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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전에 빠진 미쓰비시 협상 |
2012년 첫 시작된 미쓰비시와의 제13차 교섭(2.14일.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교섭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해 온 가운데, 앞서 12차 협상(2011.12.26일)에서 부족하지만 일보 진전을 이끌어낸(미쓰비시측,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끼친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한 문서를 협상단에 제시, ‘역사적 사실 인정’ 문제는 협상단이 일관되게 강조한 첫 번째 선결조건이자 첫 관문이었음)터라 새해 첫 시작된 13차 교섭에 대한 기대감은 남달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미쓰비시는 다시 똬리를 틀었다. 이미 속내를 언급한 바 있지만 미쓰비시측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성격의 금전 지불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협상은 공전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미쓰비시를 견인, 제압할만한 마땅한 힘이나 수단을 쥐지 못한 현실에서 시민모임은 다가오는 4.11일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작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외면과 18대 국회의 무력감을 누구보다 깊게 체감한 터라, 만약 19대 국회에서 민주개혁진영이 승리해 국회 다수 의석을 점할 경우 교착 상태인 미쓰비시와의 협상에 지금보다는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일단 협상을 서두르지 않고 4.11 총선결과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해방 67년, 오늘은 할머니들에게 첫 봄입니다” |
이 무렵 광주시의회에서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활동 이후 가장 큰 정치적 결실이 맺어지고 있었다. 김선호 교육의원이 발의한 ‘광주시 여자근로정신대 지원 조례’가 3.15일 광주시의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전국 최초의 근로정신대 지원 조례가 제정된 것이다.
광주시 근로정신대 지원 조례는 할머니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월 30만원의 생활보조금, ▲의료비 월 20만원 이내 본인부담금 지원, ▲사망시 장제비 100만원 지원 등)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가려 그동안 세간의 관심조차 받아오지 못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지방정부에 의해 공식 명예회복의 길을 텄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달리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그동안 정부 지원에서 일체 배제돼 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전국에 분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광주에서 첫 조례가 제정될 수 있었던 데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의 역할을 빼 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시민모임이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시민들과 함께 벌여 온 일련의 줄기찬 투쟁이 조례 제정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3.15일 양금덕 할머니와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회원들은 “해방 67년, 오늘은 할머니들에게 첫 봄입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본회의장을 빠져 나오는 광주시의회 의원들 가슴에 장미꽃을 선물했는데, 1991년 광주시의회가 개원한 이래 의원들이 의정활동과 관련해 시민들로부터 장미꽃을 선물 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 조례는 다른 지방의회로도 곧 확산돼 경기도의회가 10.17일 같은 내용의 조례를 제정해 2013년 1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며, 서울시의회도 현재 같은 내용의 조례가 발의된 상태이며, 전남도의회 한 의원도 발의를 준비 중이다. 이와 관련해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정혜경 과장의 숨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4.11 총선후보 정책 질의 운동 |
4.11 총선을 앞둔 시민모임은 각 당 전국의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상대로 정책질의 운동을 벌였다. 총 17개 문항의 질문서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 근로정신대, 99엔 사건, 미쓰비시와의 협상, 일제피해자 지원재단 필요성 등을 망라한 것이었다. 질문지 수합결과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제19대 총선 지역구 당선자(246명) 대상 정책 설문 조사에 겨우 95명(38.61%)이 응답했는데, 특히 새누리당은, 지역구 당선자 127명 가운데 27명(21.3%)만이 조사에 응해 소속 정당별 현황 비율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만족할만한 회수율을 얻지 못했지만, 지방에 있는 작은 시민단체가 전국 19대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상대로 처음으로 시도한 정책질의 운동이었고, 부족하지만 이 결과는 19대 국회를 견인·압박해 갈 수 있는 단초를 남겼다는 점에서 남다른 경험과 의미였다.
