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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 뒤편, 목 백일홍, 사랑을 지켜가는 아름다운 간격 외
한남대학교 전 총장 김형태 장로님이 한교선 단톡방에 공유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패랭이꽃 /정습명■
세상 사람들 모란을 좋아하여
뜰안에 가득 가꾸고 있는데,
누가 알랴, 거친 초야에도
좋은 꽃들이 피고 있음을
빛깔은 연못 속 달에 어리고
싱그러운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
궁벽한 땅이라 귀한 손님 적으니
늙은 농부만이 그 맵시를 즐기네.
(*고려때의 문신/정몽주의 선조)
■패랭이꽃/양채영■
패랭이 꽃들은 해죽해죽
우리들을 따라 다녔다.
맑고 또렷한 눈, 코, 입
가늘고 단단한 몸매
전쟁은 또 한 고비.
뜨거운 이름들을
이 돌자갈밭에 흩뿌리고...
저 오똑한 코 밑으로
바르르 떨고 있는 패랭이 꽃.
■패랭이꽃/류시화■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 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 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 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 꽃.
여러분은 ‘패랭이꽃’을 좋아하시나요?
길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패랭이꽃은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끄는 식물입니다.
‘패랭이꽃’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꽃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데, 꽃의 생김새가 옛날 상민들이 나들이 때 즐겨 쓰던 ‘패랭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석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패랭이꽃의 가늘고 마디가 있는 줄기가 마치 바위틈에서 자라는 대나무 같다고 하여 ‘석죽(石竹)’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석죽 집안에는 장구채, 끈끈이대나물, 안개꽃 등 패랭이꽃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패랭이꽃 = 석죽’은 맞을지라도 ‘석죽 = 패랭이꽃’은 틀린 답입니다.
오늘의 탄생화는 이 패랭이와 대나무를 닮은 패랭이꽃속 중에 ‘수염패랭이꽃’이라는 식물입니다.
패랭이꽃속에는 패랭이꽃, 수염패랭이꽃, 술패랭이꽃, 구름패랭이꽃, 갯패랭이꽃 등 다양한 모양의 패랭이꽃이 있는데, 그중 수염패랭이꽃은 유난히 눈에 띄는 패랭이꽃이기도 합니다.
이름 앞에 ‘수염’이 붙은 이유는 작은 포(꽃덮개)가 가늘고 긴 수염 모양이기 때문에 ‘수염패랭이꽃’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꽃덮개란 꽃부리와 꽃받침의 구별이 없는 경우, 이 둘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줄기에 털이 있는 품종도 있는데, 이 품종은 ‘털수염패랭이꽃’라고 부릅니다.
개화시기는 5월~7월로 이맘때쯤 피어나며, 꽃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꽃은 흔히 적색 바탕에 짙은 무늬가 있지만 여러 가지 색상이며, 원줄기 끝에 뭉쳐서 핍니다.
줄기는 뿌리 쪽 잎은 뭉쳐나고 뾰족한 편이지만, 줄기 쪽 잎은 마주나기하며 긴 타원상이고, 밑부분이 점차 좁아져 줄기를 감싸는 특징이 있습니다
수염패랭이꽃의 꽃말은 ‘의협심’입니다.
의협심이란 남의 어려움을 돕거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로운 마음을 뜻하는데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출처:모야모
■ 뒤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들 /천양희■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 밥 / 천양희 ■
외로워서 밥을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네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여기 이방인은 없다.
오로지 당신이 아직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있을 뿐이다/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영혼의 시인이 되지 않고 수학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피아 코발레프스키아 )
■목 백일홍/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 여름부터 초 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같은 사람 없는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 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 가는걸 알면서
온 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 꽃 나 무 / 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달고 있는건 아니다
삼백 예순 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애 겨우 몇 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내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주고
먼 산 처럼 배경 되어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 받은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 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달고 있는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피우고 있는게 아니라서.
(도종환/시인 중고교사/ 국회의원/문체부 장관)
■사랑을 지켜가는 아름다운 간격/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각자이듯이 서로 가슴만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더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가 없다.
(** 부부는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래서 같아지려고 하지 말고 닮아가려고 하라./화이부동 하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 30년 이상 따로 살다 만났는데 응당 다른 점이 많게 돼있다.
