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 시럽급여
손 원
최근 사회가 실업급여를 두고 시끄럽다. 정부가 실업급여의 하한액을 낮추거나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다. 실업 급여액이 최저임금 근로자의 세후 월 소득보다 많다는 점과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반복 수급자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얼마 전 실업급여 제도를 바꾸겠다는 취지로 열린 공청회에서 실업급여가 ‘시럽급여’로 비하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 일해서 버는 돈보다 많아지면서 문제가 생긴다”며 “실업급여가 악용돼 달콤한 보너스란 뜻으로 ‘시럽(syrup)급여’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최저임금 근로자의 월 소득(세후)이 180만 원인 반면, 비과세인 실업급여는 185만 원으로 역전되었다.
최근 신문 기사다. 외국 사례지만 예사롭지 않다.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헤럴드경제 기사)
영국에서 목수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아내와 사별하고 가족 하나 없는 중년 남성인 그는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그만뒀다. 그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질병 수당을 신청했지만 평가 항목에서 3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당 대상에서 탈락했다. 하는 수 없이 실업급여라도 신청하는 블레이크. 그런데 신청 절차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절차가 디지털화됐는데 마우스 스크롤조차 할 줄 모르는 컴맹인 블레이크에겐 무리였다. 겨우겨우 주변의 도움으로 실업급여를 신청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구직활동 증거를 내야 했다. 블레이크는 종이에 이력서를 작성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인정되지 않았다. 정부 시스템이 원하는 구직활동 수령증이나 핸드폰 사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블레이크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주치의가 일을 해선 안 된다고 해서 질병 수당을 신청했는데 이는 3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됐고, 실업급여 받으려고 구직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보조금도 끊길 처지에 놓였다. 도움 얻을 가족 하나 없는 블레이크에겐 정부 수당이 너무나도 절실한데, 까다로운 관료주의는 그를 '돈을 타내려는 구걸 자'로 만들어 버렸다. 복지 제도 앞에서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끼는 블레이크, 그는 친해진 공무원에게 이렇게 말하고 떠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오."
블레이크는 질병 수당 탈락 결정에 항고했다. 항고 재판이 열리던 날, 블레이크는 재판장에서 할 이야기를 미리 종이에 적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재판이 열리기 직전 심장병 악화로 숨을 거뒸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은 본인 장례식의 추모사가 되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신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이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는 지난 2016년 켄 로치 감독이 내놓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실업급여의 취지는 간단하다. 실직 근로자의 재취업 기간 동안 생활 안정과 구직 활동을 돕는 제도로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한다. 누군가가 이러한 선한 제도를 악용하거나 부정 수급한다면 이들에 대해 엄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업급여 제도의 악용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제도를 개편하는 것 역시 정부의 할 일이다. 그러나 부정 수급자나 반복 수급자가 일부 있다는 이유로 실업급여를 단순히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분명 실업급여 제도를 취지에 맞게 활용하는 선한 수급자들도 있기 때문이죠. 실업급여는 누군가에겐 단 하나 남은 동아줄이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일 수 있다. 실업급여를 두고 '시럽급여'라고 조롱하거나, 남성과 여성 수급자를 갈라치기 하거나, 수급자를 싸잡아서 부정 수급자로 일반화하는 것 역시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누군가에겐 실업급여가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최후의 수단일 수 있다.
실업급여는 실직에 따른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인 만큼 정부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실업급여 제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소상히 알리는 게 옳다. 실직자들이 재취업과 직업교육 확대로 가기 위한 튼튼한 가교가 될 수 있도록 실업급여를 근본적으로 정비해야 할 때다. (2023. 7. 21.)
주) 교각살우[矯殺牛]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결점이나 흠을 고치려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