4월 총선 결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18대 보다 오히려 상황은 국회 내 정치적 환경은 악화되고 말았다. 한편, 4.11 총선 과정에 미쓰비시와의 협상단 멤버 중 한명인 이상갑변호사가 출사표를 던졌지만, 야권단일화라는 뜻하지 않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본선 출마 자체가 좌초되는 불운을 맞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총선을 미쓰비시와의 협상에 하나의 지렛대로 삼고자 했던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심한 세월... 이금주 회장님 광주 떠나다 |
5.7일 도쿄에서 가진 15차 협상에서 미쓰비시는 완강하고 고압적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해결책을 종용하는 협상단에 미쓰비시측이 내 놓은 최종 제시안은 일본에 공부하러 오는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장학기금 운영 계획.
금액을 떠나 할머니들에게 지급되는 방식이 아닌 한 어떠한 안도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협상은 파국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격앙된 목소리가 오고 간 가운데 이제 협상단은 협상을 더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미련을 버리고 돌아올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다시 투쟁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고 있었다.
5.12일 우리는 또 하나의 아쉬운 장면을 맞아야 했다. 2011년 봄 한달 새 연거푸 며느리와 아들을 먼저 보낸 이금주회장(93)님이 여러 이유로 그동안의 광주 생활을 접고 손녀가 있는 순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일제에 남편을 빼앗기고 평생을 일제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한 길을 달려오신 이금주 회장은 대일 과거사 투쟁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이 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기도 했다. 결국 세월에 빛이 바랜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간판이 내려지고, 본인이 간직해오던 유족회 각종 활동 자료들마저 시민모임을 거쳐 결국 5.18기념재단에 보관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5.18일 새벽 1시39분 일본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한국의 세 번째 다목적 실용위성인 아리랑 3호가 미쓰비시중공업에 의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는 소식이 타전되기에 이르렀다.
대법원 판결 외면한 MB... 미쓰비시의 으름장 |
미쓰비시와의 협상 결렬을 눈앞에 두고 있던 5.24일 오전 극적인 낭보가 전해졌다. 대법원이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1심, 2심의 결과를 뒤집고 12년 만에 원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앞서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로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이 일본에서의 소송 패소 후 다시 2000년 한국 법원에 최초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일본에서의 판결 결과 등을 이유로 연거푸 패소한 상태였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대신해 변호를 맡은 최대 로펌 김앤장과 맞서 장장 12년을 외롭게 싸워 온 최봉태 변호사의 숨은 뒷 얘기와 더불어, 정작 5명의 원고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 사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는 소식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5.25일자 중앙 일간지의 1면 톱기사는 모두 대법원 판결 보도가 장식하고 말았다. 연이어 한겨레가 3일 연속 관련기사를 통해 1면 톱기사 쏟아내는 등 대법원 판결로 가장 시선이 모아진 곳은 바로 시민모임이었다.
마침내 한국법원을 통한 일제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의 길이 터지면서, 미쓰비시 협상도 결정적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예기치 않는 징용피해자들까지 소송을 통해 배상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마당에 미쓰비시 측 입장에서 볼 때 이미 협상장까지 마련해 논의하고 있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외면한다고 해서 얻을 이익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축의 시간도, 환희의 감격도 잠시였다. 언론을 통해 우회적으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석연치 않은 눈빛을 보내던 외교부가 5.29일 대변인 입장을 통해 정부정책의 일관성을 구실로 ‘대법원 판결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설마 이렇게까지야...' 했던 일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이 무렵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동향을 가장 먼저 포착하고 이를 강하게 규탄한 곳은 시민모임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모임은 5.29일 규탄 성명을 내보낸데 이어, 5.31일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 이어 외교통상부 앞에서 연거푸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사법적 결정을 능욕한 이명박 정부를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결정적 반전의 호기를 한국정부가 스스로 포기한 여파는 곧 협상장으로 이어졌다. 사실 한국 대법원 판결 직후 미쓰비시는 한때 몸을 낮추는 듯 했다. 16차 협상에 앞서 가진 예비회담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미쓰비시가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정부 의사를 확인한 후 태도를 180° 바꾸고 말았다.
