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존재했습니다. 천도교 대표 15인, 개신교 대표 16인, 그리고 불교 대표가 2명이었지요. 이들을 흔히 민족대표 33인이라 칭합니다.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 그리고 3.1운동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이 이들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원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직접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본인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일본 경찰에게 자수해서 잡혀갔거든요. 혹자는 그들을 ‘자칭’ 민족대표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뭐 이 글에서 다룰 것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단지 민족대표에 대한 악감정이 강해서 그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을 좀 문제 삼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대표는 한용운 정도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변절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떡밥은 유래가 깊어 웹상에서 간간히 보입니다. 심하게는 출판된 책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오지요.
“한국의 경우 만약 3.1운동의 지도자들이 나중에 친일파로 투항하는 슬픈 역사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이 권리장전이나 인권선언 같은 헌법보다 더 상위의 정신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선언문의 지도자들은 거의 다 일본에 손을 들었다.”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151p 중에서
우석훈 박사야 명망 있는 경제학자고 이런 오류는 책 전체 내용에 비하면 사소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틀린 건 틀린 거지요. 민족대표가 변절했다는 거짓소문은 이 정도의 지식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전반에 퍼져있다 봐도 되겠습니다.
각설하고 사실관계부터 말씀드리자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 변절한 것이 분명한 것은 딱 세 명입니다. 최린, 박희도, 정춘수지요. 최남선의 이름이 왜 빠졌나 생각하는 분도 있겠으나 그는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을 뿐 민족대표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뭐 지도자격 인물인 건 맞지만요.
이 외에 한 명 논란이 된 인물이 있는데 민족대표 중 최연소자인 이갑성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쭉 기독교 계열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우익계열 정치인으로서 자유당, 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도 당선되고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도 받았지요. 이후에는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 등을 맡으며 독립유공자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7년에 독립운동가 출신인 조경한이 그를 친일파라고 공격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양쪽은 법정공방까지 벌였으나 사실증명이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그러다가 이갑성 사후에는 월간 잡지 <자유>에서 그가 겉으로는 독립운동가인 척 했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은 이갑성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하고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확실히 이갑성의 1940년대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모호한 바가 있지요. 창씨개명도 했고요. 때문에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다시 조사해보니까 그가 친일했다는 증거가 확실치 않은 겁니다. 이갑성을 친일파로 규정한 이유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의 출장소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는 건데, 정작 조사를 해보니 근무자 중 이갑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요.
오히려 이갑성은 해방직전까지 일제가 주시하던 요시찰 인물이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증언으로 엄한 사람을 친일파로 몬 것이지요. 다행히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하여간 통념과 달리 민족대표 중 변절자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다른 인사들은 이후에도 쪽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대부분 옥사하거나 병에 걸려 순국하였습니다. 살아남았더라도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했지요. 이미 언급한 변절자 세 명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동안 등 따습게 지낸 민족대표는 아무도 없습니다. 3.1운동 당시의 행동은 비판받을 만한 여지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이분들의 노력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친일파를 색출하고 그 행적을 검토하는 것, 물론 좋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휘말려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오류는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고 감정적인 접근이 동반되면 오류의 가능성은 훨씬 높아집니다.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은 더더욱 아닙니다(영국의 역사가 D. 놀즈의 말입니다). 역사를 분노의 배출구로 이용하는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ps. https://goo.gl/XJrVW4
위 링크에는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위키 문서이기는 하나 깔끔하게 보기는 좋습니다.
첫댓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변절자인
최린, 박희도, 정춘수를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따뜻한 봄날이길 기대해 봅니다^^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이 변절자다? 아니다? 진위를
가리기는 힘들 겁니다 근세사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따뜻한 봄날이길 기대해 봅니다^^
혹 변절을 했다는게 자랑할것은 못되겠지만 욕할만한것도 곤란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온갓협박과 회유가 있었을것입니다. 그것을 이길자 드물것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는것 의지 자체가 대단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따뜻한 봄날이길 기대해 봅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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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8일 손병희 등 33인은 齋洞 손병희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 발표를 인사동의 明月館支店으로 변경하였다. 이 날 학생들은 勝洞敎會에 모여 李甲成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1,500매를 강기덕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월1일 정오 4,5천명이 모인 가운데 탑동공워 팔각정에 鄭在鎔 학생이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함께 모인 시민 군중이 모두 가담하여 만세가 시작됐다. 이날 33인<그 중 吉善宙, 劉如大, 金兼祚, 鄭春洙 등 4인은 불참>은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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