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담배를 피우다가 큰 용기로 금연에 성공한 12년 전, 쉰셋 되던 해였다. 일생일대의 큰 모험으로 호주로 장기 체류의 길을 떠났다. 갑자기는 아니고 먼저 세 아이들을 호주에 유학 보내 놓았기 때문이다. 호주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25년 동안 글로벌마케팅 여행을 하며 모아놓은 약 100만㎞ 항공 마일리지를 십분 활용하여 여러차례 호주를 드나들며 차근차근 준비해 온 터였다.
나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주 업무인 수출 마케팅을 하면서 호주 생활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를 만들었다. 썼다 지웠다를 숱하게 반복하다가 결국엔 하나의 확고한 기준을 만들었다. 즉 '꼭 실천 가능한 내용만 할 것'과 '열 손가락 이내로 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놈의 욕심 때문에 가짓수가 자꾸 늘어났다. 탁상 위나 잠자리에서 한국에선 할 수 없는 것들을 중심으로 그 열 가지를 써 보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외국 친구들의 버킷 리스트를 인터넷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검색해 보니 25가지에서 무려 1천 가지에 이르는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가짓수가 많다 보니 거창한 것부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망라돼 있었다. 예를 들면 '남은 돈 몽땅 우주여행에 넣고 화성에서 살다 죽기'부터 '항의 시위하여 체포당해 보기' '달밤에 나체로 춤춰 보기' 등등. 그들의 기이한 발상과 일탈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12년이 지나 부산으로 돌아 와 되짚어 보니 대부분 리스트를 실천할 수 있었다. 내 주업과 관련된 디지털 기술 덕분에 시드니에 앉아서도 부산에 있는 것처럼 인터넷, 이메일, 스카이프로 글로벌 마케팅이 가능했다. 또 한국과 달리 술자리가 많이 없었으니 수십 년 동안 미뤄왔던 국내외 장편소설들을 맘껏 읽을 수 있었다. "공부해라"는 소리 한 번 안 하고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게 되었으며, 한국에서 큰마음 먹고 가는 골프장에 걸어서나 혼자서도 매주 갈 수 있었던 것이 그 리스트의 내용이다. 결국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이라 달리 특이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꼭 한 가지 남을 위해 뭔가를 맘 먹고 실천한다는 게 있었다. 그것은 워킹홀리데이(학생용어로 워홀)로 호주에 온 한국 학생(워홀러)들을 돕는 것이었다. 이 일은 우연히 시드니 공항에서 노숙하는 한 한국 학생을 집으로 데리고 와 머물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 광주의 K대학 영문과 학생인 그는 제대 후 복학하기 전 9개월 동안 워홀을 하기 위해 호주에 왔는데 시작부터 어긋났단다. 여정을 주도한 친구가 못 오게 되었고, 첫 호주 연락처인 선배 워홀러마저 연락이 불통이었다. 며칠 후 그를 한 오렌지 농장으로 보내 주었다. 6개월 후 귀국하기 위해 다시 나의 집에 들른 그와, 같은 처지의 학생 둘을 재우며 워홀러들의 힘든 사정을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말했다. 복학하면 친구들에게 전달하라고. 여비가 모자라는 학생들을 시드니 아저씨 집에서 며칠 동안은 재워줄 수 있다고. 이 말은 즉시 퍼져 얼마 후부터 주로 호남 지역의 학생들이 노크를 하더니 차츰 전국의 학생들에게 퍼졌다. 일 년을 겪고 나서 보람을 얻은 나는 '워홀러 돕기'를 아예 내 버킷 리스트의 제1 항목에 올리게 되었다.
첫발 디딘 워홀러들에게 임시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공부를 도와주며 나는 이렇게 당부했다. "영어는 한국에서 충실히 공부하고 호주에 와서는 실습과 체험을 해라. 호주의 모든 사람들을 영어 선생으로 생각하고 접근해라. 호주인에게도 영어는 외국어다, 콩글리시라도 배짱을 가지고 구사해라." 완벽을 추구하는 데 길들여진 학생들이 실수없는 유창한 영어를 하려다가 더 주눅이 드는 걸 많이 봐 온 때문에 이걸 강조했다.
이제 나는 나의 세 아이들로부터 졸업하고 12년 만에 부산으로 돌아와 있다. 지난해 12월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고 반 은퇴생활로부터 은퇴하여 수출마케팅 컨설턴트로 복귀했다. 요즘의 큰 즐거움은 간간이 국내 여행을 하면서 나의 워홀러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