7.6일 미쓰비시중공업 중부지사(나고야)에서 가진 16차 협상. 미쓰비시는 대법원 판결 이후 밝힌 한국정부의 입장표명을 근거로 이미 끝난 문제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미쓰비시가 한국정부 입장을 오히려 협상단의 요구를 거부하는 논리적 근거로 삼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협상단은 결국 예정된 데로 결렬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렬 선언에 의외로 당황한 것은 미쓰비시였다. 거듭, 결렬이 아니라 협상을 잠시 중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는 것. 그러나 협상단은 그런 미련까지도 깨끗이 버리기로 했다. 2010년 7월 14일 미쓰비시가 협상장 설치를 동의한 이후 만 2년만이었다.
실패의 후유증...다시 내딛는 발걸음 |
한국정부의 무관심과 정치권의 외면이 빚은 예정된 결과였지만 총체적인 평가는 다시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냉정히 말해 힘과 힘의 대결이었고, 힘과 힘의 대결에서 감히 이성이 낄 여지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정부는 어느 한때 우리 편이 되지 못했다. 특히 동북아 정치질서에서의 한미일의 특수한 관계, 후술하겠지만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영토분쟁이나 한일청구권 문제에서 보듯, 사안에 따라 한일 양국이 때론 전략적 파트너로서 기능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엄존하는 정치적 현실을 너무 간과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대목이다.
시민모임의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근래 광주지역에서 이처럼 장시간에 걸쳐 시민적 성원과 염원을 모아 온 사안이 없었던 데다, 이유야 어떻든 협상 당사자로서 시민모임이 안고 있었던 정치적 부담을 떨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극적으로 65년 만에 제1의 전범기업을 협상장으로 끌어냈으나 2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협상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엄습하는 무력감과 허탈감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 동안의 침묵을 딛고 시민모임은 7.21일 남원에서 ‘반 미쓰비시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19명이 참석한 가운데 워크숍을 가졌다. 격론 끝에 우리는 협상 결렬로 우리가 실패한 것은 아니며, 좌절감을 뒤로하고 불매운동을 시작으로 다시 전열을 정비하기로 했다. 일본의 양심적 지원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역시 8.10일부터 다시 전열을 정비해 2010년 7월 중단된 도쿄 금요행동을 만 2년 만에 다시 재개할 것을 예정하고 있었다.
영토분쟁 속 조성된 한일 신 냉전 |
8월로 접어들면서 한일 양국 정부 간에 근래 없었던 외교적 설전이 새로 시작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비밀리에 한일군사보호협정을 추진해 오다 국민적 반발에 부딪혀 큰 곤혹을 치렀던 이명박 정부가 7.31일 일본정부가 국방백서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을 기점으로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급기야 현직 대통령 최초 독도방문에 이어 일왕 사죄 촉구를 직접 언급하는 등 그동안 보여 준 행보와는 180° 다른 대일 강경 기조로 한일 양국에는 전례 없는 첨예한 갈등국면이 조성됐다.
한편에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한일 양국의 이 같은 정세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는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본 내 양심적 시민세력들은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지고 말았고, 과거사 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우리의 목소리마저 자칫 이명박 정부의 대일 기조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은 의외의 결과로 작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9.4일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중인 일본 NGO 단체들의 연합체인 ‘강제연행·기업책임 추구재판 전국네트워크’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을 통해 성명을 보내 독도 문제로 비롯된 한일 간 영토분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입장과 함께 대결적 영토분쟁이 가져 올 파급에 깊은 우려를 전한바 있다.
다시 시작된 미쓰비시 불매 선언운동 |
7.6일 협상 결렬 후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시민모임은 9.26일 미쓰비시 불매 선언운동 기자회견을 통해 본격적인 불매운동에 나섰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이미 8.10일 왕복 720km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미쓰비시 본사 앞 도쿄 원정 금요시위를 2년 만에 재개하며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 발 늦은 것이었다. 그만큼 협상 결렬 이후 상황을 반전시켜 나갈 시민모임의 운신 수단이 많지 않았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협상까지 결렬된 상황에서 불매운동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양에 차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매운동에 대한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사죄 촉구라는 지극히 당위에 그친 주장에서 탈피해, 특정 전범기업, 특정제품 불매운동이라는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인 방식을 통해 새 국면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불매운동이 가지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그 한 예로 미쓰비시 불매운동이 없었다면 '니콘(Nikon) 카메라'가 미쓰비시 자회사였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지금까지도 잘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불매운동은 9.15일을 시작으로 매주 토요일, 일요일 무등산 증심사 입구를 중심으로 전개한 거리 캠페인을 통해 다시 활력을 맞았다. ▲2010년 미쓰비시 사죄 촉구 서명운동, ▲2011년 10만 희망릴레이에 이어 3년째 내리 계속된 거리 캠페인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이 충분히 쌓였을법했지만, 현장에서 만나 본 시민들의 기대감과 염원은 협상 결렬 여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식지 않았음을 오히려 확인하는 자리였다.
