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진허박사의 사주,풍수이야기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기본 게시판 스크랩 강원도 고성 죽왕면 오봉1리 왕곡 전통마을>[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眞虛 추천 0 조회 39 13.11.22 1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전쟁도, 산불도 피해가는 마을 있다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16-1>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 왕곡 전통마을(중요민속자료 236호)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꼭꼭 숨을 수 있는 강원도 왕곡마을의 모습. 이종호 제공

 

 

강원도 강릉시 선교장에서 ‘99칸’ 집이 무엇이라는 것을 맛본 후 ‘과학이 있는 한국 전통마을’의 마지막 종착지인 남한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왕곡마을로 향한다.

왕곡마을은 1988년 한국에서 처음 ‘전통가옥 보존마을 1호’로 지정됐고, 2000년 ‘중요민속자료 235호 고성왕곡마을’로 지정됐다. 그만큼 의미가 깊은 마을인데 정확한 위치는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다.

오봉리라는 이름은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데서 유래했다. 이들 산은 두백산, 공모산(골무를 닮았다고 하여 골무산이라고 부름), 순방산, 제공산, 호근산(송지호 갯가와 닿았다 해서 객사산이라도 함) 등이다.

주산은 오음산이고, 두백산·공모산이 좌청룡, 순방산·제공산·호근산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호근산을 안산(案山, 주택이나 묘택이 있는 혈(穴) 앞의 낮고 작은 산)으로 인식한다.

왕곡마을은 천혜의 은닉장소라는 데서 특별함이 찾을 수 있다. 송지호해수욕장에서 1km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마을 입구에 이르기 전에는 그 존재를 예상하기 힘들다.

이 마을은 동해안과 설악산을 찾아왔다가 특별한 명소가 없어 문화적인 향취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향취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다른 전통마을보다 조금 이른 고려 말 14세기부터 형성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왕곡마을은 함씨와 최씨의 집성촌이다.

함씨의 입향조는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인 함부열이다. 그는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해 이 마을 근처에 은거했다. 그의 형인 함부림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올랐지만 고려 말 예부상서와 홍문관 박사 등을 지낸 아우 함부열은 조선왕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함부열은 공양왕이 강원도 원주로 추방당하자 은밀히 뒤따라가 2년간 모셨다. 그러다 왕이 다시 유배되자 간성읍 금수리로 옮겨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자인 함영근이 조선의 눈길을 피해 은둔한 자리가 지금의 왕곡마을이다. 이후로도 거의 600년 이상 그의 후손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함부열이 근거를 잡은 곳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서쪽에 고개가 너무 높아 낮선 땅 같다’고 쓴 간성 땅이다. 그의 손자는 오지 중의 오지에서도 산으로 둘러싸인 우묵한 곳을 찾아 최종적인 은신처로 선택했다.

 

 

 

왕곡마을은 일제시대에도 화를 피했는데, 이는 일제가 동해안 쪽으로 새로운 국도(7번)를 만들면서 왕곡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일제가 폐쇄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마을이 무분별하게 변형됐음에도 왕곡마을은 일제의 개발에서 비켜남으로써 오히려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복되자 38선의 북쪽에 있던 왕곡마을은 북한 영토로 편입됐다. 마을에서 불과 30여 km 거리에 있는 월비산(금강산 남동쪽의 산)에서는 동부전선 최대의 격전이 벌여졌다. 휴전 직전 한국전쟁사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고성군 일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특히 왕곡마을을 지나가는 7번국도 주변의 마을이 대부분 파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곡마을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을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함포 사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을 ‘병화불입지(兵禍不入地)’ 곧 전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곳이라고 굳게 믿는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남측 땅이 됐고 지금까지 전통마을로 유지됐다.

