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례력 돋보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례력에서 성인 축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축일은 인간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들을 기념한다. 성탄과 부활, 성령 강림 대축일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축일 외에도 교회 역사 안에서 생겨난 신심이나 신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된 축일이 있다. 이런 축일들은 주로 1000년대 이후에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의해 확산되어 교회 전례력 안으로 도입되었고, 대림·성탄·사순·부활 시기가 아닌 연중 시기에 거행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로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6월에 모여 있다. (이밖에도 연중 시기의 마지막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과 성탄 시기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도 이에 해당 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대한 이탈리아 신자들의 정성은 상상 이상으로 열광적이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 아씨시 근처의 인구 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 스펠로(Spello)는 아직도 이 대축일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축일 새벽부터 가정과 회사, 단체별로 큰길, 골목길 할 것 없이 길을 따라 갖가지 도안을 그리고 그 위에 색색의 꽃잎으로 아름답게 수를 놓는다. ‘인피오리따(infiorita)’라고 하는 이 ‘꽃잎 카페트’는 주교좌 성당에서 대축일 오전 미사가 장엄하게 거행되고 나면 성광에다 성체를 모신 사제들과 주교가 성당 밖으로 행렬을 시작할 때 밟고 지나가도록 온 동네가 새벽부터 준비한다. 여기에는 대축일을 맞으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꽃길’만 밟으시라는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녹아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제정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낸다. 이 대축일의 제정에는 벨기에 리에즈(Liege)의 율리아나 수녀(1191~1258년)가 체험한 전례 안에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을 지낼 것을 명하신 예수님의 환시와 1263년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볼세나(Bolsena)라는 곳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체 성혈 안에 예수님께서 실재로 현존하심을 공언한 이 대축일의 제정은 이후 성체 현시, 성체 행렬과 같은 장엄하고 화려한 성체 공경 예식과 열광적인 성체 신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중세의 이런 성체 공경은 그 한계도 분명했다. 이 시기에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그분과 하나 되는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보다 성체 그 자체에만 주목했다. 즉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남겨 주시고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주신 성체의 의미는 잊혀지고, 성체 안에 기적처럼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성체를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열광적으로 성체에 대한 신심을 표현했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자신들 몸 안에 모시기가 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성체 신비의 한 측면이 아닌 균형 잡힌 성체 공경을 원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정 위원회가 이날을 위한 새로운 감사송을 마련해 성체성사의 역사적이고 구원적인 측면을 교회가 함께 기념하고 기억하도록 했다. : “주님께서는 이 큰 신비로 신자들을 기르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하나의 신앙으로 비추시고 하나의 사랑으로 뭉쳐 주시나이다. 이제 저희는 이 놀라운 성사의 식탁으로 나아가 주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부활하신 성자의 모습을 닮은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하나이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그저 바라보이기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먹히시고, 우리 안에 온전히 녹으셔서 우리가 당신과 하나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양육 되기를 바라신다. 성체를 모시는 가운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며, 예수님이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 마음 안에서 꽃길을 걸으시고, 그로 인해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꽃길을 걷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가꾸면 좋겠다.
[기도하는 교회] 미사를 거행할 때 봉사자는 어떤 옷을 입나요?
전례를 거행할 때 봉사자들이 입는 옷을 ‘거룩한 옷’(sacra vestis)이라 부르는데, 봉사자의 고유한 임무를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 총지침 335항)
봉사자의 공통 복장은 ‘허리에 띠를 매는 장백의’입니다. 장백의가 띠 없이도 몸에 잘 맞으면 띠는 없어도 됩니다. 장백의가 평상복의 목 부분을 가리지 못하면 먼저 개두포를 둘러야 합니다.(총지침 336항) 여기서, 성직자의 경우 평상복이란 수단(soutane) 또는 클러지셔츠(clergy-shirts)를 가리킵니다.