한편, 매주 금요일 도쿄 금요행동과 연계해 SNS를 통해 '금요일은 반(反) 미쓰비시 데이(Day)'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금요행동'을 전개했는데, SNS를 통해 불매운동을 확산시키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참여도 면으로 볼 때 애초 기대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거리 캠페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 불매운동이 얼마나 위력 있게 전개 됐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실제 불매운동의 효과를 가져 오기에는 품목 선택에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는 점, 대통령 선거 일정으로 인해 다른 때와 달리 동력 형성이 쉽지 않았던 점, 움직일 수 있는 시민모임 자체 동력이 여의치 않았던 점 등이 우선 검토될 수 있겠다. 그러나 거의 자력으로 2달 반 만에 1만명 불매선언을 조직한 것은 여전히 흔치 않는 일이자, 결코 가볍게 평가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신 독립군 ‘1만 CMS' |
한편으로, 신독립군 1만 CMS 운동이 시동을 걸었다. 향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투쟁을 위해 매월 일정액(1,000원 부터~)을 후원할 신독립군 1만명을 조직하자는 7.21 남원 워크숍에서의 결의사항 중 하나였다.
“제 손에 있는 협상 자료집이 정부의 외면 속에 2년 동안 제1의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상대로 일개 시민단체가 싸워 온 기록입니다. 저는 굶었으면 굶었지 제 입으로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일만큼은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안 되면, 우리 자식들이라도, 우리 자식들이 안 되면, 우리 손주들이 대를 이어 싸워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9.3일 동부교육청. 김선호 광주시교육의원은 이날도 주저 없이 근로정신대 투쟁을 화두에 올렸다. ‘청렴’을 주제로 한 초청강의 현장에서 대 놓고 후원을 말씀하시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러나 누구하나 이런 말에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몸소 삶으로써 보여 온 '김마담' 만이 가능한 정치적 힘이었다.
이를 위해 김마담은 스스로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공동대표를 자처하고 나섰다. 감히 사명감이 없다면 못할 일이었다.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매번 근로정신대 투쟁 사진전을 병행하는 것은 실무적으로 적지 않은 수고가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몇 사람이 눈길을 보내더라도 공감하는 단 한 사람의 눈길이라도 붙들기 위해 번거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사진전을 열었던 이러한 끈질긴 노력 끝에 1천원(또는 2,000원) CMS는 어느새 500여명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시민모임 투쟁에 함께할 새로운 동력을 확보해 간다는 차원에서 또 하나의 조직적 성과가 아닐수 없다. 다만 '1만 CMS' 결의가 시민모임 전체 회원의 실천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제2의 법정 투쟁... 미쓰비시, 광주지법에 손배 소송 |
10.24일 反 미쓰비시 운동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시작됐다. 5명의 원고 이름으로 미쓰비시중공업을 광주지방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5.24 대법원 판결 결과가 제소로 이어지게 된 결정적 배경이었다.
협상 결렬이후 반 미쓰비시 전선의 하나로 곧바로 소송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금요행동을 재개한 이유 중의 하나도 한국에서의 제기될 소송을 염두에 둔 것을 감안하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소송에 대한 기대감은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다카하시 마코도 대표는 “광주 지방법원에의 제소는, 원고인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한▪일의 지원 단체에 있어 승리로 향하는 길’”이라며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는 이제 퇴로가 없다”는 말로 이날의 감격을 대신했다. 1999.3~2008.11월 까지 근 10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소송투쟁, 그로부터 2년 후 미쓰비시의 극적인 협상 수용, 그러나 2년 만에 협상 최종 결렬, 한국에서 다시 시작된 제2의 법정투쟁... 짧게는 일본에서 소송이 시작된 1999년, 멀리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처음 근로정신대 사건을 인지한 1986년부터 줄곳 이 일에 매달려 온 다카하시 마코도 대표가 느끼는 감회는 남다를수 밖에 없었다.
