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9신]친애하고 사랑하는 나의 큰 누이야
친애하고 사랑하는 큰 누이야.
진짜 큰일났다. 성탄절, 연말연시가 연휴인데도, 가족모임조차 5인이상은 하지 말라 달라는 국가의 방역수칙이 시간마다 뉴스에 나오고 있다. 세상에 어디 이런 법이 있다더냐? 지난 추석 때에는 성묘도 삼가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가다간 부부관계도 나라에서 간섭할 날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냐 싶다. 흐흐.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발한 창의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추석 때에는 동네 어귀에 ‘불효자는 꼭 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사진이 카톡에 오르더니, 이번에는 드라마 <미실>의 한 장면이 돌아다니더라. 미실역의 고현정이 ‘서라벌 성내에 다섯 사람 이상이 모이지 말라’는 위국령衛國令을 선포하는 장면이 기억나나? 신라시대에 이미 5인이상 집합금지를 시킨 사실이 있다는 설명과 함께. 참 재밌다못해 서글프다.
어제 하루의 얘기를 하고 싶어 모처럼 새벽 손편지를 쓴다. ‘착한 하루’를 보낸 자랑도 겸해서 말이다. 마을회관이 폐쇄됐다. 농한기인 겨울 동안 회관에서 한낮을 보내며 점심을 같이 먹는 ‘미풍양속’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시골은 저절로 ‘집콕’하며 산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쌀로 가래떡을 빼기로 한 모양이다. 그제 툇마루에 놓인 가래떡 한 박스를 열어보니 뜨끈뜨끈, 미끈미끈 금방 먹어도 맛있는 가래떡 40개가 들어있더구나. 아버지와 함께 아주 빼빼 마르기 전인 적당히 꾸덕꾸덕할 때 떡살로 썰어놓았다. 칼로 썰기보다 가위로 자르니 더 편하더라. 떡을 썰면서 한석봉의 어머니 생각도 났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할까? 곧바로 전주의 작은엄마와 이모가 생각났구나. 아버지도 좋은 생각이라며, 이왕이면 당신이 엊그제 맨 쑤시비짜리도 갖다주면 좋겠다 하셨다. 왜 아니겠냐? 뚤방(토방)이나 거실을 쓰는 데는 최고일 뿐아니라, 시방은 귀물貴物이 아니더냐? 오일장에서 돈 주고도 잘 살 수 없는. 더구나 구십 중반의 시숙이고 형부가 직접 만든 것임에랴.
너도 알다시피 운전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이지만, 그분들을 위한 일이니만큼 모처럼 용기를 냈다. 노지露地시금치와 봄똥도 뜯어 똑같이 나눠 넣고, 비비고 사골곰탕과 육개장도 두 개씩 넣으니 봉투가 제법 묵직하다. 이런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겠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해오셨던 일을, 이제 시골에 사는 내가 틈만 있으면, 누가 오든 보따리 챙기기에 바쁘다. 흐흐.
3년 전 부계父系론 유일한 친척인 숙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숙모. 평생 땅만 파신 어머니에 비해 많이 쿨cool하신 숙모는 도시의 서민이었다. 사남매를 가르치기 위하여 고생도 참 많이 하셨다. 팔북동 의류공장에서 십 수년간 일하시며 진폐증 비슷한 병도 겪었다. 젊어서는 참 많이 아프셨다. 심하게 아플 때마다 하숙생들 밥을 지으러 몇 번이고 다니던 큰 동생(고등학생이었을까) 생각도 나더구나. 이제 홀로 되어 얼마전 양쪽 무릎관절 수술을 했는데, 요즘에는 이유없는 구토로 요 며칠 크게 고생을 하고 계시더라. 내주초 대학병원에 가셔 종합검진을 받은다니,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터인데, 반색하는 숙모를 뒤로 하고 이모를 찾았다. 외로움에 병까지 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짜안했다. 저녁판에 전화를 하셨더라. 조카가 봄똥 갖다줘 양념장에 잘 싸먹었다고, 입맛 없는데 오래간만에 밥 잘 먹었다며 치하를 해싸썼다.
이모는 마침 마당에서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고 계시더라. 양로당 못간지도 몇 달이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우리 엄마처럼 “영뇍이 왔냐?” 활짝 웃으며 반기는 이모의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싶으면 이모들을 찾는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느꼈다. 입관할 때 보니까 어머니의 얼굴이 어찌 그리 오래 전에 돌아가신 큰이모와 똑같든지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조카에게 무엇이라도 주려고 마음 쓰시는 이모는 소파에서 “잘 왔다. 잘 왔다”하며 계속 내 손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더니 끝내 ‘신사임당’을 쥐어 주신다. 내가 용돈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이모는 2남7녀중 네 번째. 올해 89세이다. 이모와 함께 학창시절 추억을 나누는 짧은 시간이 너무 좋았다. 총기聰氣(기억력)가 아버지 못지 않게 좋더구나. 일곱 자식 뿐만 아니라 큰집 조카 다섯명이 어느 중고교를 다녔다는 것까지 외고 계시니 말이다. 진심으로 백수를 빌었다. 외가 식구들중 최장수 기록을 깨시라고 말하니 질색팔색 팔을 저었다. “그때까지, 백 살까지 살아 머더게? 자식들 괴롭게 허먼 쓰간디” 당신의 피붙이(외조부모와 이모, 외숙 등)들의 돌아가신 나이를 줄줄줄 대는데, 우리 어머니가 90세로 가장 오래 사셨다는데, 당신이 그 뒤를 잇고 있다고 하시더라.
