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비씨 470 – 비씨 399)가 서양 철학의 핵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전에 있던 철학자는 외부에 보이는 것을 탐구 대상으로 삼았던 반면에
인간.. 더 나아가 거울로는 볼 수 없는 내면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길을 설득 있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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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고 격.. 멋진 문장 가운데 하나로 그가 전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 명언은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써 있었다는 것인데..
그 의미를 반짝반짝 윤이나 세상을 비추는 문장으로 새기도록 만든 이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은 12세기 중국 송시대에 활동한 청원선사가 말했지만.. 20세기 성철큰스님의 말로 유명해지고 유행한 것처럼..
신 중심 세계에서 인간 중심 세계로 전환되면서..
서양에서 나타난 것은 자연철학이라 하여 외부에 보이는 자연이 탐구 대상이 되었다.
신 중심 세계에서 자연이란 창조를 통해 신이 준 선물이었기에 그것이 어떻게 왜 생겼는지.. 고민할 필요 없이 잘 이용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신을 (괄호) 속에 넣고 바라보니 어떻게? 왜? 가 당장 문제로 떠오르니 그 답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하여 서양에서는 비씨 7세기 부터 자연철학이 발전하다가 테스형에 이르러 그렇게 궁금해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 철학과 과학은 신 중심에서 벗어난..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동안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을 부정하며 나온 학문인 것이다.
동서양 사상을 공부한독일의 야스퍼스가 주장한 '축의 시대 Axial Age'라는 촌철의 표현은 바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한다.
그런데 야스퍼스 지적과는 조금 다른 길을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문화권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축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동기는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부가 늘어나면서 그전에는 왕족만이 누리던 여유를 중산층 이상이 누리게 되면서.. 곧 배가 불러지면서 중산층 까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아시아에서는 자연보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탐구가 중심이 되었다.
석가모니는 시간적으로는 테스형이 활동한 시기 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서는데..
내용을 보면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존재하는 나 자신을 알라"는 것 보다 훨씬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정도를 넘어 차원이 아예 달라진다.
석가가 비핀하는 당시 우파니샤드 철학만 해도 나 자신을 보라고 했던 테스형 보다 인간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 있다.. 비판이 가능하지만..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테스형에게 너라 불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가 아닌가?.
사춘기 를 지나면서 나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면 50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일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명상에 관심을 갖고 할 수 있다면 단기간 템플 스테이나 피정, 영성 수현회에 참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40, 50을 지나 60대가 되면..
테스형이 말하는 너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철학을 가까이하는 시간을 늘려간다.
60대를 보내면서 70, 80대로 흘러가면..
석가가 지적하듯.. 존재하는 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존재하는 나는 없구나'에 이르는 사색 시간을 갖는다.
여기에 이르면 불교는 늙은이의 종교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틀린 생각이 아니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게 단순히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으로 안다면..
불교가 어떤 가르침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불교는 세상 어떤 것 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두 말을 허락하지 않으니.. 세상 가르침은 모두 존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홀로 존재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나 자이나교, 기독교 그리고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은 모두 존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종교는 그들만의 주장으로 사후에도 존재가 머물 곳을 제시하고 있다.
단지 불교만이 '존재하는 나는 없다'라고 관찰하여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존재에서 벗어나는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불교는 대승불교가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를 보며 말한다.
석가 수행자가 고행림을 벗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더 이상 위가 없는 깨침에 이르는데..
깨침에 이른 후 본 것이 '존재하는 나는 없구나' 였기에.. "(존재하는) 나는 죽음을 벗어났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이 말을 기억하는 자들은 "하지만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지 않았는가?" 하면서 썡쇼를 한다니.. 심지어 그는 사기꾼이라 하는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인 마음의 관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견해일 뿐이다.
존재의 눈으로 보면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음을 맞이한 게 틀림없다.
그러나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깨침을 얻은 순간 이후 석가모니는 '존재하는 나'는 사라졌기에..
80세에 죽음이란 사건은 존재로 세상을 보는 자들의 판단일 뿐이다.
물론 이해가 어렵다. 우리는 존재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테스형이 석가모니의 '나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내가 할 수 없었던 말을..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당신은 이미 했군요!^^"가 아닐까..
왜냐면 대화란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건데..
테스형이 만난 상대는 존재하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므로..
그런 상대에게 어찌 무아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에이아이에게 무아를 물어보면
무아(無我)는 '없을 무(無)'와 '나 아(我)'를 사용하여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 핵심 교리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법(상호 의존)에 따라 변하므로 집착할 '나'나 '나의 것'이 없음을 뜻하며, 흔히
몰입하여 나를 잊는 상태인 무아지경(無我地境)으로도 사용됩니다.
라는 답을 듣는다.
이로써 무아가 무엇인지.. 감이 오는감?^^.
석가모니가 "아! 나는 없구나!" 했을 때.. 그 직전까지는 6년 고행할 때도..
나가 있는 줄 알고.. 그 나가 무아지경에 종종 이르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무아지경에 이르는 나도 없구나' 하고 깨친 게 석가가 말하는 무아다.
우린 나 자신의 안을 보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기에..
나이에 관계없이 이런 얘기는 껄끄럽고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런데 죽음에 한발 또 한발.. 다가가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다면..
죽음 앞에 선 이들에게 그 보다 더 행복한 게 어디 있으랴.^^.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