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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양명학의 비교 분석
--- 성리학과 양명학을 가장 극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性卽理'와 '心卽理'이다.
성리학은 '性卽理'가 사물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품을 理(또는 天理)라고 주장하는 주자학(성리학)의 명제이고, 양명학은 '心卽理'는 性과 情을 분리하여 性을 주로 삼았던 성리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왕양명(왕수인)이 주장하는 바 情이 속하는 마음(心)이 주체적인 자각의 중심이고 이것이 바로 理(天理)라 주장했던 명제이다. 즉 성리학과 양명학은 간단하게 본다면, 性學과 心學으로 구분되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성리학 분야는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 고봉, 회재 등 기라성 같은 성리학자들을 살펴보면서 상세한 해석이 있으므로 간단히 정리하고, 양명학과 그 외 학풍을 살펴 보고자 한다.
◆ 性理學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理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氣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
☞ 거경궁리(居敬窮理)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理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 양명학
1. 양명학의 형성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 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곳을 따라서 천리를 체인(體認)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문인 임광(林光)은 진헌장에 대해서 "선생께서 교육할 시초에 반드시 정좌케 하여 그 착한 실마리를 기르게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수인은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많은 정신적 편력이 있었다. 그는 용장(龍場)으로 귀양가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스스로 넉넉하다. 따라서 밖으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또 주자의 즉물궁리(卽物窮理)는 심(心)과 이(理)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으므로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자처럼 '이르다'[至]로 해석하지 않고, 바로잡는다[正]로 했으며, 물(物)을 주자처럼 사물의 理라 하지 않고, 심의(心意)가 있는 인간사(人間事)라고 해석했다. 즉 심의 발동의 부정(不正)을 바루는 것[正]을 격물이라고 했으며, 치지(致知)의 지는 지식이 아니라 양지(良知)이니 양지를 수렴하여 확충하고 실현하는 것을 치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즉리(心卽理)에 귀착하게 되었다.
뒷날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고 했듯이,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한편 구이양[貴陽]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고, 저양(檍陽)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江右)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세 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삼변(三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지행의 본체는 심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양지(良知)이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심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했지만 실천과 지식의 합일을 위하여 정좌공부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배우는 자가 깨우치는 듯했으나 오래됨에 따라 점차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발생해 치양지공부(致良知工夫)로서 그 폐단을 타파했다. 이처럼 양명학은 치양지설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2. 원리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된다.
3. 심즉리(心卽理)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陸象山)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心은 곧 理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外化)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4. 지행합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賀麟)은 지행합일신론(知行合一新論)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고 했다.
5. 치양지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眼藏)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事上磨鍊說)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卽決)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발현의 수단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大同)의 인(仁)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空理)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大同主義)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大學問〉의 간절한 주장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먼저 주자학은 송나라의 주희 (주자)가 집대성한 학문으로 性卽理 설을가장 주된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성선설의 입장과도 비슷한 입장이다.
반면 양명학은 명나라의 왕수인(양명)이 집대성한 학문이고, 주자학의 성즉리설을 비판하고 인간의 본성은 착한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心卽理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격물이라는데 있는데, 格物이란 사물의 이치를 따져보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은 격물을 인정하고 있고, 또한 도덕적 실천과 이론적 탐구를 통한 지식의 확충을 주장하고 있다 (선지후행). 존양성찰, 격물치지, 존천리 거인욕 등을 주장한다.
반면 양명학은 객관적 지식보다는 내면의 순수한 도덕성을 주장하고(지행합일), 치양지설을 주장한다.. 주자학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핵심적인 사상으로 대표적인 인물에 이황과 이이가 있다. 물론 둘이 주장한 바는 전혀 다르다만, 그래도 성리학의 갈래라는 데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양명학은 18세기 강화학파에 의해서 발전되는데,. 정제두와 불우한 종친출신 학자들이 이를 발전시켰고 나중에 가면 성리학의 기호학파 중 한 갈래인 소론이 이를 수용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先知後行과 知行合一의 차이는 知와 行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 다른 것으로 보는가의 차이이다. 주희는 그 둘을 다른 것으로 보았고, 왕양명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주희는 行 이전에 반드시 知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양명은 行 이전에 知가 있어야 한다거나 行을 통해서 知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면 행하게 되며, 행하고 있다면 배운 적이 없어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전자제품을 예로 들어 보자.
전자제품을 구입하면 사용설명서가 따라온다.
주희의 경우는 전자제품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일단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읽어서 그 전자제품에 대한 지식을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자제품에 대한 지식과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사용설명서를 통해 얻은 전자제품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방법을 다시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반면에 왕양명은 사용설명서를 읽어보지 않고도 전자제품을 잘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전자제품을 잘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비록 그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읽어 본 적이 없더라도, 그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읽어서 그 전자제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전자제품을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더라도 실제로는 그 전자제품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입장이다.
● 실학과 양명학은 뭐가 다른가? 성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같지만,
실학은 실사구시로 실제적인 사실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의미 이고, 성리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해서 싫어했다.
그러기 때문에 실학은 실제를 강조 했던 학문이며, 아는 것을 실천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알자라는 식이다.
반면 양명학도 안티성리학이라는 쪽에서는 실학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양명학은 말 그대로 아는 것과 행동은 일치하자 이런 식이다. 실학은 양명학 보다는 고증학과 관련이 있다.
◆ 제학문의 개략
1.훈고학 : 중국 한나라 시대 때 발달한 학문으로서 유교의 경서에 해석을 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자나 맹자등 춘추전국시대를 지내오면서 중국에서는 제자 백가들이 엄청난 양의 지식을 쏟아 낸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철학적 관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쉽게 해석을 다는 학문이 한나라 때에는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2. 성리학 : 중국 송나라 시대 때 발달한 학문으로 주자가 제창한 학문이다.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 하는 학문이다. 중화주의로 자존심이 한껏 강하던 한족이 정강의변으로 오랑캐라고
생각하던 민족에 쫓겨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남송이 되는데, 여기서 오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송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지 잘났다고 자위하는 사상이 성리학이다. 동아시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도 16세기 이후에 성리학에 심취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
3. 양명학 : 명나라때 양명 왕수인이란 사람이 주창한 학문으로 성리학과는 근본적으로 유교 경서의 해석을 달리하는 신학문으
로서 관념론에 빠지기 쉬운 성리학을 대체해서 심즉리(心卽理)설과 지행합일, 치양지설을 주 내용으로 한다.
성리학과는 달리 가만히 앉아서 책만 읽어서는 안되고 실천을 강조하는 점이 양명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격물치지의 해석을 주자와 달리한데서부터 비롯된 학문임.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게 되는데요 임진왜란 이후에 처음
들어오지만 19세기 강화학파(정제두)가 유명하다.
4. 고증학 : 청나라 시대에 유행한 학문으러서, 학문이라고 하나 그다지 사상적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과거의 문헌들
을 고증하는데 초점을 둔는 학문으로 서양으로 치면 실증주의와 통한다 할 수 있다.
5. 공양학 : 공양학의 기본사상은 공자가 <춘추〉를 지은 근본취지를 "난세를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아가게 한다"라고 인식하
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잠재되어 있는 의리(義理)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공양학파는 나름대로 공자의
사상을 찾아내고, 또 시대적 상황에서 요청되는 이념들을 공자에 기대어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의해 공자는 혁명을 시인하고, 제도를 고쳐 실행하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ㅡ 공자가 지은 <춘추>라는 책의 해석을 통해서 발전한 학문이라고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거나 하는 학문은
아니고 전국시대에 한 때 성행한 학문이다.
[출처] ◈ 성리학과 양명학의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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