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사는 남한산성에 있었던 여러 사찰 중 하나인 漢興寺를 계승한 사찰이다. 남한산성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잠시 중단되었었고, 조선 인조 2(1624)년에 다시 축성을 시작해서 인조4(1626)년에 완공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축성과정에는 많은 승군이 동원되었고, 이들의 주둔지로 남한산성 안에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가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승군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이 더 필요해짐에 따라 조선 인조16(1638)년에 벽암대사 覺性에 의해 漢興寺를 비롯하여 開元, 國淸, 長慶, 天柱, 東林, 東壇 등 모두 7개의 사찰을 새로이 조영되었다. 이후 이들 9개 사찰은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지키는 수호사찰로서 존치되었었다. 영조33(1757)년부터 영조41(1765)년에 걸쳐 만들어진 지리서인 「輿地圖書」에는 이들 절이 모두 “俱在山城”, 즉 산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영조 연간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 들어와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고종21(1894)년에 이르러 승번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남한산성 안에 승군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승군은 폐지되었으나 이후에도 계속 사찰은 유지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던 중 1907년 가을에 일본군들이 남한산성 내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승군의 주둔지였고 아직도 많은 화약이 비축되어 있는 화약고가 있다는 이유로 남한산성 안에 위치한 모든 사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 파괴 양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남한산성내에 장경사를 제외한 모든 사찰이 폐사될 정도였다. 한흥사도 이때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 여래종 종정이신 석인왕 대종사께서 옛 한흥사를 재건하고자 1967년 3월에 이곳에 새로이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한흥사라 하였다. 신라 원효가 경찬한 묘법의 현의와 고려 재관법사가 흥전한 법화의 종지 등을 계승하여 호국안민과 제도세민의 현시구제를 목적으로 한 창건이었다고 한다. 이후 1968년에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현재의 이름인 약사사로 개명하였다. 대한불교여래종 총본산으로서 종정스님이 상주하고 계시며, 여래종 승려의 교육장이자 수행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사사 오르는 길
약사사 인왕문과 범종각
사찰 주위에서 수습한 석탑을 보수하여 쌓아놓았다.
숙현불 묘음대보살 사리탑
약사사 약사여래대불
약사사 대웅보전
약사사 성모전
약사사 성모전에 모셔놓은 숙현불 묘음대보살 사리
약사사 광장에 세워진 비로나자불
약사사 칠보연화탑
약사사 삼수자 지장보살
약사사 독성상
약사사 칠성단
약사사 산신상
약사사에서 바라다본 전경
약사사 대적광전
약사사 개인 소종
약사사 찾아가는 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송파나들목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송파나들목이 위치한 곳은 3번 국도와 이어지는 곳으로 서울의 송파대로와 연결된다. 송파타들목에서 나와 308번 지방도를 타고 성남시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수정구청에 약간 못 미친 곳에 남한산성 입구, 양지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남한산성과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공원을 지나 15분 정도 걸어 오르면 절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