소장을 들고 원고들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으로 당당히 향하는 역사적 장면은 시민모임 역사에 또 하나 길이 간직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소송은 이상갑변호사 등 9명의 공동변호인이 맡게 되며, 미쓰비시 측의 변호인이 선임되면 2013년 초부터 본격적인 심리가 전개될 예정인데, 2013년을 가름짓는 가장 큰 변수 중의 하나가 될 전망이다.
19대 대선의 좌절... 한일 보수 정권의 재등장 |
가을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국정감사에서는 시민모임에서 거듭 문제를 제기해 온 것과 같이 국가발주 사업에 대한 일제 전범기업 입찰 문제가 거듭 지적됐다. 방위사업청은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과 군수물자를 계약하고, 한전 자회사들의 화력발전 시설 공사는 미쓰비시와 히타치가 주요 부품 시설 입찰을 싹쓸이한 것이 드러났다. 아울러 4대강 홍보관 영상장치 또한 100% 일제 전범기업 제품들로 채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발주사업 입찰 제한 조치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한편 정국은 급속히 12월 18대 대통령 선거로 흘러갔다. 18대 대선은 시민모임 향배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수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10.25일 문재인 후보의 배우자 김정숙 여사가, 이어 11.8일 안철수 후보의 배우자 김미경 교수가 시민모임과 양금덕 할머니를 찾아 마음의 뜻을 보태왔다. 후보는 아닐지라도 유력 대선 후보의 배우자가 바쁜 일정을 쪼개 근로정신대 투쟁에 관심을 보인 점은, 5.1일 광주시와 시민모임이 MOU(양해각서)를 체결한 것과 함께 시민모임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12.19 대선 결과는 기대 밖이었다. 특히 문재인 후보는 5.24 대법 판결로 귀결된 2000년 미쓰비시 소송 당시 최봉태 변호사와 함께 공동변호인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일제 전범기업 입찰 제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남다른 해결 의지를 밝힌 바 있어 허탈감은 더했다. 반면 박근혜 당선자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대표적 친일 민족반역자이자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오늘의 한일 관계를 뒤틀어지게 만든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동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도 이렇다 할 입장을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전망 역시 극히 어두운 상황이다.
비단 국내 상황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12.16일 치러진 일본 총선에선 민주당이 궤멸상태로 패배하고 자민당이 의석을 싹쓸이 하면서 A급 전범의 후예 아베가 다시 총리에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우려한 바대로 아베는 작년 8월 한국의 독도 지배 강화 실태를 살펴보겠다며 울릉도 방문길에 나섰다가 김포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된 극우 정치인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54) 전 경제산업성 부대신과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53) 전 자민당 부간사장을 각료에 기용하는가 하면, 총련계 조선학교에 대한 무상화 계획 유보를 첫 카드로 제시했다.