주례사제와 공동집전사제는 ‘제의’를 입어야 합니다. 제의란 ‘장백의와 영대 위에 입는 옷’(총지침 337항)입니다. 공동집전자 수는 많고 제의가 부족할 때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공동집전사제는 제의 없이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복장을 할 수 있습니다.(총지침 209항) 그러나 이러한 복장을 ‘약식 제의’라 부를 수 없고, 교회의 공식용어에 ‘약식 제의’라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며, 특히 주례사제가 이런 복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공동집전사제도 가능하다면 제의를 입도록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형편에 따라 공동집전사제는 그날 전례색에 따르지 않고 흰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구원의 성사 124항)
한편, ‘달마티카’는 성대한 전례 거행에서 주교와 부제가 입는 것이므로(주교 예절서 56항) 이것을 ‘부제복’이라 부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으며 그냥 ‘달마티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복사, 독서자, 비정규성체분배자 등 평신도 봉사자들은 장백의 또는 주교회의가 합법적으로 승인한 다른 알맞은 전례복을 입을 수 있습니다.(총지침 339항) 교구장의 판단에 의해, 부산교구에서는 평신도 봉사자가 장백의를 착용하는 것이 여의찮으면 다른 단정한 복장을 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전례상징’] 세례의 상징: 물과 성령, 세례수
“생명과 정화, 죽음과 부활의 표징”
물은 생명을 위한 안식처입니다. 태중의 아이는 양수 안에서 헤엄치지요. 또한 생명 유지에도 물은 음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물 없이는 삼 일을 버틸 수 있고, 음식 없이는 한 달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하지요. 세상의 문명 기원에 항상 물이 흐르는 강이 있는 것은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지요. 물은 생명의 시작과 유지에 필수 요소이면서, 또한 멸망과 파괴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를 강타한 쓰나미는 그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창세 7,6-24)는 물이 “땅 위에 백오십일 동안 계속 불어났다”(창세 7,24)고 전해줍니다.
이렇듯 물은 생명과 멸망의 이중성을 지니면서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것을 씻어주는 정화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물의 자연적인 생명, 파괴, 정화의 역할이 세례성사에 들어와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사업과 연결되어 신학적, 영성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업적에 함께 한 물!
세례에 앞서서 필요한 세례수를 축복하는 ‘세례수 축복 기도’는 물과 관련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사건, 여섯 가지를 기억합니다. “주 하느님, 성사의 표징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힘으로 구원의 신비를 이루시니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물이 세례성사의 표징이 되게 하셨나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인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창세 1,2)를 떠올리게 하는 “태초에 성령께서 물 위에 머물게 하시어 그때 이미 물이 거룩하게 하는 힘을 지니게 하셨나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세례에서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인 물과 성령이 창조에도 함께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어지는 “홍수를 통하여 죄를 씻고”를 통해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인류의 죄를 정화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마른 발로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세례받은 새 백성의 예표로 삼으셨나이다”라고 기도하며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롭게 하였듯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심을 암시합니다.
“성자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축성되시고”라는 표현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예수의 인성이 요르단강 물에 닿아, 그분으로 인하여 강물에 성화의 능력을 전하게 됨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어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셨으며”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는 요한복음 말씀을 상기시키며 이로 인하여 피에서 성체성사의 표지를, 물에서 세례성사의 표지를 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하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나이다”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승천하기 전에 명령하신 사명을 전해줍니다.
이런 성서적 배경을 통하여 세례수는 새 생명의 효과적인 표징, 죄와 죄에 대한 죽음의 표징,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표징, 성화의 표징, 성령의 은총의 표징,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리는 봉헌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물이 거룩한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성령!
성령은 태초의 물 위에 머물고, 홍수 후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가져온 비둘기로, 출애굽 중에 구름으로, 예수님의 세례 때 비둘기로, 예수님의 뚫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물로 상징화되었습니다. 세례수 축복 기도는 성령이 물에 내려와서 거룩한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합니다. “교회의 정성을 굽어보시고 교회 안에 세례의 샘이 솟아나게 하소서. 성령의 힘으로 외아드님의 은총을 이 물에 부어 주시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이 세례성사로 온갖 묵은 허물을 씻어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하던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민수 20,11)는 이야기와 예언적 관점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곧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에제 47,1)를 연상시킵니다. “물이 솟는 샘”(요한 4,14)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흐르는 물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의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세례수는 성령을 통하여 양육되는 교회의 표징이 되며, 이 교회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묻히고 부활하게 하는 세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묻힌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라는 세례수 축복 기도는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5)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세례의 은총을 표현했습니다.
