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8할은 골배마실이 키웠다
용인르네상스의 '탄생'
'용인르네상스'의 바탕은, 용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시민이 제대로 인식을 공유하는 일에 있다.
그중의 하나로, 김대건 신부의 자취와 숨결은 이 도시를 빛나게 하는 보석 같은 가치재산이다.
2021년 탄생 20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이 성인은, 위대한 종교인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정신적 자긍심을 돋우는 보기 드문 큰 인물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의 25년 삶 중에서 대부분은 용인 골배마실이 품어냈다.
1821년 충남 솔뫼마을에서 태어나자 마자 온 가족이 종교 박해를 피해서 야반도주한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용인의 인적 드문 숲이었다.
개울가에 허튼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곳이 골배마실이다.
1836년 15세의 그는 산을 넘어 은이공소로 가서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는다.
신학생으로 선발되는 것도 이떄다.
마카오로 가서 교육을 받고 1845년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돌아와 용인 은이공소에서 사목활동을 한다.
김가항 성당이 해체되면서 그 건축 부재들을 옮겨와 은이공소를 개축했고, 이 성당 명칭 또한 김가항성당이 된다.
김 신부로서는 사제서품을 받은 정신적 고향이 옮겨온 것과도 같았다.
1946년 9월 체포되어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의 삶 속에서 국내의 삶은 용인이 거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해외 체류한 9년여였다.
김대건 신부에게 용인은 명실상부한 삶과 신앙의 터전일 수밖에 없다.
그 고난의 성지를 품은 우리 용인 시민이 돌아보고 기리는 것은, 우리 역사가 낳은 성인과 인류 가치를 마땅히 기리는
의무이기도하다.
이런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용인은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성도로 꼽힐 만한 가치자산을 지니고 있다.
죽음도 꺾지 못한 정신 가치의 꽃...이곳이 용인 정신이다
여기가 거기입니까?
김대건 성지, 용인 골배마실을 가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그는 태어나자마자 위험했다.
언제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야 했던, 천주교 집안의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건이 태어나기 5~6년 전에 증조부와 증조모가 잇따라 순교했다.
충남 당진 솔뫼에 있었던일 그의 집은 관헌의 감시가 극심했다.
김대건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조부 김택현과 큰아버지 김종현, 아버지 김제준은 가족을 이끌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양의 청파로 올라와 잠시 머물다 인적이 드문고 사람들이 찾기도 어려운 곳을 찾았다.
그곳이 용인 골배마실이다.
골짜기에 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인 골배마실'
취재를 위해 실제로 가본 골배마실은 이정표를 봐도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두 산이 만나는 골짜기에는 제법 큰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으슥하게 꺾어지는 길, 철망친 문이 하나 달려있고 그 뒤 작은 다리가 있었다.
개울 건너엔 제밥 널찍한 평지가 있었는데, 그 당시 몇 개의 집을 앉히느라 바닥을 다졌던 자취일 것이다
가족은 생계를 위해 산자락을 개간해 농사도 지었다.
어린 김대건은 제대로 음식을 못 먹어 발육이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 고난이 눈에 선하다.
너른 터 안쪽엔 성경을 든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서 있다.
마지막 남긴 회유문(가르침과 깨우침의 글)이 적힌 석비가 보인다.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저 단호한 말이 25세였던 청년 신부의 면모였다.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모방 베드로 신부를 만나게 되는 인연도 골배마실에서 산을 넘으면 은이공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836년 봄 15세의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게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도 선발된다.
김대건이 마카오에 가 있던 1839년, 골배마실을 급습한 관헌이 아버지 김제준을 체포했다.
부친은 그해 순교한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가 되어 돌아왔을 때, 어머니 고(당시 여성은 성만 남겼다) 우르술라(세례명)를 뵈었던 곳도 골배마실이었다.
김대건 이 순교한 뒤, 미리내로 향하던 주검이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탄생 200년 만인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일물로 선정된 인물, 한국천주교를 열었던 큰 사람인 김대건이 '용인이 낳은 인물'이라는사실은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탄생지인 솔뫼성지와 시신을 묻었던 미리내성지에 비하여, 그의 '정신 가치'를 키운 고난의 성지 골배마실이 제대로 주목받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용인르네상스는 용인 속에 숨어있는 문화가치를 제대로 읽어내서 그것을 기반으로 진정한 도시융성을 지향하는 비전이다.
2022년 개봉된 영화 '탄생'은 김대건의 삶을 다룬 정통 전기영화이다.
김대건의 역을 맡은 배우 윤시윤은 어린 시절 상황이 어려워 부모를 떠나 순천에 있는 외가에 맡겨져 살았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용인으로 올라와서 살았다.
김대건이 용인 사람인 것과 윤시윤이 용인 사람인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무엇 떄문일까.
용인에는 하늘과 사람과 세상을 귀히 여기는 역사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게 이 땅의 힘이다.
시원하게 죽여달라, 25세의 순교
김대건 신부가 위대한 까닭은 성인의 반열에 올라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 가난했던 용인 청년을 우러르게 된 것도 그가 조선인 첫 사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인으로서의 가치를 실현했던 것만도 아니며, 더구나 5개 국어에 능통하며 신학문을 빠르게 접수했기 떄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겼다.