왕곡마을이 남다른 마을임을 보여주는 일화는 최근에도 있었다. 1996년 4월 거대한 산불이 나 강원도 지역이 초토화됐고 2000년 4월에도 산불이 일어나 마을이 두 차례의 무지막지한 화마를 입은 적이 있다. 당시 주변 야산은 온통 숯덩이로 변했지만 정말 믿기지 않게도 왕곡마을의 집들은 상한 데 없이 멀쩡했다고 한다.

 

 

지주와 소작농이 평화롭게 사는 법

 

함씨가 왕곡마을에 들어온 내력은 정확히 알려졌지만 또 다른 주력 성씨인 최씨가 들어온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씨가 들어온 시기와 함씨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최씨도 함씨처럼 은거지를 찾아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양근함씨 4세 효자각의 모습. 왕곡마을은 함씨와 최씨 두 성씨가 주를 이루지만, 함씨 가문이 훨씬 세력이 컸다는 걸 보여준다. 이종호 제공

 

왕곡마을의 기본 성씨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세력 차이다. 함씨 가문에 6명의 효자비 있다는 것으로도 세력차를 짐작할 수 있다. 1820년 세워진 ‘양근 함씨 4세 효자각’은 함성욱부터 4대에 걸쳐 다섯 명의 효자가 부친에게 단지주혈(斷指柱穴)한 사연을 담고 있다. 4대가 손가락을 잘라 절명하려는 부모의 입에 피를 넣어준 것이다. 또 1869년 세워진 ‘함희석 효자비’는 비각의 전면 기둥 안쪽으로 홍살문을 세울 정도로 드높은 가문의 자부심이 나타난다.

 

 

함의석 효자각의 모습. 건물 안에 홍살문을 세울 정도로 가문의 자부심이 남달랐음이 드러난다. 이종호 제공

 

 

반면 최씨 가문에는 효자비와 같은 상징물이 없다. 양성(倆姓)마을에서 최씨들이 느낄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차이는 최씨의 경제력이 함씨에 크게 못 미쳤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은 최씨들이 함씨들의 땅을 소작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고 추정한다.

두 문중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왕곡마을에서 사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다는 게 놀랍다. 이는 두 가문이 똘똘 뭉칠 수 있는 끈끈한 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마을의 번영과 풍년을 비는 제사 즉 동제(洞祭)로도 알 수 있다.

많은 마을에서 보통 서낭제라 불리는 동제는 보통 음력 정월 보름날에 열리는데,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3일에 열었다. 다른 마을보다 다소 일찍 한 해를 경건하게 시작하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이때 소요되는 경비는 두 가문이 공동으로 부담했다. 경제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마을 공동의 일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에서 공동체를 운용하는 기본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두 가문의 차이가 어느 정도 노출되기 마련이다. 함씨들은 지주, 최씨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으므로 광복 직후 대체로 함씨들은 우익, 최씨들은 좌익 성향을 띠었다. 한 마을 사람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다면 큰 혼란이 벌어질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이념에 따른 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왕곡마을이 광복 이후에는 북한,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한으로 귀속됐다. 왕곡마을보존회 최종복 사무국장은 ‘광복 후 북한 땅이었을 때 남측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반대하지 않았고 한국전쟁 때 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근현대사를 한바탕 회오리로 몰아넣었던 이념 싸움 때문에 많은 마을이 피로 얼룩졌지만, 유대감이 남달랐던 왕곡마을 주민들은 그러지 않았다.

●남다른 경제력으로 전통마을을 지켜내다

우리 전통마을은 근현대기에 큰 변화를 맞았다.

첫째는 일제 통치, 둘째는 한국전쟁, 마지막은 새마을운동이다. 이로 인해 마을의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마을에 담긴 전통문화까지 파괴됐다. 한국전쟁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컸고, 일제 통치와 새마을운동도 이에 못지않은 파괴력을 보였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있던 마을 모두가 전통마을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1930년대 한국에 있던 약 1만5000개소의 전통마을은 현재 몇 십 곳으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전통마을다운 전통마을이 많지 않은 이유는 마을이 격변에 저항하지 못하고 변형됐기 때문이다.

