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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석 칼럼] 151석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심판’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합니다. 평화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말씀입니다. 이번 총선분위기가 마치 페스티벌(축제판) 같다며 흥겨워하는 분들의 정서와 일맥상통합니다. 반면에 유시민 작가는 “투표권은 종이로 만든 탄환”이라고 자못 호전적인 정의를 내립니다(“선거여론조사는 반드시 틀린다” <시민언론 민들레> 4월 1일) ‘종이 탄환’이라니! 갑자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이 떠오릅니다. 혁명의 시대에 권력은 쇠로 만든 총알이나 대포알로 얻을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종이 위에 찍은 투표로 결정되니까요.
투표지는 낫과 죽창 같은 민중의 최후 저항수단
저는 유시민 작가의 ‘종이 탄환’은, 우리 민주시민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어떤 각오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수단이 무엇인지, 절절한 마음으로 제시한 핵심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권이 “인류 문명의 역사 수천 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고난, 투쟁, 헌신, 희생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얻은 민중의 무기다”라는 유 작가의 부연설명에서 더욱 그걸 느낍니다. ‘민중의 무기’는 결코 기습적이고도 무자비한 선제공격을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낫과 죽창처럼, 삶의 낭떠러지에 몰린 백성들이 최후의 저항수단으로 드는 무기입니다. 그런 의미의 ‘종이 탄환’을 지급받은 민중은,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AI 기계군단과 싸우는 존 코너 저항군의 절박감으로 싸워야 마땅합니다. 이번 22대 총선에서 나타난 높은 사전투표율이 그걸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6년 전 제13대 총선도 지금과 비슷한 정치상황이었습니다. 이번 제22대 총선의 사전투표율이 역대급 31.28%를 기록했기 때문에 총 투표율 역시 70%를 기록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충만하지만 1988년 4월 26일에 실시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무려 75.8%를 기록했습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최초로 치른 총선이었습니다. 그 전 해에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후보의 분열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군사독재 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분노와, 국회만이라도 행정부 권력을 감시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는 유권자의 의지가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차하면 노태우 정권이 다시 독재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컸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투표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결국 압도적인 여소야대를 만들어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때와 같은 관권, 혼탁 선거 와중에도 노태우의 민정당은 지역구 87석(득표 34%)에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득표율 비례가 아닌 지역구 1당이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절반을 배정받는다는 희한한 당시 선거규정 덕에 전국구 75석 중 38석을 챙기고도 총 125석에 그쳤습니다. 반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득표율 3위(19.3%)였지만, 호남 석권과 호남 원적 유권자가 많은 서울에서의 선전(1당, 17석)만으로 총 70석, 원내 2당을 차지했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부산 지역을 석권하고 전국 득표율에서 2위(23.8%)를 기록했지만 소선거구제 부진으로 총 59석으로 원내 3당에 머물렀습니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충남 13석, 충북 2석)과 경기도 지역(2당, 6석)에서 선전해 총 35석을 확보했습니다. 모두 합쳐 164석입니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하루 앞둔 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YDP미래평생학습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관계자가 기표용구를 들어보이고 있다. 2024.4.9 연합뉴스
13대 총선과 다르면서 비숫한 이번 총선, 키워드는 ‘심판’
지금은 그때보다 형편이 훨씬 나아 보입니다. 불과 0.7% 차이로 검사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아 검사독재 정권을 자초한 지금의 정치상황이 어쩌면 장군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아 군사독재 정권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때와 비슷하긴 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유례없이 높은 사전투표율과 70%대 선거 투표율을 기대하는 것 역시 국민들이 그때와 같은 후회와 분노와 위기감과 절박감을 표출하는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당은 크게 분열하지 않았고, 강력한 제3당 후보인 조국혁신당은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은 채 제1당 민주당과 협력을 다짐하며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이번 선거에서 실로 압도적인 승리를 기원하며 또 예감하고 있습니다.
정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번 선거의 키워드를 ‘심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레> 역시 보름 전부터 어제까지 [이래서 정권심판]이라는 시리즈를 계속해 오면서 모두 12개의 정권 심판 이유를 꼽았습니다. ‘이·채·양·명·주’ 구호가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 윤 정권을 심판해야 할 이유는 그보다 훨씬 많고 심각합니다. 누군가는 이태원 참사를 나몰라라 하는 무도함, 채 상병 죽음의 책임소재를 강압적으로 감추려는 불법적 권력남용, 양평고속도로 종점 변경과 명품백 뇌물, 주가조작 등 대통령 부인의 추문에 묻어있는 탐욕과 뻔뻔함을 심판해야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대파와 사과로 상징되는 대통령의 민생에 대한 무지와 무대책, 후쿠시마 오염수로 대변되는 대일 굴욕외교, 부산 엑스포 유치 119-29 실패로 드러난 외교 무능, 최악의 무역수지 등등을 심판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권 심판의 이유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최우선적인 의미는 민주주의 자체의 퇴행을 막는 것입니다. 검찰이 대통령과 행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국회까지 장악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영원히는 아닐지 몰라도 아주 오랜 시간 민주주의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윤 정권은 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무시하고(야당 대표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은 시행령을 통해, 하기 싫은 것은 거부권을 발동해 가며 자신들의 범죄적 통치행각을 강행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 정권이 입법권마저 가져간다면 그나마 버텨온 우리 민주주의의 제도와 시스템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 뻔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151석을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151석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심판’
그러므로 ‘151’이란 숫자는 심판의 숫자가 아닙니다. 개돼지의 숫자인 ‘149’를 간신히 면한 숫자일 뿐 윤 정권의 무도, 무지, 무능, 무책임을 제대로 따져 정상궤도로 돌려놓으라고 강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51’과 ‘179’는 28이나 차이가 나는 숫자임에도 그 의미는 거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안전과 민생은 내팽개친 상태로 방치될 것이며, 경제는 폭망할 것이며, 외교는 굴욕을 거듭할 것이며, 끊임없는 안보위기가 닥쳐올 텐데도 국회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여전히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과 재정권을 거머쥔 기재부를 좌우에 거느린 윤 대통령은 막무가내로 제왕적 독재자의 모습을 강화해 나아갈지도 모릅니다.
13대 총선에서 125석에 불과했던 노태우의 민정당은 2년도 안 된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의석수 200석을 넘는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 후신들이 한국의 제1 보수정당의 명맥을 이어왔으며, 지금의 국민의힘인 것입니다. 이 당이 검사 출신 윤석열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런 아수라장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질기고도 독한 이 정당과,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이 정권을 제대로 심판하기 위해서는, 저항을 의미하는 ‘종이 탄환’으로는 부족하고 ‘종이 대포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포탄의 숫자는 ‘넘버 200’, 그 장약의 농도는 ‘70%’ 아닐까요?
출처 : ‘종이 탄환’으로 무장하고 저항권을 발동하라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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