일본 내의 보수화 경향이 한층 강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금요행동을 재개하고 있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 등 일본 내 양심적 시민세력의 입지는 앞으로 더욱 좁혀질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절망 속에 움트는 희망의 빛... |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의 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8월 광주지역 고교생들로 구성된 교류단의 나고야 방문에 이어 12.26∼29일(3박4일) 일정으로 광주에서 진행된 ‘2012 한일청소년평화교류’를 통해 한일간 역사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다음 세대에는 다른 길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한일 양국 간 엄중한 정치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세대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있을 수 없으며, 아직 청산하지 못한 ‘나쁜 정치’가 이들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한일청소년교류는 제한된 일정과 대상에도 불구하고 청년세대들에게 우리 역사에 눈을 뜨게 하고, 시민모임의 미래 동력을 길러낼 수 있는 단초를 축적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런 연장선에서 시민모임도 부족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들여 지난 6.8일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 강제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와 가진 도쿄 후지코시 본사 연대투쟁, 11.4일 나고야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비 이전 제막식에 참여해 연대와 우정을 돈독히 한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한일 연대투쟁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돌아보면 실패로 점철된 한해였지만 씁쓸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장덕고 학생들이 펼친 근로정신대 돕기 바자회, 부산 덕문여고 학생들이 보내 온 편지, 강원도 평창 봉평고 학생들의 연이은 정성, 팔찌를 손수 제작해 수익금을 전달한 하도훈, 김동오군, 지식인의 참 모습을 겸허히 보여준 김정훈 교수, 외로운 투쟁 끝에 2년 만에 회사 복직 후 해고 기간 못 받은 임금 50만원을 선뜻 내 놓은 택시노동자 민병수 회원, 일부러 권유했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이름 한 줄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뻔한 지갑을 털어 몇년째 후원금을 보내고 계시는 이름없는 회원들, 페이스북을 통해 머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무등산 거리캠페인에 달려 온 광주 밖의 또 다른 뜨거운 심장들은 시민모임 역사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장면이다.
시민모임 어깨에 다시 부여된 반전평화의 책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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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협상 실패로 시작해 막판에는 보수 우익 정권의 재등장에 이르기까지 시민모임은 창립 이래 가장 큰 곡절을 맛본 한해였다. 우리의 의지와 별개로 정치적 현실은 엄존하며, 아직 우리의 힘은 그것을 넘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의 전망 역시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부하건데 시민모임은 창립 이래 지금까지 앞만 보며 한 길을 달려왔다. 애초 우리 앞에 강과 산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발을 미리 뺀 채 지레 머릿속으로만 먼저 타산하려거나 자로 재려 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을 굳이 탓하지 않고, 강이 막으면 강을 넘고 산이 막으면 산을 넘으며 더디지만 그렇게 한 발 한 발 오늘에 이르렀다.
모든 게 수도 서울이 아니면 안 되는 세상. 중앙에 끈이라도 대야 그나마 하청노릇이라도 하는 '서울공화국'에서, 변방 중의 변방 ‘시민모임’이 걸어 온 지난 4년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의 허전함과 씁쓸함은 어쩌면 아무한테나 주어지지 않는, 한 때의 뜨거운 격정을 쏟아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특혜(?)와 같은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돌아보자. 2009년 초 명함도 없는 몇 몇 사람들이 허름한 식당 뒷방에 앉아 5천원짜리 추어탕을 놓고 '시민모임' 결성을 모의할 때,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개설에 맞서 멋모르고 1인 시위에 나설 때, 그 뒤에 어떤 상황이 우리한테 펼쳐지리란 걸 예단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면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코 실패만 한 것도 아니다. 앞서 살폈듯이 안개에 가려져 있을 뿐 희망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명확한 것은, 우리의 능력과 무관하게 한일 과거사 문제해결이라는 시대적 과제, 더불어 반전 평화의 역사적 책무는 여전히 시민모임의 어깨에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갈지(之) 자를 걷지 않는 한 감히 시민모임의 앞에 나머지는 종속변수일 뿐이다. 주어진 현실은 엄존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벽을 뚫고 샘솟는 희망의 근거 또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희망의 근거를 어떻게 잘 결집시키느냐 만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을 뿐이다. 일본 최고재판소 최종 패소(2008.11월)라는 암담한 상황을 뚫고 2009년의 해가 그렇게 밝아왔던 것처럼, 아직 맨 손인 시민모임 앞에 다시 안개를 뚫고 2013년의 햇살이 비춰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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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국언 사무국장의 뜨겁고도 예리한 정리입니다.
성찰이라 말해도 좋을 듯 합니다.
2013년도에도 더욱 건강하기를 기도 드리면서,
따뜻한 시선으로 정독해 보아요.
2013년아, 너는 우리에게 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사무국장의 글입니다.
따뜻하고 예리한 글입니다.
차라리 "성찰"에 가깝습니다.
2013년,
너는 우리에게 봄이 될 수 있느냐?
이국장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칠전팔기 백전천기 우리는 좌절할 수 없습니다.
국장님의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
기도지
올 한해 수고 만이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