모처럼 ‘착한 일’로 착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얘기를 글로 수다떨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쓴다. 동생아, 나의 큰 누이야. 너를 생각하면 왜 그런지 나보다 더 나이 먹은 누나처럼 생각되는 때가 많았다. 줄줄이 오빠가 넷이나 되는데도, 큰딸이라는 ‘죄’로 어머니를 가장 많이 도와준 착하고 부지런한 누이야.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구절이 생각나는, 장꽝같은 누이야. 하서방이 정년퇴직 후 제2취업으로 인천으로, 세종으로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졸지에 주말부부가 되어 마음이 늘 바쁜, 돈 좀 벌어 길바닥에 쏟아붓는다는 옛날 할머니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한 달에 교통비만 50만원이 든다고? 게다가 시집간 딸의 호출이 오면 꼼짝없이 의왕으로 달려가야 하고, 아들녀석의 뒷배도 좀 봐준다며 한 달에 한번은 서울로 가야 하니, 네 집 살림을 하는 셈이 벌써 몇 년이 된, 친애하고 사랑하는 나의 누이야.
사는데 서툴고 어설픈 오라버니인 내가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 시골까지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오가니,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판인 누이야. 오죽하면 아버지가 별명을 ‘최청’이라며 누이를 심청이에게 빗댔겠냐?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가족’밖에는 없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느낀다. 가족이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을. 어제 이모와 숙모를 뵙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들으면서도 그분들의 머리에도 온통 자식들 생각으로만 가득하더라. 왜 아니겠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식들 걱정으로 지새우는 부모들의 인생에 숙연해질 때가 참 많다. 우리는 때때로 경건해질 필요가 있다. 육십을 훌쩍 넘은 아들이 해 저무도록 오지 않으면 걱정전화를 해대는 우리 아버지, 아들이 술생각날까봐 즐기는 반주조차 하지 않는 94세, 아니 내일모레 95세인 아버지.
이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 우리의 자랑을 세상천지에 누가 해줄 것인가? 옛날엔 듣기 싫었는데, 요즘은 은근히 자식 자랑하면 제지하지 않는다. 그것 말고는 하실 말씀이 얼마나 있으랴 싶어서다. “넷째 덕분에 조선천지에 맛있는 것 다 얻어먹고 산다”는 말씀에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잘 한 일이 있다면 이 한 가지다. 당신이 어느 때부터 배워(아마도 ‘똑똑새’ 둘째누이가 반복학습으로 가르치지 않았을까?) 전화를 하거나 문자로 카톡을 날리실 때마다 후렴구처럼 하시는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처음 들을 때에는 너무 어색하고 닭살이 돋는 듯했지만, 지금 아버지 나이에 이런 말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계실까? 아마 유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가족끼리 아끼고 사랑하며, 일가들과 사이좋게 안부도 물어가며 건강하게 살면 그보다 더 좋고 감사할 일이 어디 있을까? 내가 늘 말하는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냐? 시간만 되면 이모와 숙모를 또 뵈러 갈 생각이다. 손을 부여잡고 연신 쓰다듬으며 놓을 줄 모르는 '우리의 살아있는 어머니'가 아닐 것이냐. 나도 아버지처럼 말하겠다. 큰동생아,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 좋고 착한 마음으로 이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자. 얼굴 맞대며 즐거운 시간 보내기도 어려운 세상이 겁이 나고 두렵구나. 나훈아의 노랫말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죽어도 오고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처럼, 아무쪼록 늘 잘 지내기 바란다.
2020년 세밑에
고향에서 못난 오라버니 쓰다
첫댓글 우리 엄마는 여동생을 왜 안 낳았을까?
하기사 마흔줄에 그것도 낳기 싫었는데 어쩌다 생겨서 큰아들 고등학교 졸업할때쯤 나를
나셨으니 우리 큰형님 82세 이시네
살아오면서 가장부러운게 여동생있는 친구들이 젤 부럽더라.
지금도 오빠라 부르는 동생들은 있지만 어찌 피붙이 동생보다 정겨우라?
가끔은 나이든 오빠 안부도 물어오고
귀찮게하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