물속에 푹 잠기는 침례(浸禮)는 물의 파괴성과 생명력을 동시에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하는 예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세례성사-생명의 축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하였습니다. “새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 성공과 업적, 인정받기와 대접받기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규정한다. 이것은 참된 자유를 의미한다. 교회의 세례는 거기서 정체 전환이 일어남을 가리킨다. 아이는 자기의 참 본질과 접촉하면서 이 세상의 종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다른 사람과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참 본질인 하느님을 만나서 그분에 의해 자신을 규정한다는 전환은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늘 화두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매년 파스카 성야가 되면 세례 갱신을 하는 이유가 세례를 통해 이미 자기의 참 본질인 하느님을 만나서 세상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집트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늘 세상의 종속을 그리워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불편함에 투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가 ‘교리교육에 관한 강해’에서 세례에서의 물의 의미를 잘 설명해줍니다. “주교는 성령의 은총을 물 위로 내려주시어 성사적인 탄생 장소가 되도록 하느님께 간청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니코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하신 말씀과 통한다. 성령이 어머니 태중에 만든 씨앗을 육체로 탄생하도록 받아준 것처럼 물은 세례로 태어나는 사람의 모태(母胎)이다. 따라서 세례자는 성령의 은총으로 두 번째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 성심 성월 특집] ‘예수 성심’ 알아보기
인간 구원 위해 상처 입은 성심…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
예수 성심 성월이 돌아왔다. 6월 한 달 동안 교회는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 마음을 묵상하도록 권한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물을 길으리라」를 통해 “예수 성심 신심이야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며, 현대 사회에 적합한 신심으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라 불렀다.
예수 성심이란
사전적 의미로 ‘예수 성심’(聖心)은 사람을 향한 사랑의 상징으로서, 예수님의 육체적 심장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신비와 수난과 죽음, 또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 등을 통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구절처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창조를 통해, 특히 당신 모상인 인간의 창조를 통해 드러났고, 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고 그로 인해 수난하고 대신 죽게 함으로써 온전히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후 창에 찔리셨을 때 피와 물이 나온 장면(요한 19,34)은 교회 초기부터 중세 신비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열렬한 묵상의 대상이 됐다. 특별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모든 초자연 은총의 샘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했다.
이 성심에서 흐른 물과 피는 죄로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과 새로 태어난 백성을 먹여 기르는 성체성사를 상징한다고 봤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갈빗대)에서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로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인 예수의 옆구리에서 그의 피를 나누어 받은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성체성사로 드러난 것이다. 이 성사는 당신 자녀들을 영적으로 키우시고 영원히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이라 할 것이다.
예수 성심 공경의 역사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기 이전에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었다. 그러다 12세기 무렵 성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가 중심이 돼 예수 성심을 공경했고, 이후 특히 13~14세기 신비가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수립 발전시켜 나갔다.
14세기에는 예수 성심 공경이 ‘새 신심 운동’이라는 신심 운동과 관련해 번져갔다. 16세기 들어서는 예수회가 예수 성심 공경을 활성화했다.
17세기에 얀센주의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이 성체성사를 경시하자, 성심에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됐다. ‘예수 성심과 성모 신심의 전례 공경의 창시자’로 불린 프랑스 오라토리오 회원 성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1672년 10월 20일 프랑스 주교들 인준을 받아 교회 최초로 예수 성심 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예수 성심을 위하여 처음으로 시간 전례를 바치도록 한 인물이다.
예수 성심 공경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세계적으로 보급된 계기는 프랑스 파레이르모니알 성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Margarita-Maria Alacoque, 1647~1690)다.