 

왕곡마을 안내도. 이 마을은 고려 말부터 형성돼 일제통치,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등을 모두 겪으면서도 전통마을로 살아남았다. 이종호 제공

 

 

왕곡마을이 외부에서 오는 폭풍을 왕곡마을이 슬기롭게 막아낸 비결은 남다른 경제력에 있다. 넓은 농토와 재첩이 생산되는 호수를 확보하고 있어 강원도에서는 남다른 부촌이 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이 마을은 한국을 온통 새로운 물결로 바꾸는 대운동, 새마을운동도 피할 수 있었다.

우선 왕곡마을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주거지 안, 가옥과 가옥 사이에 텃밭이 있는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산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거주자의 식량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제공산’과 ‘호근산’ 너머에 있는 넓은 평야의 대부분도 왕곡마을 사람들의 소유다. 강원도에서 이 정도의 농토를 확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듯 일제강점기 때 ‘자력갱생모범부락’으로 선정돼 도백(도지사)이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또 호수 속 모래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송지호’가 불과 1.3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전국 호수 중 유일하게 재첩이 생산된다. 재첩은 바닷물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송지호에 태풍이 불면 재첩이 산란을 촉진시킨다고 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송지호가 민물로 변하면 재첩 생산이 크게 줄어준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2012년에는 마을에서 채취를 금해 소위 휴경을 하기도 했다.

 

 

강원도 사람은 어떤 집을 지었을까?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왕곡마을은 총 51가구가 있으며, 주민 150명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산다. 전체 주민 중 함씨가 약 80%, 최씨가 약 20%를 차지하고, 단 4가구만 다른 성씨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 실개천을 기준으로 금성교 상부(금성리)는 함씨가 주로 살고, 하부에는 최씨가 자리 잡았다. 땅이 부족해 서쪽에도 주거지가 형성돼 있다. 왕골마을은 실개천 옆에 있는 하나의 안길을 주축으로 마을이 나뉘어져 있어 답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왕곡마을은 풍수지리상 배를 밀어 넣은 행주형(行舟形) 지형으로 알려진다. 이런 지형은 한국 전통마을 중에서 매우 중시되는 길지 중의 길지다. 마을이 물에 떠 있는 배 형국이라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전설 때문에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적 해석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물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최종복 사무국장에게 질문하자 낙안읍성마을과 동일한 대답을 한다. 왕곡마을에서 굳이 우물을 파지 않아도 식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수질이 풍부한 3곳의 천연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이들 우물을 사용하지 않지만 최창손 가옥 앞 연못에는 마을사람들이 사용하던 우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풍수지리적으로 행주형 마을인 왕곡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않고 천연우물을 이용했다. 최창손 가옥 앞 연못에 예전에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있다. 이종호 제공

 

●‘북풍한설’ 피하려 밀착한 건물… 북방식 한옥인 ‘겹집’

14세기경부터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현재 보이는 건물들은 19세기 전후에 건설된 것이다. 왕곡마을의 기와집 가옥은 대부분 안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 내에 수용된 구조다. 또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있는 ‘ㄱ'자형으로 이는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의 전형적인 겹집 구조다.

북방식 한옥은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한옥이다. 외풍을 피하면서 부엌의 열을 최대한 이용해 집안에서 의식주가 함께 해결되도록 만들었다. 소를 기르는 외양간도 부엌과 이웃해 한기를 피하도록 했다.

겹집은 여러 채가 겹으로 되거나 잇달린 집으로, 한 개의 종마루 아래에 두 줄로 나란히 방을 만든 집이다. 이런 집은 같은 부피의 홑집에 비해 외피 면적이 작아 열 손실이 적으므로 추운지역에 적격이다. 실제로 사랑방의 경우 난방을 위해 별도의 아궁이를 만들었고, 불씨를 보호하려고 별도의 공간도 만들었다. 이는 함경도를 비롯한 관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북방식 전통한옥 구조인데, 왕곡마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북방식은 가능한 온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추위를 피해 건물끼리 밀착하다보니 집 모양이 밀집형의 ‘田’자가 됐다. 반면 남방식은 바람이 통하고 방과 방이 떨어지도록 대청을 들인 ‘ㅡ’자형이 기본이다. 그러므로 북방식 전통한옥은 마루가 발달한 남방식과 구별된다.

