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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가. 참고 구절과 해석의 열쇠
나. 하늘과 땅의 정체
다. ‘바라’와 ‘아사’의 차이
라. 야짜르의 의미
마. 번역의 한계와 왜곡 가능성
3. 결론
4. 한 줄 요약
5. 마무리
1. 서론
성경은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정신과 사상을 이끌어 온 기록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은 원문 자체가 아니라 오랜 필사와 번역, 그리고 해석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텍스트이다.
따라서 성경의 한 단어를 이해할 때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번역어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원문에서 어떤 문맥과 관계 속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창세기 1장과 2장은 성경 전체의 출발점에 놓여 있으며, 인간과 세계, 그리고 근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근원적인 언어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 눈여겨볼 단어가 바로 ‘바라(בָּרָא)’, ‘아사(עָשָׂה)’, ‘야짜르(יָצַר)’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단어들이 문맥에 따라 ‘창조하다’, ‘만들다’, ‘짓다’, ‘빚다’ 등으로 번역되지만, 각각의 용례와 문맥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창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세계가 어느 한순간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언어 속에는 인간 존재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근원으로부터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상징적 메시지도 담겨 있는 것일까?
이 글은 기존의 해석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문의 언어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창세기 안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2. 본론
가. 참고 구절과 해석의 열쇠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초기 기독교 문헌 가운데 하나인 도마복음에도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과 생명을 연결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러한 문헌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시의 영적 전통이 말씀의 외형보다 그 안에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역시 반복해서 ‘듣는 것’과 ‘깨닫는 것’을 구분한다. 말씀을 눈으로 읽는 것과 그 말씀의 의미가 자기 존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창세기의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흙과 사람’이라는 표현 역시 단순히 외부의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동시에 인간 존재와 인식의 구조를 비추는 상징의 언어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이 관점에서 창세기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만을 던지는 책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이 어떻게 드러나고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나. 하늘과 땅의 정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늘’은 히브리어 샤마임(שָׁמַיִם), ‘땅’은 **에레츠(אֶרֶץ)**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실제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의 언어는 언제나 문자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나 높은 차원의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땅’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과 삶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이러한 상징적 독법을 적용한다면, 하늘은 근원에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차원,땅은 그 근원이 구체적인 존재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지 창조’는 단순히 외부 세계의 생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근원이 드러나는 구조와 과정을 나타내는 언어로도 읽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문자적 해석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의미 위에 상징적 의미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창세기의 메시지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 ‘바라’와 ‘아사’의 차이
창세기를 읽다 보면 ‘창조하다’와 ‘만들다’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히브리어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라(בָּרָא)와 아사(עָשָׂה)이다.
1) 바라(בָּרָא)
바라는 성경에서 특히 근본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창세기 1장의 ‘창조하다’라는 표현에 사용된다. 그러나 바라를 단순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다’라는 철학적 정의 하나로 고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바라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상태를 이루는 행위라는 의미가 문맥에 따라 나타난다. 이를 상징적으로 읽는다면, 바라는 존재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것을 나타내는 언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전과 동일한 상태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것이다.
2) 아사(עָשָׂה)
아사는 매우 폭넓게 사용되는 동사로, ‘하다’, ‘만들다’, ‘행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아사를 무조건 ‘완성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원문의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문맥과 상징적 독법에서는 아사를 이미 주어진 질서 안에서 실제적인 형태와 기능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두 단어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바라 → 새로운 질서의 시작과 출현아사 → 그 질서가 실제적인 형태와 기능으로 나타나는 과정
이러한 구분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신학적 사유와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히브리어 단어 자체의 사전적 정의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의미에서 확장되는 상징적·영적 해석을 구별하는 것이다.
라. 야짜르의 의미
창세기 2장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사가 등장한다. 바로 야짜르(יָצַר)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근본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야짜르는 일반적으로 형성하다, 빚다, 형태를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에는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가는 이미지가 연결된다.