알라코크 수녀는 1673~1675년 여러 차례 예수 성심에 대한 신비 체험을 했는데, 그 환시에서 예수님은 성녀에게 예수 성심 축일을 제정하고 예수 성심 금요일과 성시간을 장려하라는 임무를 줬다.
6월 예수 성심 성월은 프랑스 우아조(Osieaux) 수도원과 여러 지역에서 신심 행사로 시작됐으며, 1873년 비오 9세 교황이 대사 반포와 동시에 정식 인가했다. 예수 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 대축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관구장 고무찬(베네딕토) 신부는 “현대에서 예수 성심 공경의 의미는 이웃을 향한 봉사와 정의를 향한 투신 등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고 신부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6년 성 마리아 방문 수녀원에 남긴 편지를 예로 들었는데, 당시 교황은 “그리스도의 성심에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어떻게 함께 일치하게 하는 지 알게 된다”며 “이런 방식으로 미움과 폭력이 만연된 곳에 예수 성심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것이 구세주 성심에 의해서 요청되는 참된 보상”이라고 썼다.
[알기쉬운 전례상식] 교대송은 어떻게?
주일이나 평일의 새벽 미사 때에 주례 사제나 신자들 편에서 입당 노래를 부르려면 상당히 부담감이 든다. 목소리는 잠겨 있고 입당 노래는 불러야 하고 반주자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반주자가 없는 경우는 해설자는 물론 신자들도 무척 난감하다. 꼭 입당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더 나아가 대축일이나 주일에 자비송과 대영광송을 성가대만 부르고 다른 신자들은 구경꾼처럼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가?
미사의 시작과 인도와 준비의 성격을 지닌 예식(입당, 인사, 참회, 자비송, 대영광송, 본기도)은 한데 모인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 일치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합당하게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6항 참조)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입당은 네 가지 방식으로
① 성가대와 교우들이 교대로
② 선창자와 교우들이 교대로
③ 노래 전체를 모두 함께
④ 성가대만 부를 수 있다.
입당할 때에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로마 미사 경본」에 실린 입당송을 신자들이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독서자가 낭송(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 참조)하는 것이 좋다. 새벽 미사 때에 대부분 신자들의 목소리가 잠겨 있으므로 노래를 잘 선택하면 미사 거행이 더없이 빛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노래를 억지로 부르는 것보다 입당송을 사제가 제대에 도달할 때까지 신자들이 반복해서 낭송하는 편이 훨씬 낫다. 사실 입당송은 그날 거행하는 미사의 복음 주제를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주님께 환호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인 자비송은 관습에 따라 모든 이가 바치는 것이 좋다. 자비송은 두 가지 방식으로, 곧 ① 교우들과 성가대가 교대로 ② 교우들과 선창자가 한 부분씩 맡아 교대로 바칠 수 있다.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께 찬양과 간청을 드리는 매우 오래된 고귀한 찬미가인
대영광송은 네 가지 방식으로, 곧
① 사제(필요에 따라 선창자나 성가대)가 시작하지만
② 그다음 본문은 모두 함께 노래하거나
③ 교우들과 성가대가 교대로
④ 성가대만 노래한다.
노래하지 않을 경우는
① 모두 함께 낭송하거나
② 두 편으로 나누어 교대로 낭송한다. 대림과 사순 시기 밖의 모든 주일,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전례 거행 때에는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다른 성가들뿐만 아니라 입당, 자비송, 대영광송도 성가대만 부를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모두 함께 노래하거나 바치는 것이 좋다. 특히 대영광송에서 사제(✝), 합송(◎), 계 또는 선창자(○), 응(●) 표시를 잘 구분해서 사제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라고 시작하고, 신자들은 그다음 본문을 함께 노래하거나 교대(계 또는 선창자(○)와 응(●), 합송(◎))로 바친다. 전례 안에서 사제가 해야 할 부분과 신자들이 해야 할 부분을 잘 구분해서 바칠 때 하나된 공동체의 영적 일치를 더욱 잘 드러내는 것이다.
