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14절
설교자: 조정의
본문은 두 가지 이유로 당혹스럽다. 첫째, 주제가 매우 민감하다. 돈에 관하여 그것도 일꾼에게 공급하는 물질에 관하여 바울은 아주 노골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호소한다. 둘째, 문맥상 매우 갑작스럽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8:1) 답변하다가 갑자기 왜 교회에 나도 공급받을 권리가 있다는 논증을 잔뜩 쏟아냈을까?
먼저, 바울은 자기 권리대로 해달라고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15절b).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물질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바라고 일하는 것이냐’라는 비판을 듣느니 차라리 사역을 모두 그만두거나 심지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자기 양심에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없도록 끊임없이 돌아본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도 바울이(고전 2:2), 이렇게 갑작스럽게 권리 이야기를 한 진짜 목적은 그가 어떤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3절). 본문은 바울의 변명이다. 그리고 그 변명은 8장에서 다룬 복음의 원칙, 주와 성도를 위하여 (음식 먹을) 자기 권리를 내려놓으라는 원칙의 모범사례 역할을 한다. 주를 위하여 범사에 자기 권리를 내려놓은 바울처럼 우리도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사용함으로 사랑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자.
1. 바울은 어떤 권리가 있었나?
4-6절까지 계속 반복하는 바울의 수사학적 질문은 “권리가 없겠느냐”이다. 따라오는 대답은 ‘당연히 권리가 있다’이다. 무슨 권리를 말하는 것인가? “먹고 마실 권리”(4절),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5절), “일하지 아니할 권리”(6절)를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와 다른 이들, 권리를 누리지 않는 이들과 누리는 이들을 비교한다. 우리는 나와(바울) 바나바이고(6절), 다른 이들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이다(5절).
바울과 바나바도 일하지 않고 교회가 공급하는 것을 받아 먹고 마실 권리가 있었다. 그들도 믿음의 자매 된 아내의 내조를 받고 함께 사역하며 교회의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왜?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12절b).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다.
그러면 이 권리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떤 식으로든 장애가 되는 것인가? 교회의 의무는 아니지만, 일꾼이 먹고사는 데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공급하는 건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쓸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논증으로 명백히 입증된다.
첫째, 사람의 예(세상의 관습, 우리말 성경):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절). 군 복무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모집한 사람에게 대가를 받는다. 식물을 경작하고 가축을 치는 사람은 그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그 일을 통하여 얻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군대, 포도밭, 양무리 가운데서 수고한 사람은 그 안에서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둘째, 성경의 가르침: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8-10절). 바울은 세상의 관습이 아니라 절대 권위가 담긴 성경을 사용하여 일꾼이 공급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모세의 율법 자체가(신 25:4) 요구하는 것은 실제로 곡식을 밟아 타작하는 소들이 그 일을 하면서 떨어진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가축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드러나는 놀라운 계명이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단지 소들을 염려하셔서 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10절):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 말 때문에 바울이 구약 성경의 원래 의미를 지나치게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소를 이렇게 돌보신다면 그보다 훨씬 귀한 복음의 일꾼은 얼마나 더 소중히 돌보시겠냐고 묻는 것이다. 예수님도 참새 두 마리 얘기를 하시고는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29, 31). 밭 가는 자가 그 일을 통해 필요를 얻을 소망을 가지고 일하고, 곡식 떠는 자도 그 결실을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도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그것으로 필요를 얻을 것을 소망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통해 교회가 그들을 위하여 소처럼 일하는 일꾼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먹을 것을 줄 의무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집, 성전의 사례: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13절). 구약 시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세우신 일꾼인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에서 일을 하면서 성전에서 나는 제물의 일부와 백성이 내는 십일조의 일부를 받아 살았다(땅과 기업을 물려받지 못함, 민 18:23; 레 5:13). 그들은 제단에서 섬기면서 제단에서 남은 음식을 제사자와 함께 나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전에서 자기들을 위하여 항상 제단 봉사를 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우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면 신약의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성도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넷째, 주님의 명령: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4절). 일꾼이 그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바울의 논증에 쐐기를 박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것을 교회에게 명령하셨다. 주님은 따로 칠십 인을 세워 각 동네와 지역으로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의 필요는? 그들을 영접하는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시고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셨다(눅 10:7; 마 10:10). 바울은 주님의 명령을 근거로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도 교회를 복음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꾼의 필요를 충분히 돌보라고 명령했다.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2. 바울은 어떤 비판을 받았나?
