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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2. 8. ~ | 보유자 인정: 1983년 6월 1일
징이여, 바람의 손잡이 잡고 등짝을 한번 후려쳐봐 울림이 클탱께
아궁이 단속 심했던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을을 마흔아홉 번이나 구부렸다 폈다 만들어낸 걸작이 바로 저 강이여
동담티 무당년이 찾아와 낚아채듯 뺏어간 날이 아마 그믐이었지 빨간 깃발 펄럭이고 아침저녁으로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 그 집이 몸땡이 풀어놓은 딘디 주인이 나이도 많고 고집불통인데다 말도 통하지 않아 맨날 굿판이 벌어지고 있지
내가 징이여, 소리에도 색깔 있어 울림 큰 음색이 특장인디 워쩌
오늘밤 한번 둘어볼텨 징채라도 있으면 맘껏 후려쳐봐 이빨 꽉 깨물고 견뎌볼 탱께 -
육근상 시인의 ‘징’, 시집 [절창]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으며,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하였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뉘는데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질이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동(銅)과 석(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이다. 이 방짜유기는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매우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도 제작하게 되었다.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정확한 합금비율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는 성분이 다소 다르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유기라고 알려져 왔다. 이렇게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생산하던 합금쇠를 통쇠라고 했으며, 전통적인 놋쇠와는 엄격히 구분지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퉁쇠는 주물한 것이라 금속의 단면이 유연성이 적어 그릇을 떨어뜨리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만 해도 방짜기법으로 만든 유기를 최고로 여겼으며, 특히 상질의 놋그릇으로 유명한 납청에서는 방짜유기점은 놋점, 주물유기점은 퉁점이라고 구분해서 불렀으며 놋쇠로 만든 그릇은 놋성기, 퉁쇠로 만든 그릇은 퉁성기라고 구분해서 불렀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쇳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망치로 쳐서 형태로 만드는데 주로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한편, 방짜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납청은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납청은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내공업으로 유기업을 하여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방은 일찍이 유기제작이 크게 발전하여 각 지방에서 유기 도매상들이 모여들었으며, 일제초기까지만 해도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납청에서는 방짜를 양대(良大)라고 불렀으며, 모든 생활기명이나 악기를 만들어 내었는데, 놋쇠의 질이 좋아 견고하고 소리도 맑고 파장이 길어 각광을 받았다.
이렇듯 납청에서 유기가 성행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유기공장에서 사용하는 화력 좋은 소나무 숯이 가장 많이 생산된 것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당시 납청의 유기는 평안도에서는 물론 황해도, 함경도까지 그 판로가 형성되어 수요가 매우 많았다. 유기전통은 근대 말에 이르러 일본에 의한 유기공출이라는 이름 아래 집집마다 거의 모든 유기를 전쟁물자로 차출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해방 이후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다 1950년대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사용하기가 불편해졌을 뿐 아니라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점차 유기공장들이 사라져 갔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해 방짜유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 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방짜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릇을 방짜기술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인 이봉주 선생은 1926년에 납청에서 약 8km 떨어진 평북 정주군 덕언면에서 모친이 놋성기 장사로 생계를 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 때부터 납청의 점주 김용도 선생의 집에 취직을 하여 유기 제작일을 접하게 되었지만 기술은 배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마구 내몰던 시절 열일곱 살이던 선생은 군대에 끌려가기엔 어렸지만 취직하지 않으면 강제노역에 붙들려가야 하기에 아연광산에 취직해 직원 숙소에 불 때는 일을 맡았다. 금속과 불, 이 두 가지도 선생과 인연이 깊다. 결혼을 위해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농사를 짓던 중 광복을 맞았다. 잇단 흉년과 과도한 현물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항의를 모의하다 북한 정권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선생은 첫 딸을 잃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느낀 선생은 1948년 겨울 송아지 판 돈 5,000원을 들고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아내는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남게 됐고 그것으로 아내와의 인연도 끊어지고 만다. 여러 소식을 통해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아내는 평생 고아를 돌보며 살다가 2008년 여든둘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납청 출신이지만 고향에선 정작 방짜유기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해방 후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탁창여 선생의 양대공장에 입사하여 기능을 익히기 시작했다. 탁창여 선생은 아내의 이모부였고 이러한 인연으로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은 탁창여 선생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지금도 문경에 있는 선생의 공장 마당 가운데에는 탁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이 공장에는 모두 납청출신의 유기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능을 익혀 2년만에 점주가 되었고 전쟁이 나자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다시 공장에 들어가 점주로 일을 하였다.