●여름에는 마당으로 냉방… 동선 짧고, 방어 쉬운 장점 선호

북방식인 겹집의 문제는 여름철에 나타난다. 겹집은 두 공간(방)이 앞뒤로 겹쳐 있으므로 맞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홑집에 비해 통풍이 잘 안 된다. 더욱이 왕곡마을은 부엌 앞에 마구가 있어 부엌에도 맞바람이 들지 않는다.

왕곡마을에서는 이런 문제를 마당으로 해결했다. 여름철 한낮에는 뒷마당에 그늘이 지므로 주위보다 기온이 낮다. 반면 개방적인 앞마당은 내리쬐는 태양복사열로 인해 기온이 올라간다. 결과적으로 방문을 열어두면 뒷마당의 차가운 공기가 방을 통해 앞마당으로 이동하게 되므로 방 안을 시원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마을에서 겹집이 지속된 이유가 기후뿐만 아니다. 근래 알려진 연구에 의하면 왕곡마을의 겨울철 평균 기온은 서울 기온보다 높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겹집보다 홑집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겹집을 만든 이유가 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겹집은 모든 주거공간을 한 채에 통합해 집터를 적게 차지하고 동선(動線)도 짧아진다. 경사가 급한 산지에는 집터를 넓게 조성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눈이 많이 오면 채 사이를 이동하는 것도 만만찮으므로 겹집이 더 유리하다.

또 겹집은 정지(부엌)와 사랑방을 통해서만 채 안팎을 드나들 수 있고, 본채와 그 뒷마당을 쉽게 폐쇄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주거공간의 방어와 관리가 비교적 수월하다. 외진 산간마을의 경우 외침 방어는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겹집이 유용했다.

결국 이런 장점이 부각돼 왕곡마을에 겹집이 대를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안마당’ 아니죠, ‘앞마당’ 입니다!

 

왕곡마을의 특징은 대문 없는 마당이다. 동족마을(clan village)인 왕곡마을이 개방적 구조를 택했기 때문이다. 본채 앞의 마당은 다른 마을의 한옥에서 보는 안채로 둘러싸인 안마당과 다르다.

한필원 교수는 이런 경우 안마당보다 ‘앞마당’이 더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앞마당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위에 담과 대문도 없어서다. 사랑방 옆에도 매우 작은 사랑마당이 있는데 담 같은 인위적인 차단 요소가 없어서 그렇게 구분된다는 것을 겨우 인식할 정도다.

물론 뒤쪽으로는 높은 담을 쌓아 뒷마당을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뒷마당은 가장자리를 이루는 옹벽 형태에 따라 보통 반달형이나 사다리꼴로 만들어진다. 이는 직선보다 휘어져 있을 때 구조적으로 더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구조가 겨울철 찬바람을 막는 실용적인 면도 고려한 것이다.

뒷마당을 더 넓게 할애해 그 안에 부속채를 둔 집도 많다. 뒷마당은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고 부엌 앞으로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한 것도 특징이다. 이것은 뒷마당이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방 아래 외양간?

왕곡마을 집의 또 다른 특징은 외양간(마구)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소나 말이 사는 외양간을 안채와 사랑채와 병설시켰는데, 이는 한마디로 ‘소나 말을 실내에 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왕곡마을의 채는 안채 또는 사랑채라 부르지 않고 아예 본채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다채로운 마구 지붕이다. 왕곡마을의 마구 지붕을 살펴보면 가적지붕(한쪽으로 경사지게 덧댄 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 거의 모든 한옥의 지붕형식을 찾을 수 있다.

