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나?
알려고 하는 마음 일어나면
무엇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어떤 놈이 발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알려고 하는 마음 일어난다면
의심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 합니다.
답답한 기운에 집중하며 정진 강하게 밀어부쳐야
화두 열려있게 됩니다.
불교의 요체인 선(禪)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식적이고 지식적 차원의 이론적인 근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집적 적인 지혜를 눈뜰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음을 벗어나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목숨걸고 해봐야 겠다는
용기가 정말 중요합니다.
무지를 넘어
무지지지(無知之知)를 눈뜬 결과를 맛보고 인생무상함을
절실히 느껴보면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됩니다,
알고 보면 시작도 끝도 없었던,
시작과 끝이 동시인 모습 없는 모습에서
비롯된 물질적 장벽과 정신적 장벽을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인류는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낸 수행법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1.500년이 흘러 간화선이라는
수행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의 일입니다.
물질적인 벽은 간단한 도구만 있어도
허물 수 있는데 반해서
일반인들은 대개 정신적인 벽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정신적인 벽을 맛보고,
아! 이런 것이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될 인연자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벽을 느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허물 수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공부를 하자면,
앞에 있는 물건을
무엇이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여러분은 눈이 본다거나
마음이 본다고 대답하겠지요.
상식이나 지식으로 말하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지혜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놈이 있어서 볼 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은 분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이것’
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눈을
자기가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한 괴변이라고 생각합니까?
먼저 자기 눈을 보지 않고
보여지는 것은 없습니다.
눈을 먼저 본 뒤에야
사물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눈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거울에 비친 눈을 보고
‘저것이 눈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은,
한계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 상황 밖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수행을 통한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을 찾아서
전해주신 선지식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면서
간화선 수행의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보십시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합니까?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이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합니까?
마음은 왜 아니냐?
앞에서 말한 대로 마음이란 말은
이 일단의 일을 깨달은 이가 이 일을 알게 하기 위하여
짐짓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 말을 배워서 답이라고 해봐야
자기 안의 번뇌 망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깨닫지 않으면 아무리
알음알이로 답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마음이 한다고 가르치지만,
⛬ 불법에서는 이것을 부정합니다.
불법은 안과 법안을 말합니다.
⛬ 불교는 대자대비를 가루치지만
⛬ 불법은 無 慈悲 합니다
오로지 眞理 만을 추구합니다.
또 내가 죽어 송장이 되면
손가락이나 내가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손가락이나 발가락이나 내가 움직이게 하는 것
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손가락을 움직이게 합니까?
어떤 대답을 해도
그것은 이름에 불과합니다.
실질적인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인연이 있는 분이라면, 이쯤해서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눈앞을 가로막는 정신적인 벽을 느낄 것입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가?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한 번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답만 찾으십시오.
문제 따라 답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속에 걸리게 됩니다.
뭔가 갑갑한 기운이 가슴에 자리 잡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런기운이 왜 생겼습니까?
답을 모르니까,
알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 알고 싶은 궁금증이
그런 기운을 만들어 냅니다.
목마른 자가 물 찾다가 물이 안 나타나니까,
목만 더 마르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갑갑하니 알려고 해야 하고,
알려고 하지만 알아지지 않으니까
답을 찾아 계속 끝까지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부하는 것은,
그렇게 일어나는 의심만은 결코 놓치지 말라는 점입니다.
그 답답한 기운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방해가 오더라도 경계에 흔들리지 말고,
그럴수록 답 찾는데 더 집중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햇볕을 볼록렌즈에 맞추어
불을 얻는 것처럼 집중해야 합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인연이 있으면
바로 갑갑한 기운을 느낄 것입니다.
.
여기서 질문은 던져으면,
답만 찾아야 합니다.
더 이상 질문을
되풀이해서 외우지 마십시오.
문제는
한번 듣고 느끼면 됐습니다.
오로지 답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답 찾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지속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됐나요?
기분 나쁜 것도 아니고
기분 좋은 것도 아닌, 뭔가 아련한데
"갑갑한 기운이 느껴진다면"
”인연" 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인연에 오래동안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공부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답을 얻을 때까지 쉬지
않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집중’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집중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인 집중은
어느한 곳에 몰두하는 것을 말하지만,
간화선 수행에서의 집중은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연되어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운에 스스로 "사무치" 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뱃사공이
여울물을 만나서 위로 올라가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어떤 식으로 집중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 멀어집니다.
그냥 밀려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때의 집중력이란 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기 힘든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리뭉치를 두드려
거울을 만들기 위해서 혹은 팽이를 돌리기 위해서,
처음에는 매우 세게 쳐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화두가 걸립니다.
하지만 스스로 이렇게 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길을 가본 사람의 길안내를
받아야 비로소 그 가능성이 열립니다.
수행하기도 힘들지만
선지식 만나기가 더 힘든 법입니다.
좋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도 귀중한 福을 만남이요
소중한 인연을 만나는것도 소중한 행복의 씨앗입니다.
진실한 행복
소중한 진리
죽어도 좋다는 용기를 가지고 평생 공부하다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
불성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개나리 학당 묘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