1957년에는 구로동에 자신이 직접 ‘평부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하여 대장겸 점주 그리고 경영까지 하여 생산 기술자인 동시에 판매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생활문화가 변하면서 연탄을 집집마다 사용하게 되자 연탄가스에 쉽게 변색되는 유기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선생의 공장도 문을 닫고 만다. 그 뒤 노동판에 나가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마음을 잡지 못하고 다시 1960년말 공방을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때는 잘 팔리지 않는 그릇 대신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악기를 주로 만들었다. 마침 대학가에서 농악이 붐을 일으키던 때라 잘 팔려나갔다.
선생은 1978년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으로 이주하여 진유공사를 세워 공장 시설을 개량하고 계속 양대유기를 제작하였다. 198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인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의 방짜유기 부문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반상기를 방짜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편리한 스테인리스 스틸과 플라스틱에 밀려났던 놋그릇은 시절이 바뀌면서 새 국면을 맞은 것이다. 인체에 나쁜 성분을 만나면 변색되는 신비한 효능이 알려지고 언론에 선생의 방짜기술이 소개되면서 방짜그릇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1926년 일제 식민지하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복의 혼란기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1948년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겨우 고무신 한 켤레 살 돈밖에 없던 스물 두 살 청년이 5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3년에는 쇳농이 튀어 한쪽 눈을 잃었고, 2008년에는 담낭에 탈이 생겨 세 차례나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평생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본인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1994년에는 안산 시화공단으로 확장 이전하여 각종 방짜유기를 생산하였다. 이후 경북 문경시에 ‘납청방짜유기전수관’을 짓고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정진하여 왔다. 이 주변은 고향인 납청처럼 소나무 숲이 많고, 논은 적어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런 이유로 청년들에게 유기 제작 기술을 가르쳐 유기가 산촌의 주된 사업으로 성장하게 되면, 결국 납청마을과 같이 지역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이곳을 유기마을로 키워가고 있다.
선생의 대표작은 대징과 꽹과리, 좌종, 편종과 같은 악기들이다. 방짜쇠의 맑은 울림과 긴 파장을 이용한 것으로 현대식 스텐레스스틸이나 황동으로 만든 악기와 비교해보면 소리의 웅장함과 여운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선생이 만든 대징은 직경 160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의 크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납청유기는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방한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납청유기 연구, 계승을 위해 고집스럽게 한 길 만을 걸어온 이봉주 선생의 좌우명이다. 아들인 이형근 선생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놋상, 51×30×21cm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불로 달군 후 망치로 치고 늘려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단조기법으로 만들었다.
좌종, 42×41cm여러 불교국가에서 예로부터 크고 작은 종들을 조성하여 왔다. 좌종은 법당 안에서 쓰이는 “종”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울림주발 또는 경종이라고도 한다.
제작과정
방짜유기는 용해, 네핌질, 우김질, 냄질, 닥침질, 제질 및 담금질, 벼름질, 가질 등의 순서로 제작된다. 먼저 도가니네 열을 올린 다음 구리와 주석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배율을 맞춰 섞어 1200도가 넘는 온도에 끓여 녹여 낸다. 녹인 쇳물을 물판에 부으면 바둑 모양의 둥근 합금 덩어리가 나오는데 그 모양이 바둑알 같아고 하여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부른다.
성형 재료인 바둑이 나오면 소나무 숯으로만 불을 지펴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 11명이 한 조가 되어 바둑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치는 과정(네핌질)을 되풀이해 가며 얇게 늘려낸다. 얇게 편 판은 여러 장 겹쳐 우김질로 틀을 만들면 우묵한 그릇의 틀이 잡힌다. 이를 당기며 쳐 늘리는 작업인 닥침질이 끝나면 간수를 발라서 물에 담갔다가 내어 완제품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시킨다. 담금질을 하고 나면 놋쇠의 경도와 인성이 낮아져 질이 연해진다. 마지막 과정인 가질에서는 벼름질이 끝난 재료에 산화 피막이 형성되고 흠이 난 것을 제거해 놋쇠 특유의 색이 나오도록 전체 또는 일부를 깎아낸다.
1) 용해 (용탕만들기)
2) 바둑 들어내기
3) 겹쳐진 바둑 우김질하기
4) 닥침질하기
5) 망치로 벼름질하기
첫댓글 유기장 이봉주에 대해서 잘 읽었습니다.
꼿꼿한 집념으로 방짜유기의 맥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따뜻한 봄날이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