팔작지붕을 가진 마구는 더 흥미롭다. 마구에 소를 키우고, 그 위에 다락을 만들어 수납공간으로 이용하거나 아이들 공부방으로 이용한 것이다. 아래에는 집안의 재산목록 1호가 있고 위에는 집안의 기둥이자 미래인 아이들이 있는 정겨운 모습이다. 물론 현재 왕곡마을에서 소를 키우는 집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마구 공간은 대부분 창고로 쓰이거나 욕실 등으로 개조됐다.

●새마을운동 때도 지붕만 바꿔

참고로 왕곡마을이 경제적으로 다른 마을과는 달리 자급자족이 가능해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새마을운동 자체가 이곳을 완전히 빗겨난 것은 아니다. 서슬이 퍼랬던 당대에는 아무리 전통마을이라도 정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상당한 불이익을 가져왔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대조류를 왕곡마을은 슬기롭게 대처했다. 그들이 살던 집 자체는 변형시키지 않고 초가지붕만 소위 슬레이트로 바꾼 것이다. 담도 벽돌로 바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집 구조가 북방지역 기후에는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왕곡마을의 이런 고집은 ‘우리 것을 찾자’는 전통마을 복원 움직임이 확산될 때 빛을 발했다. 초가집을 슬레이트로만 바꿨으므로 지붕만 바꾸면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마을로 쉽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전통마을로 복원된 대부분의 마을이 새마을운동 같은 격변기에도 건물의 근본인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에게 전통과 개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붕까지 덮는 눈 대비한 한옥 있다?없다?

 

 

왕곡마을의 유일한 문화재인 ‘함정균 가옥‘의 모습. 이종호 제공

 

 

왕곡마을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함정균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78호)’은 마을회관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건물은 안채와 행랑채로 구성됐는데, 안채는 함경도형 온돌 중심 겹집에 마루가 도입된 전형적인 평면 형식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2칸에는 마루가 있고, 그 뒤로 2칸의 안방이 있으며, 측면에 사랑방과 고방(庫房)이 있다.

자연석 기단과 초석에 각기둥을 세운 후 굴도리의 얼개를 만들었다. 굴도리는 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에 받치는 수평재의 일종이다. 외벽은 목조 건물에 흙벽을 칠 때 처음 바른 벽 위에 다시 한 번 시멘트나 황토 반족을 바르는 ‘재사벽’으로 마감했다.

전면 창호는 세살문으로 짜여있고, 마루방 부분의 아래는 가름대를 두르고 벽채 중간에는 띠방이 있다. 안방과 고방 뒤에 툇간마루가 있으며 마루 양쪽 끝은 뒤주와 판재로 만들어 벽장으로 사용하는 수장 공간이 있다.

행랑채는 방 2칸과 흙바닥의 헛간으로 평면을 구성하며, 방의 전면과 측면은 툇마루로 둘러 싸여 있다. 마구간은 본채 처마 아래로 튀어나왔으며 내림 지붕을 하고 있다.

 

함형찬 가옥의 모습. 최종복 제공

 

 

함정균 가옥에 들어가기 전 샛길에는 ‘함형찬 가옥’이 있다. 이 집의 경우 사랑마당이 다른 곳과 달리 앞마당과 물리적으로 나뉘어 있다. 토석담으로 둘려진데다 앞마당과 사이에 일각대문(一角大門)이 설치된 것. 또 사랑방 난방을 위한 별도의 아궁이를 만들고 불씨를 보호하기 위한 공간도 별도로 마련됐다. 이는 드센 겨울바람에 대비한 것이다.

●한반도 닮은 논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왕곡마을의 집이 독특한 점은 지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회칠을 하지 않고 나무로 엮은 산자가 있는 채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게 구성하고, 전면보다 배면의 서까래 직경이 더 굵다.

