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외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화려한 무늬
찔레가시덤불 속 어둡다
이마에 가시가 찔린
뱀이 허물을 벗는다
눈동자에서
허물이 떨어질 때
뱀이 처절하게 아가리를 벌린다
저, 감옥 같은 그늘 속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마디마디 허물이
벗겨질 때
깊이 새겨져 있던
화려한 무늬가 다시 살아난다
지울 수 없은 죄로
신음하는 소리
저렇게 고요할 것이다
입가에 물집처럼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쫒겨가는
통계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그림자 속으로
심장 높이쯤 열쇠를 넣고 손잡이를 당기면
철문앞에 서 있는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뒹구는 신발들 사이에
술 취한 구두를 슬쩍 벗어놓고
아 그렇다고 성급하게 불은 켜지 않습니다
희미한 살림들
잠이 확 깰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빗자루처럼 내 그림자 등에 기대어 앉아
거실 바닥 불빛 창문을 희망이라도 된 듯 쓸어 보아 봅니다
똑같은, 똑같은 소리로 벽을 걸어가는
시곗바늘 뒤꿈치에
나는 내 그림자를 걸어놓고
달빛 위에 가만히 누워
방 안 푸른 그림자 숲을 둘러봅니다
그녀가 돌돌 말고 자는 옥수수 그림자와
창문을 또렷이 넘어와 흔들리는 콩줄기 그리고 가을로 휜 풀잎들
나는 내 그림자 열쇠를
가끔 잃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동박새
그는 동박새
도시에서 집을 짓는 그는
빨간 코팅장갑을 끼고
철근 몇 가닥 어깨에 메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요
목수들 망치소리 들려와요
동백은 저렇듯 멍물로 꽃 피워요
산이 쩌렁쩌렁 붉어요
핑 쇳소리 내며 떨어져요
참 헐렁해요
녹슨 꽃을 밟기도 해요
피멍이 든 못 자국 망치로 두들겨요
바람은 차갑고 도시는 안전화보다 안전하지 못해요
그는 동박새
절뚝절뚝 날아가요
철근이 휘청거리는 리듬을 타고
등 뒤로 힘껏 부딪쳐야 높이 오를 수 있는 거예요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살 거예요
그는 동박새
철근을 내려놓고 코팅장갑을 꼭 쥐어 봐요
해 하나 또 지고요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꽃이라고 부른다
나는 꽃을 꺾어 해안에 던진다
새들이 부리를 닦고 바위에 사람 이름을 새긴다
눈썹처럼 돌아온 새가
차갑게 우는 것은
아직도 저녁 불빛을 향해 배 위를 달려가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등대라고 부른다
나는 불빛을 꺾어 바위에 던진다
새들이 침묵을 물고 바위 속에 제 그림자를 접어 넣는다
말갛게 씻긴 발을 들이고 신열에 떨며 몸을 웅크린다
새들이
눈을 감고 바라보는 낡은 부리에는 어느 백랍 같은 영혼의 냄새가 묻어 있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안식처라고 부른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기로 한다
어두운 심연에서 떠오른 안개가 거대한 혀로 바위를 삼키고 해안을 점령한다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던
검은 배가 처량한 뱀의 소리를 내며 부두에 와 닿는다
안개 속에서 폐허가 된 마을로 걸어가는 젖은 발소리가 들린다
짙은 안개는
새들의 바위를 다 어쨌을까
안개 소으로 섬이 사라지고
죽은 이름들 밀려오는 밤이면 새들은 꽃을 먹지 않는다
돌과 잠자리
잠자리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돌을 읽는 동안
나팔꽃 한 줄기
나뭇가지 그림자 위에 헛발을 딛습니다
잠자리 한 마리 돌의 중심을 갸웃갸웃 읽어가는 동안
사내는 나무 그늘 밑으로 손 그림자 가만히 내밀어
확 잠자리 꼬리 잡아 봅니다
떴다 앉았다
잠자리 한 마리
비밀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돌의 한쪽 모서리 다 읽어 가는 동안
마당가에 해바라기
먼 길 바라보다 까맣게 익은 얼굴 떨굽니다
이제 기다림이
사내의 한쪽 모서리를 초조하게 읽어가는 동안
구겨진 돌멩이 다시 제 몸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속눈썹을 믿지마라
흔들다 두드리다 끌어안고 주저앉는다
이럴 수가, 남자는
가로등 눈빛이 초조하게 흔들린다
하천에서 안개가 피어나고
남자는
길 위에 흩어진다
새 한 마리 울분을 토하며 날아간다
안개는 부패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궁창을 건너왔다
안갯속 가로등 꽃말이 지워지고 황홀한 눈썹이 사라진다
믿을 수가 없다, 남자는
안갯속
가로등 충혈된 눈동자 남아 있다
오늘 밤, 가랑비가 내리고
그 남자
또 가로등 아래 서 있다
그 남자 어깨가 빗물에 씻겨 내린다
아스팔트 바닥에 번들거리는 불빛 하천으로 흘러든다
가로등의 긴 눈썹
아파트 창문까지 휘어져 와 닿는다
보라, 속눈썹 없다면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 있겠는가, 속지마라
눈을 질끈 감으면
끔찍하게 떠오르는 눈, 제발 믿지마라
새의 기억
나무 그루터기 위에 눈이 쌓였습니다
새 한 마리
눈 위에 발자국을 놓고 갔습니다
가늘게 찍힌 발자국
어미 새의 생생한 기억일까요
밤새, 가지가 부러져 내려
얼키설키 쌓인 눈
한 때 받아먹던 환한 둥지일까요
그루터기 위 쌓인 눈
톱날 자국 밀어내며 가장자리부터 녹습니다
순백의 눈 아우성을 치며 사라집니다
우람한 바람
긴 가지를 늘어뜨리며 쓰러집니다
얼어붙은 새 발자국
물컹,
물이 되는 새 발자국
그루터기 중심을 향해 스며듭니다
발목
해는 수평선 붉게 침몰하고
섬에 불빛 몇 못 박힌다
나는 어느 해안에 밀려와
등이 반쯤 지워진 내 품
무릎을 꺾어 끌어안아 본다
허덕이며 날아오는
저 새 Ep
어깨뼈가 이렇게 시릴까
해안에 희검게희검게
이름을 파묻고 몸부림치는
파도의 발목 이렇게 아플까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살아가는 것들
어두운 제 품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이 저녁 나는
끝내 건너지 못할 내 몸
어디에 눕힐 것인가
가눌 수 없던 기억들
무릎을 욱신거리며 별이 눈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