따라서 야짜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만들었다’는 결과만이 아니라, 형태를 갖추어 가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내면적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로서 단번에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형성되고 다듬어지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생각이 형성되고, 감정이 형성되고, 욕망이 형성되며, 자아에 대한 인식 역시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형성 과정이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를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는 표현은 인간 존재가 형성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언어로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밭’이라는 성경의 이미지와 연결한다면, 인간의 내면 역시 가꾸고 경작해야 할 하나의 영역으로 묵상할 수 있다. 밭이 어떻게 경작되느냐에 따라 그곳에서 맺히는 열매가 달라지듯이, 인간의 마음 역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키우느냐에 따라 삶의 열매가 달라진다.
마. 번역의 한계와 왜곡 가능성
성경 번역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원어 단어를 하나의 번역어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미의 차이가 희미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번역의 왜곡’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번역은 본질적으로 한 언어의 의미를 다른 언어의 체계 안에서 전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번역 자체라기보다, 번역된 하나의 단어만을 원문의 전체 의미와 동일시하는 것에서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라 = 창조하다, 아사 = 만들다, 행하다, 야짜르 = 형성하다, 빚다, 라는 차이를 살펴보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서술 방식에 일정한 언어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표현을 동일한 의미의 ‘창조’로만 이해한다면, 본문이 보여주는 미세한 언어적 구조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기존 번역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 → 번역 → 문맥 → 상징적 의미라는 여러 층위를 함께 살펴보는 태도이다.
특히 외경이나 초기 기독교 문헌에 나타나는 ‘하늘과 땅’의 표현 역시 그 문헌의 역사적·문학적 맥락을 먼저 살펴본 뒤 상징적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문자와 상징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서 상징으로, 상징에서 존재의 의미로 나아가는 읽기를 시도할 수 있다.
3. 결론
창세기를 단순히 ‘세계가 만들어진 이야기’로만 읽으면 그 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동사와 표현들의 차이를 충분히 바라보기 어렵다. 바라, 아사, 야짜르. 이 세 단어는 동일한 하나의 의미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
- 바라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 아사는 행하고 만들며 이루어 가는 과정을,
- 야짜르는 형태를 갖추어 가는 형성의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를 바탕으로 창세기를 상징적으로 읽으면, ‘창조’라는 개념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을 넘어 존재가 드러나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하늘과 땅 역시 단순한 우주 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 보이지 않는 근원과 그것이 드러나는 영역이라는 상징적 구조로 묵상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근본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그 창조의 언어가 오늘 나의 존재 안에서는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성경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새로운 말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게 읽어 왔던 말씀을 다시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언어와 구조와 상징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은 결국 인간의 외부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 언어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생명의 질서가 어떻게 드러나고 형성되어 가는지를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4. 한 줄 요약
창세기의 ‘창조’는 단순히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언어를 넘어, 근원이 드러나고 존재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
5. 마무리
우리는 오랫동안 성경을 번역된 문장으로 읽어 왔다. 그 번역은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 준 소중한 통로이지만, 번역된 단어 하나가 원문의 모든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익숙한 번역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번역 너머에 있는 원문의 세계를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창조’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맥과 의미가 존재한다.
바라에서 시작되고, 아사로 드러나며, 야짜르를 통해 형태를 갖추어 간다. 이것을 인간의 내면에 적용하여 묵상한다면, 신앙 역시 단순히 무엇인가를 믿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이 드러나고, 굳어진 마음이 갈아엎어지고, 내면의 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며, 마침내 존재의 열매가 나타나는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말씀은 과거에 있었던 창조의 기록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존재 안에서 읽혀야 할 생명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문자를 넘어 의미를 보고, 의미를 넘어 존재를 보고, 존재를 넘어 그 근원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창세기의 첫 문장 앞에서 다시 질문하게 된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그리고 그 질문은 마침내 우리 안으로 돌아온다.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
그 생명의 그 빛(근본)! 그 빛은 새로운 것을 밖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원에 있는 생명이 내 존재 안에서 드러나고 형성되도록 하는 길을 비춘다. 창조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생명이 다시 드러나는 과정을 읽는 것이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