그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게 했으며, 그 진리를 모든 이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는 종교적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미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영혼을 지녔다는 점이다.
죽음은 삶의 저 숭고한 지향을 꺾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우렁찬 메시지가 아닐까.
1846년 9월 16일 김대건이 순교할 때 나이는 25세였다.
한성부 서부 용산방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
죽음 직전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십시오.
제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저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저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제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저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음 뒤에 행복하시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
유럽 신문이 대서특필한 '김댜건 K-한류'...유리만 몰랐다?
죽음으로 탄생한 '불굴의 정신'-김대건 사생관
김대건은 15세 떄인 1836년에 피에르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는다.
모방 신부는 선교지 주민을 선발해 성직 서품을 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전통에 따라 조선 신학생 3명을 뽑았다.
그때 뽑인 사람이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다.
새 학생이 외국에서 활동할 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공부를 끝내고 조선을 떠나 중국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 7일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어, 라틴어, 신학과 서양철학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그해 11월에 최방제가 열병을 앓아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 2월까지 6년간 마카오에서 수학했다.
교수 신부들은 한국 청년들을 심성과 열정에 반해 동지처럼 헌신적으로 키웠다고 한다.
마카오에서 수업을 마친 김대건은 21세가 되었다.
1845년 김대건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사제가 탄생했다.
김가항성당은 해체되면서 그 건물부재를 은이성지로 옮겨왔다.
김대건이 첫 사제서품은 받은 공간이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그는 조선교구 3대 교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한 후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을 수행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에게 선교사 입국 루트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대건은 중국 배들이 조기를 잡으러 조선해안으로 오는 사실을 파악하고, 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 루트가 그려진 조선지도와 편지를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해주목을 감시하던 황해감영의 조사로 그 의도가 밝혀지고 그는 체포되었다.
1846년 프랑스 해군 장 바티스트 세실 제독이 1839년 기 해박해 떄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항의하는 편지를 전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5개 국어(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김대건 신부를 활용하여 해결을 모색하고자 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이 그 능력이 아깝다면서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고 회유했다.
김대건은 그런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새남터 형장에서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그가 천주교 사제로 소명을 수행했던 기간은 1년 1개월이었다.
9월 16일 그는 순교하여 조선 천주교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다.
사형수는 4일 뒤에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는 참수된 자리에 바로 시신을 파 묻고 경비까지 세워 지켰다.
40일이 지난 뒤 17세 소년 이민식은 목숨을 걸고 새남터 백사장을 파서 김대건의 시신을 꺼내 험한 산길을 골라 걸어 닷새 만에 고향 선산이 있는 안성에 도착해 안장했는데, 이곳이 바로 미리내성지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가경자(venenable, 우러를 만한 사람)로 선포했다.
놀라운 덕행을 실천하거나 순교한 이에게 붙여지는 칭호였다.
1925년 교황 요한 비오 11세는 그를 시복(beatification, 복자품에 올리는 일)했다.
1984년 요한 바오르 2세는 그를 시성(Canonization), 성인품으로 올림)했다.
이후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는 우러름을 얻었다.
시신 수습 후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은 납으로 방부처리 해 보존했다.
이 두개골을 바탕으로 그의 생전 모습을 3차례 복원하였다.
우리가 몰랐던 글로벌 인재 김대건
1842년 8월 29일은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남경조약이 체결 되던 날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조선 청년 한 사람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학생 김대건이었다.
그의 옆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Jean Thomas Medee Cecille) 제독이 있었다.
김대건이 1846년 9월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영국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영국인은 (중국처럼 큰 나라도 우리에게 항거하지 못했는데, 조선 같은 작은 나라가 끝내 종교를 금지할 수 있을 것인가.
장차 3~4척의 배를 조선에 보내겠다)고 거듭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제가 선교를 위해 나가는 것은 불리하다)고 대답해 그들을 이해시켰습니다.'
당시 조선에 닥쳐오는 국제사회의 풍파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존재가 김대건이었다는점을저 사건만으로도 읽을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그의 말이 지닌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국제정세를 읽어내고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참수'로 꺾어버렸다.
1922년 11월 발행된 교황청 전교지구 베드로사도회 네델란드 지부 선교 소식지는 김대건 신부를 머리기사로 다루도 있다.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그린 김대건 초상화가 표지에 실렸다.
두 개 면에 걸쳐 김대건의 삶과 순교 사건이 소개되었다.
어떻게 네델란드에서 한국 김대건을 대서특필할 만큼 잘 알고 있었을까.
페레올 주교의 힘이었다.
그는 1846년 9월 2일 김대건의 체포 소식과 순교 상황을 적어 보냈다.
이 편지에 담긴 뉴스는 유럽 전역에 전파됐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스토리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각종 책에 실려 유럽인들에게 읽혔다고 한다.
김대건은 유럽에서도 유명했던 19세기 조선인이었다.
K-한류의 원류를 말한다면, 이것부터 거론해야 하지 않을까.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