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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승리의 비결(수 6장 1-11)
성경본문 : 여호수아 6: 1 11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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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하고 얘기하다 보면,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사는 어떤 분들에겐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농사를 지어보면 굉장히 힘듭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소득이 없을 때, 너무 마음이 힘듭니다.
개인 비즈니스도 어렵습니다.
자본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예 퇴직하거나 평생 군인으로 있다가 퇴직 후에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직장 생활도 쉽지 않습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고,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직도 쉽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 사무직이 쉬워 보이고, 사무실에 근무하는 분들을 현장직이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다 어렵다고 합니다.
목회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기 보다는, 목회자로서, 삶으로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점이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일을 해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일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한 목적 의식,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가, 그렇지 않고 마지 못해서 일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추어는 재미로 하는 것입니다. 꼭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건강이 목적입니다. 예) 동네 조기 축구
그러나 프로는 다릅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합니다. 열심히 해야 하고, 꼭 이기려고 합니다. 어려움도 견디고 훈련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는 아마추어와 같은 태도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프로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냥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패배해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올 때도 그냥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꼭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를 승리하여, 가나안 정복의 첫 단추를 잘 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리고 성이 쉽게 무너진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여리고성은 무너뜨리기 쉬웠던 허술한 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을 7일간 열세 바퀴(6일간은 매일 한 바퀴, 제7일에는 일곱 바퀴) 돌고 함성을 지르자 무너졌으니, 무너지기 쉬운 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나 여러분,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 성은 결코 허술한 성이 아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주전 7000년 경부터 성벽과 망대를 갖춘 성읍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읍 중에 하나였습니다.
여호수아 당시에 이중으로 돌과 흙으로 섞어서 쌓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견고한 성읍이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전투가 성을 빼앗은 전투(공성전)입니다.
방어하는 쪽보다 공격하는 쪽이 세 배 이상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성벽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돌이나 맷돌을 던질 수도 있고, 뜨거운 물을 부을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쏘는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갑니다.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투석기나, 더 성능 좋은 활과 같은 무기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또는 밤에 야음을 틈타서 기습 공격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무리하게 공격하기 보다는 그냥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식량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고사작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 작전은 전혀 다른 이상한 작전이었습니다.
견고한 성읍을 빼앗기 위해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심없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제일 먼저 말씀해 주신 것은 “승리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아직 싸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미 여리고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수6:2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네 손에 넘겨 주었다” – 동시의 시제가 예언적 완료 시제로, 미래에 있을 행동을 마치 완료된 것처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이기에, 믿고 나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것이나 마찬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할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이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승리를 약속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을 통해 승리를 증명하셨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쪽이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아니면 여리고 성읍 사람들입니까?
여리고성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1절)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승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심판으로부터 승리한 자들입니다. 이 승리의 확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도나 선교할 때도 이와 같은 약속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복음에 적대적인 곳도 열릴 것이란 확신, 약속을 믿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처럼 견고해 보여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 믿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굉장히 창조적이고 독특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꽤 창조적입니다. 창조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문화,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과 기술이 계속 발전하는 것도 인간의 창조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성에 비하면 인간의 창조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는 방법은 기상천외한 방법이었습니다.
6일간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 씩 돌고, 제7일엔 일곱 바퀴를 돌고 함께 나팔 소리에 맞추어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견고한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방법은 간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1) 요단강을 건널 때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러고성을 돌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일곱 제사장들이 각각 양각 나팔을 하나 씩 가지고 가면서 나팔을 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군사들을 나팔 부는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앞 뒤에서 호위해야 했습니다.
(2) 또 한 가지 꼭 지켜야 할 것은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백성들을 소리를 들리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즉 침묵하며 여리고성을 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돈 후에는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함성을 질러야 했습니다.
(3) 그러면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군대는 여리고성을 정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4)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두 가지 지켜야 할 세부 사항이 있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진멸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은 반드시 건져내야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여호수아처럼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6일간은 매일 한 바퀴 씩을 돌고 제7일엔 일곱 바퀴를 돌 수 있겠습니까?
이 방법이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리고를 정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하는 것이 완전한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에는 몇 가지 중요한 영적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가 영적 승리의 원리가 됩니다.
(1) 하나님 중심의 원리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원리입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가고, 일곱 제사장들이 그 앞에서 나팔을 불며 가는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악한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싸워 주셔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록된 수많은 전쟁은 다 영적 싸움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싸움의 승패는 항상 하나님께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최초의 전쟁 –
아말렉과의 전쟁을 보세요. 모세의 팔이 올라갔을 때 승리하였고, 모세의 손이 내려갔을 때 패배했습니다.(출17장)
기도가 승패를 좌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
어린 다윗의 능력으로 이겼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삼상17: 45절에 다윗의 고백 속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왕 중에서 여호사밧 왕이 누구보다도 영적 전쟁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왕입니다.
그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믿었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람 군대가 대군을 이끌고 남 유다를 처들어왔습니다.
그 위급할 때에 여호사밧은 야하시엘 선지자의 조언대로 전쟁터에 군사들을 앞세우지 않고, 레위 사람들로 구성된 성가대를 앞세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사밧의 이 결정에 대해 당시 비웃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하20:20-21절,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으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여러분, 찬송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가장 영적 전투가 치열한 곳은 선교 현장입니다.
특히 이슬람권 선교, 힌두교나 불교권 선교는 힘듭니다.