왕곡마을 토박이 전만표 선생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형태는 지붕 내부를 환기시켜 이슬이 맺히지 않도록 한 것이고, 배면 직경이 더 굵은 이유는 지붕에 쌓이는 눈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형태로 지어진 지붕. 이종호 제공

 

 

이 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집마다 다르게 만든 굴뚝 모양이다. 보통 굴뚝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은 모양이다. 항아리는 굴뚝에서 나온 불길이 초가에 붙지 않게 만들고,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선조의 지혜다.

굴뚝의 규모가 큰 경우 봉수대와 맞먹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높은 굴뚝은 바람이 많이 불어 굴뚝으로 역류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굴뚝의 다양한 모양은 상징성과 조형성을 가지는데 이는 집 주인의 개성을 보여주므로 답사할 때 잘 살펴보기 바란다.

 

 

왕곡마을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 이종호 제공

 

 

마을 하단부의 논의 형태가 하늘에서 보면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닮았다는 점도 놀랍다. 일부러 한반도 지형 형태로 논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롭다. 정미소에서 포토샵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앙 부분에서 바라다보면 한반도 지형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동학사적 기념비. 이종호 제공

 

 

 

대나무 이용한 전통놀이는 뭘까?

 

매년 10월이 되면 지역 전통놀이인 ‘깃대싸움’으로 함씨와 최씨의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재현한다. 놀이의 주요 인물과 방문객이 최씨와 함씨 양편으로 나뉘어 놀이에 참여한다. 대나무 작대기를 밀어뜨려 승부를 가리고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거나 뒤로 밀려나면 진다.

이 밖에도 ‘상여 외나무다리 건너기’, ‘왕곡마을재래식 정미소 체험’, ‘전통마당놀이 체험 ’, ‘경운기타기’ 등의 행사도 열린다. 음력 1월 14일에 마을사람이 모여 밥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하는 재미있는 풍습도 있다.

마을 주변은 그 어떤 전통마을보다 화려하다. 송림이 울창한 송지호는 경관이 수려해 고성의 대표 관광지가 됐다. 이 호수는 한반도 해안선을 이정표로 삼아 남쪽으로 날아가던 겨울철새가 잠시 머무는 철새도래지로, 국도변에 철새관망타워가 있으며, 매년 겨울 청둥오리와 천연기념물인 고니가 호수로 날아든다.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휴전선과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 고지의 고성 통일전망대에 서면 금강산 구선봉과 해금강이 지척에 보이고 맑은 날에는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등도 볼 수 있다.

인근에 설악산국립공원과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월정사도 있다. 월정사는 국보 48호인 팔각9층석탑과 보물 139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을 보유하고 있다. 석가모니 치아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 건봉사도 근처에 있다.

●전통마을 답사를 마치며

왕곡마을을 끝으로 ‘과학이 있는 한국 전통마을’ 답사를 끝마친다. ‘과학유산답사기’에서 한국에 있는 한국 전통마을을 모두 답사한 것이 아니므로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현재 우리 것의 참맛을 찾자는 구호 하에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신들의 마을을 특색 있는 한국 전통마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아직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전통마을이 많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나라에 있는 미발굴 전통마을을 고려한다면 이번 답사는 이제 우리 것 찾기의 첫 발자국을 디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새로운 전통마을 찾는 일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새로운 답사 일정으로 우리의 참맛을 느끼는데 도전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인 하회마을, 양동마을, 제주성읍마을을 이번 답사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 다소 아쉬움을 표했는데 이들 전통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답사할 때 중점적으로 설명할 예정임을 알리며 마무리한다.

 

참고문헌 :
『우리고향산책』, 김선규, 생각의나무, 2002
『민통선 평화기행』, 이시우, 창비, 2003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1)』, 김봉렬, 돌베개, 2006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한필원, 북로드, 2007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낙안읍성』, 송갑득, 순천시, 2012
「한옥」, 최준식, 네이버캐스트, 2010.01.18

(과학유산답사기 3부 끝)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mystery123@korea.com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THE SCIENCE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