서로의 단점을 배우자가 보충해주라. 둘이 합해 좀더 완전한 하나가 되도록 하라.
부부간에 최소한의 윤리는
1. 궁금하게 하지 마.
2. 불안하게 하지 마.
3. 피곤하게 하지 마.
바울 사도의 충고는
'기도할 때 이외에는 절대로 딴 방을 쓰지 말라'/고전 7:5 )
[ 영웅을 인정하지 못한 아쉬움 ]
"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大明) 천지(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겨세라 /언제나 남북 풍진(風塵)을 헤쳐볼꼬 하노라"
(南怡 /1441~1468)
남이(南怡)장군은 태종의 외손자이자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사위이기도 하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6세에 병조판서 (국방부장관)가 된 천재형 무관이다.
위 시조는 이시애의 난(1467)과 건주의(만주 吉林省)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지은 것이다.
환하고 넓은 세상에 전운이 자욱하니 북쪽 여진과 남쪽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고자 하는 기백과 포부를 시조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지은 또 하나의 한시가 전해오고 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의 돌들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강물은 말에 먹여 없애리/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훗날 그 누구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이런 남이 장군을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예종이 즉위하자 노골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좌천시켰다.
위 한시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구절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날조한 후 역모를 꾀했다고 참소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젊은 영웅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당대의 비운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어느 시대나 이처럼 비정한 음모와 시기 질투가 있어왔다. 누구 잘되는 꼴을 가만히 보아주질 못한다. 남 못되는 것을 자기 잘되는 것보다 더 좋아하기도 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지도자의 밝은 눈과 그를 격려하고 북돋아 주는 신사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
큰 일을 많이 했을 젊은 영웅 한 사람을 생으로 죽여 남이섬 한 귀퉁이의 작은 무덤속에 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제는 정말 그런 일이 없어야겠다 (유자효 글 참조)
[ 왜 우리는 시간 부족에 시달릴까 ]
카지노에는 '시계와 창문'이 없다. 시간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당한 사람들은 계획보다 오래 머물며 더 많은 돈을 잃는다.
시계, 창문, 공짜 음료, 이것이 중독의 메카니즘이다. 짐바르도의 책 <나는 왜 시간에 쫓기는가>에는 많은 카지노에서 음료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이유를 음료에 든 알코올 성분이 우리를 더 현재 지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알코올로 인해 증폭된 현재 지향성이 큰 돈을 덥석 걸게 할 확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또 무료 음료를 받으면 어쩐지 그곳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카지노는 우리의 시간 관념을 왜곡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도입했고 이 유산을 물려받은게 SNS와 온라인 게임이다.
30분만 보겠다고 결심하지만 2~3시간을 넘기는게 예사인 유튜브와, 밤을 새우게 만드는 온라인 게임은 카지노와 비슷하다.
잭팟이 불규칙하게 터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좋아요'와 '구독', '게임 아이템' 획득 역시 패턴이 없다. 예측 불가능은 중독의 가장 큰 촉매제다.
플랫폼은 경쟁적으로 '추천 알고리즘' 과 '자동 재생'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 한 편만 보겠다는 애초의 결심은 무너진다. 돈 쓰는 법만큼 절약하는 법에도 능통한 현대인은 어째서 시간의 희소성에 대해선 둔감할까. 시간은 돈처럼 낭비되는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의 대가들은 왜 유독 '장기투자'를 선호할까. 이때 "부자가 되는데 중요한 것은 시간이지 타이밍이 아니다" 라고 말한 조너선 버튼의 조언은 기억할 만하다.
누군가 우리의 시간을 끊임없이 빼앗는다. 우리의 체류 흔적, 즉 데이터가 21세기의 석유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금 데이터 전쟁 중이고, 그 핵심에 '시간'이 있다. 회사원 시절, 하릴없이 보낸 일요일 오후에 우울감이 몰려오곤 했다.
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에 대한 보복이다'라고 나폴레옹이 말하지 않았던가 ?
(백영옥/소설가)
[ 총론은 하나님, 각론은 사람 ]
논문은 총론과 각론으로 구성된다. 종교도 비슷하다. 소위 운명론이나 사주(년,월,일,시)관상은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다. 반대로 도덕과 윤리는 각론만 있고 중심되는 총론이 없다.