바울은 마게도니아의 여러 교회(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쓸 것을 공급받았다. 그들은 환난과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바울의 필요를 채웠다(고후 8:2-5). 하지만 종종 바울은 교회에 부담을 지우지 않고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는 등 스스로 필요를 채우기도 했다(행 20:33-35). 바울이 주로 사역한 이방인 지역은 바울이 언급한 구약의 율법이나 성전의 사례, 주님의 명령에 익숙하지 않는 곳이라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 전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우라고 요구하면 혹시나 그들이 그 동기를 오해하여 복음으로 장사를 하거나 이득을 보려 한다고 보고 복음 자체를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쓰지 않은 바울의 그 행위가 오히려 비판거리가 되었다. 당시 순회 사역을 하면서 자칭 사도 또는 교사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람들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것과 달리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보다 권위가 떨어지는, 혹은 정통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평가가 베드로나 아볼로와 비교되면서 분열의 불씨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전임)사역자와 (자비량)장로를 구분하고, 그 부르심과 자격과 은사가 같음에도 차별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게 참 사도라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다: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1-2절). 바울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종이 아니라 자유롭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주 예수를 보고(행 9장) 그분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도였다(갈 2:8). 그 사명에 충성하여 맺은 열매가 바로 바울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가리킨 고린도 교회였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고린도 교회만큼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거나 그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했다. 복음으로 그들이 거듭나 주 안에서 교회로 세워진 사실 자체가 바울이 그들의 사도 됨을 확증하는 인장이 되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어떤 이유로 참았나?
바울은 왜 사도로서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 이유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는 것이라는 걸 이미 안다(12절). 이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11-12절).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신령한 것 곧 복음을 심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육적인 것 즉 물질의 필요를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니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보다 귀하고,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복음의 가치는 그만큼 그 어떤 물질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일만 스승 중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복음으로써 낳은 아버지였다(고전 4:15). 다른 스승이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바울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이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가장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 복음의 유익을 고린도 성도가 가장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바울은 자기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 성도의 유익을 더욱 추구했다. 자기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복음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바울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바울의 모범적인 삶은 고린도 성도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다. 분명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고 권한다.
특별히 본문은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목사는 돈에 민감하다. 가장으로 가정의 필요를 돌보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돈이 꼭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하면 그 자격을 상실한다. 돈의 많고 적음에 크게 요동하지 않고 주 안에서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가지만, 성도가 인색하게 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들의 수고를 조금도 알아주지 않을 때 낙심한다. ‘돈을 밝힌다’는 비방을 억울하게 받으면, 삶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고, 사역할 힘을 잃고 살아갈 목적까지 상실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예민한 부분에 관하여 비판하는 자들에게 참사랑으로 변명했다. 그들을 위하여 권리를 내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변명으로 그들 또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덕을 세웠다: 나도 바울처럼 육적인 것을 거둘 권리를 쓰지 않고 신령한 것을 뿌리는 일에 기쁨으로 충성할 수 있을까? 그들이 비방하더라도?
자기의 자유로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비판할 때는 더더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사람들은 비방하며 조롱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스스로 구원할 권리가 있을 거 아니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권리를 쓰지 않고 모두 참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이 먼저 보여주신 복음의 길에 동참하라고 요청하신다. 바울은 먼저 그 길을 간 사도였고, 고린도 교회 성도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뒤따르고 있다. 당신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참고 있는가? 당신은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절제하는가? 당신은 교회를 위하여 어떤 권리를 쓰지 않고 있는가? 만일 자유롭게 모든 권리를 주장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좇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