종교라는 여리고성처럼 견고한 진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이 없이 기도해야 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제사장의 나팔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민수기10:9절, “또 너희 땅에서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여러분, 견고한 성인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힘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앞서서 싸워 주실 때 가능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전쟁이든 인생이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항상 이 원칙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과 인생의 승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입니다.
(2) 침묵의 원리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6:10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말하지 말고 침묵해야 한다고 명령하였을까요?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안팎으로부터 부정적인 소리가 들려 왔을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소리에 반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을 돌 때, 여리고성 사람들로부터 오는 조롱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전쟁을 하러 나온 것인가, 놀러 나온 것인가?
성을 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 내부에서도 낙심하거나 불평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6일간 성을 돌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왜 계속 돌아야 하는가? 여호수아 장군이 과연 맞는 전략을 세우고 싸우고 있는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등등 볼멘 소리, 불만의 소리, 부정적인 말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마지막 날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절대 침묵하면서 성을 돌아야 한다고 명령한 것입니다.
인간 본성상 얘기 해 보았자 좋은 얘기가 안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 침묵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기도가 이뤄지지 않을 때 그런 상황에서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루에 한 바퀴 씩 6일간 도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천둥 번개가 친 것도 아닙니다.
여리고 성벽에 무슨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고 계속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마지막까지 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물이 언제 끓습니까?섭씨 99도에도 끊지 않아요. 반드시 100도가 되어야 끊습니다. 100도가 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가 100도가 되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중에서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는데,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 같고, 믿음으로 행하는데도 어려움이 계속 되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묵묵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요즘에 새벽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고,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거짓 고소를 당함으로써 붙들려 여러 번 재판을 받고, 오랫 동안 가이사랴에 구금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라는 말씀까지 받았지만, 재판은 질질 끌다가 가이사랴에서만 2년의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은 지치고, 불평도 나올만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주의 종을 오랫동안 가이사랴 감옥에서 지내게 하실까?
도대체 언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 굉장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울이 그런 상황에 처하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가이사랴에서 유대지방의 고위층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까지 보내시기 위한 뜻도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도 억울한 옥살이를 2년 이상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집트 정치인들을 만나, 국제 정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인맥으로 인해 바로왕 앞에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요셉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 시간표에 맞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함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며,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함성을 지르며 승리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더 뛰어나고, 더 지혜롭다는 것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계획이 무산된다고 슬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교육관과 주차장을 만들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우리는 교인들이 늘면서 교육관 건축과 주차장을 확장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결정한 것이 농구장 쪽 언덕 위에 교육관을 짓고, 주차장은 본당 앞의 동산을 없애고 주차장을 만들려고 했어요.
현재 교육관 위치에는 꽤 높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주변의 땅 주인이 교육관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기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왜 반대하나? 알아보았더니, 교회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자기 땅을 못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해결책은 자기 땅을 사고, 물이 모이는 웅덩이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배당 북쪽의 2.5에이커 땅을 샀고, 현재 교육관 쪽의 언덕을 깎은 흙을 주차장 쪽에 메워서, 교육관을 평평한 곳에 짓게 되고, 주차장도 120 개 정도 확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당 앞의 동산을 없애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막으시고 새롭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완전하고 뛰어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계획대로 안 될 때, 불평하기 보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정복한 이야기에서 우리도 잘 이해가 안 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 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그 성 안에 살던 사람들을 남녀 노소, 심지어 짐승까지도 모조리 죽이라고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명령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냐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수6:20-21절을 보세요.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도 하나님이 무자비하신 분이라고 생각되세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서 하나님을 무죄한 사람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하신 잔인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가나안 땅의 백성들을 멸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이시라서 가 아니라, 그들의 죄악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죄악이 도를 넘어섰을 때, 홍수로써 심판하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 도를 넘어섰을 때, 유황불로 심판하셨듯이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 특히 여리성의 타락은 도를 넘어섰던 것입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차기까지 이스라엘민족이 40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게 될 것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창15장)
왜 400년간 기다려야 하는가?
아모리 사람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제 아모리 사람의 죄악이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진멸하게 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정착하여 살게 될, 여리고성 사람들의 악을 본받지 않게 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한 가나안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되면, 그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의 근원을 확실하게 잘라 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새로운 땅에서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게 살길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여리고성 전투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악된 본성과의 영적 싸움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교만과 불순종, 거짓과 음란 등 견고한 성처럼 우리 자아를 지배하고 있던 습성들을 끊어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과거의 죄의 견고한 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는 세워지지 않게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에 맹세로서 경고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그 기초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을 일을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야기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리리고 성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도 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의 구원 이야기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기 전에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1) 수6:17, “이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라”
(2) 수6: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3) 수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은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막16:15-16)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멸망 받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요3:16)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얼마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사람만 제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다음 주에 살펴 보겠지만, 아간이란 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 욕심을 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세부)에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살짝 속이는 것입니다.
창3장에 뱀이 하와를 속일 때, 처음에 살짝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순종할 때 디테일한 부분까지 순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음 주에 다룰 사람인 아간은 처음에 여리고 성을 돌 때까지는 잘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디테일한 부분에서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 안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써, 그 중에 어떤 것이든지 손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 탐심을 이기지 못하고, 은과 금과 의복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달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계획대로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때에 이뤄지 않아도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부분만 순종하지 마시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없었던 것까지 이루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