상대주의와 상황윤리가 행위의 기준이 되다보니 사람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늘 가변적이다. '耳顯鈴 鼻顯鈴' 이요 '鹿皮에 가로曰자'(日과 曰자)다.
기독교는 어떠한가 ?
하나님은 총론, 사람은 각론이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중심에 두고 각 인간들이 받은 바 은사인 자유로 각론을 채워나가게 되어 있다..
주제인 총론은 같으나(통일성), 사람들이 채우는 각론은 서로 다를 것이다(다양성)
이 세상은 이 공식에 의해 운영되어 간다.
예를 들면, 전철은 최선의 교통수단일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한 교통수단은 아니다.
사회주의, 전체주의 및 관제사회는 전철로만 다니라고 통제한다.
교통수단의 선택과 이용은 각자의 자유다.
걷기, 버스, 승용차.
곧바로 가기, 돌아서 가기 등 각론은 각자의 자유로운 행위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각론을 쓸 수 있도록 주제를 주시면서 앞서서 가신다.
인간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그 주제에 맞는 자기의 각론을 써야 한다.
어떤 각론으로 총론을 채워갈까는 각자의 몫이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움을 통해 최선의 각론을 만들어 가도록 우리 모두 성실하게 살자.(이기경 목사)
■진실이 소리친다/육명길■
흰 구름이 흘러가니
태양은 찬란하다.
소나기가 지나가니
산천초목이 깨끗하다
성전은 오아시스라서
제사장 가슴엔
'우림'과 '둠밈'*
이마에는 여호와 성결
성도의 얼굴에는 빛
첫째, 둘째, 셋째도 거룩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 땅에는 평화로다.
[ * 우림과 둠밈(출 28:29~30, 레 8:8)은 둥근 모양이나 주사위모양으로 된 일종의 보석이다.
'우림'은 빛(하나님의 응답)이요 '둠밈'은 어두움(하나님의 거절)을 의미한다.]
《'빨리'보다 어려운 '천천히'》
■서 경주역/변홍철■
세칸 또는 네칸짜리 열차가
오분이나 육분 늦게 온다는 안내 방송.
들을 때마다 마음이 놓인다.
(중 략)
형산강 기슭 한가한 플랫폼 저쪽에서
꼬리 짧은 길고양이 한마리 게으르게
수염에 묻은 물방울을 털며 온다.
거슬러 갈 수는 없어도 천천이나 흐르자고
짐짓 휘어져 딴전을 부리던 강물이
애기똥풀꽃 한송이에도 고마운 해찰을 부리는.
(** 우리나라 기차 이름들은 누가 정했나 ?
새마을호. 무궁화호. 그리고 20여년 전 사라진 비둘기호도 있었다.
이제 KTX. SRT. ITX 같은 고속열차도 생겼다.
'완행열차' 란 말은 이제 '대전발 0시 50분'처럼 옛노래 가사에나 남아있다.
비둘기호는 1967~2000년까지 있었고 새마을호는 1974년에 나왔으며 KTX는 2004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기차이름에서도 여러가지 역사를 읽는다.
완행열차를 타고 離農向都가 빨리 진행되었다.
비둘기호를 타고 시골 청년들이 도시로, 공단으로, 항구로 떠났기 때문이다.
조국 근대화는 철로 위에서 '세계의 10년을 우리의 1년'으로 단축시켰다. 고속 성장과 압축 발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모든 역마다 정차하던 무궁화호가 2000년에 끝난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완행' 즉 '느림'이 추방당한 것이다.
새마을호가 '새마을 운동'과 무관하지 않듯이 초고속열차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맞물린 것이다. 그러는 동안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라는 슬로건이 우리 생활을 장악하고 말았다.
반대로 '느리게, 적게, 낮게'는 반시대적 구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속도가 느린 것은 사회악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변홍철 시인은 '거슬러 갈 수는 없어도 천천히나 흐르자'고 속엣말을 전하고 있다.
잠깐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자.
기차가 연착해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애기똥풀꽃을 보느라 해찰하는 사람, 이런 사람 어디 있으면 다가가서 통성명이라도 하고 싶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