[전례력 돋보기] 성모 성월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해마다 5월이 되면 성모당에는 본당별, 단체별로 성모의 밤 행사가 날마다 거행되며 정성되이 바치는 성가가 울려 퍼진다. 또한 성모당이 아니더라도 본당마다 성모님께 봉헌하는 아름다운 밤 행사가 진행된다. 2020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19로 아픔의 시기를 겪는 모두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자고 초대하기도 하셨다.
왜 우리는 5월을 성모 성월로 지낼까? 싱그럽게 핀 장미꽃이 성모님과 잘 어울리는 봄철, 5월이기에 성모님의 달로 정해졌을까? 좀 뜻밖이지만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성모 성월을 5월에 지내는 전례적인 근거나 전례력상의 연결 고리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고, 따라서 성모 성월을 위한 공식적인 전례 예식도 없다.
성모님의 달을 5월에 지내는 것은 유럽의 계절적,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꽃이 피고 화창한 봄철의 축제를 지내는 사회적 분위기에 성모님을 공경하고자 하는 신심이 자연스레 결합되어 성모님을 축제의 중심으로 모시고 기도와 찬미를 드리려는 열망이 확산된 것이 성모 성월의 기원이라고 한다.(C. Maggioni, ABC Per conoscere Maria, 47 참조)
5월 한 달 동안 호칭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 특별한 정성을 드리는 성모 성월의 본격적인 전통은 17~18 세기에 수도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어 각 본당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20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1947년에 발표하신 회칙「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를 통해 성모 성월이 “거룩한 전례에 속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중요하고 품위 있는 신심 행위’(182항)임을 밝혀주셨다. 또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1965년 폐막을 앞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 결실을 풍성히 거두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의 아픔 뒤에 다시 세계 평화를 위협하던 냉전 상황을 환기시키며 특별히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전 교회가 5월, 성모 성월에 더욱 열심히 성모님께 간구하자고 초대하셨다.(회칙 「5월(Mense maio)」, 3~4항 참조)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팬데믹 상황에서의 기도 권고까지, 현대의 교황님들은 성모 성월에 당시 교회가 처한 어려움들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특별한 도움과 전구를 청해 오셨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전례 거행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모 성월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지만 전례력과 큰 연관 없이 계절적인 분위기와 대중 신심에 근거해 지내 왔었다. 이런 가운데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날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선포하신 것은 의미가 깊다. 주님 부활 대축일 50일 뒤에 오는 성령 강림 대축일과 그 다음날인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은 주로 5월에 거행되기에(올해는 5월 29일) 우리가 성모 성월을 지내면서 전례 안에서 성모님의 삶,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되새기는 좋은 계기를 얻은 것이다.
성모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 예수님의 곁을 끝까지 지키셨으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명으로 사도 요한으로 대표되는 교회를 새로운 당신 아들로 품으셨다.(요한 19,25 참조) 또한 성령 강림을 기다리시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셨고(사도 1,14) 온유함과 겸손의 모성으로 성령을 받고 새로 태어난 교회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바로 우리가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는 이유이자 이 기념일을 교회가 시작된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날 지내는 이유이다. 성모님에 대한 이 호칭은 이미 성 바오로 6세께서 1964년 발표하셨고,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바티칸에 ‘교회의 어머니’ 모자이크를 설치함으로써 더욱 강조되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가 어머니 마리아를 본받아 여성적인 모성애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교회의] 여성적인 차원이 없을 때 교회는 참된 정체성을 잃게 되고 교회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 같은 무엇이 되고 맙니다.”(「바티칸 뉴스」 2018년 5월 21일자 참조) 따스하고 온유하며 자비로운 성모님의 마음, 사랑 넘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을 교회가 신자들에게, 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교황님은 강조하신 것이다.
올해 성모 성월에는 어머니 성모님의 따스한 품에 안겨 듬뿍 사랑 받으며 ‘자선단체나 축구팀의 구성원’이 아니라 따스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들이 되기를 다짐하며, 교회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묵주기도를 드려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