갑고 애틋한 심정을 들어봅시다.
혜경궁은 “주상(정조)이 아우(이복일의 처, 혜경궁의 여동생)집안을 역적 죄에서 벗겨주시며 아끼시니, 그 시아비 마음에 역모의 뜻은 없음을 통촉하심이라. 주상께서 이모네를 각별히 불쌍히 여기심이 외삼촌들 보다 넘으시니, 이는 어미가 아우 못 잊어하는 뜻을 받아 극진히 헤아림이라. 성은이 그지없어 금년 봄에는 특별히 법을 굽혀 화성 거동에 나와 아우를 만나게 하시니, 임금의 뜻이 천고에 뛰어나시니라.” 하며 정조의 효심에 감격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정조의 48년(1752∼1800)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그가 너무나 인간적인, 감성이 풍부한 한 인간임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 형제간의 훈훈한 우애, 백성들에 대한 사랑, 초인적인 자기 절제, 끝없는 자기 수양과 노력, 국사에 대한 노심초사, 국정에 대한 주도면밀한 책략 등 인간으로서 어쩌면 초인의 경지에 입신했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정사를 제외하고는 주야로 손에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정진했고, 국가적으로 학문의 놀라운 융성과 발전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 후기의 대 문예 부흥을 일으켜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루어냈습니다.
정조는 또한 백성을 생각한 나머지 본인은 정작 반찬이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은 검소한 식사와 평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비단옷을 입지 않고 거친 무명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거처하는 전각에는 비가 오면 비가 새어 그릇으로 비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검박하게 생활하면서 내탕고를 아낀 정조는 그 돈을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했고, 백성들을 위해 크게 지출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그녀의 친정의 억울한 점을 1804년 갑자년이 되면 다 신원(伸寃)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자신의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어 정사를 맡을 나이가 되기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숭 사업에만 매진하려는 포부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행간을 살펴보면, 정조는 이때 대대적으로 정계개편을 시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 중대한 일을 도모하려고 자신의 호위군사력인 장용영, 장용위를 크게 확대하고 개편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에 발목을 잡는 노론세력 중 강경파들을 전면 퇴진시키고, 대신 자신에게 순종적이고 사리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소론과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러한 정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804년 갑자년을 불과 4년 앞두고 48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고 정조는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모습일까요. 만약 정조가 살아서 갑자년 정치 대개혁에 착수했다면, 선조 이래로 조선을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성리학 원리주의파인 노론세력을 분명히 혁파시켰을 것입니다. 정조는 마지막 그의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세종과 더불어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군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사랑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용서와 화해, 관용, 사랑이 그를 인생의 승리자로 이끌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은 같은 트라우마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후 연산군과 임금 정조는 어떻게 하늘과 땅처럼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요?
한 사람은 폭군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성군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차이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의 마음의 공간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공간에 각각 사랑하는 마음과 증오의 마음을 담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에 부여한 인간 개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입니다. 연산군의 마음의 공간에는 신하들과 백성에 대한 일고의 사랑도 없었으며, 자기와 다른 인간에 대한 오직 증오심과 복수심을 선택했지만, 정조의 마음의 공간에는 한 여인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모친에 대한 지극한 사랑, 신하들과 백성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성경 본문에서와같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대 고난을 하루 앞두고 그 분의 마음의 공간에는 무엇을 담았을까요. 주님께서는 인간이지만 신적인 예지력도 가졌기 때문에 그다음 날 다가올 무서운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나약한 육신을 가진 자로서 엄청난 공포감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로마 군병에 의해서 몸이 찢어지고 붉은 피를 콸콸 흘리는 참으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극한적인 고통에 대해서 주님께서 과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다음 날 주님은 놀랍게도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십자가형에 이르는 그 고난과 슬픔의 길을 너무나 의연하고 침착하게 걸어가시고 모든 고통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에게 과연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서 이 모든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천사가 예수님의 기도에 힘을 돕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는 그날 밤 천사 이상의 만남, 즉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믿음과 사랑을 확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과 믿음의 대화가 기도를 통하여 내밀하게 오감으로써, 그 날 밤 주님의 마음의 공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으로 채워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성경 이사야 41장 10절과 같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와 같은 내용의 말씀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에게 하시면서 나도 네가 겪는 고난에 함께 참여하면서 같은 고통을 짊어지시겠다고 약속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친아들인 예수에게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헌신,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위대한 구원의 섭리에 순종하여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에 대해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까지 바치는 무한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 사랑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 주님은 다음 날 그 무시무시하고 고난에 찬 형벌을 이겨 내고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결국, 인류구원은 이러한 상호 관계적 사랑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창궐하는 코로나 전염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고난으로 가득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의 공간에는 과연 어떤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할까요?
저는 조선조의 성군인 정조가 마음의 공간에 가졌던 인간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우리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마음의 공간을 채웠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의 공간에도 가득하게 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받는 사랑도 필요하지만,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에 따라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의 공간에 채워 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번뿐인 귀중한 삶에서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존귀와 영광가운데 찬란하게 빛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의 공간에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우리 이웃들에 대한 사랑, 민족과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말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21년 1월 6일 建文齊에서 강광우목사 稽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