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기독교의 수용의 과정은 구미제국의 동양진출과 시기를 같이 한다. 구미제국은 중국과 일본을 문호개방시켜 무역거래를 하고 외교관과 상인들을 상주시켰다. 한국은 1876년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강화도조약을 비롯, 1882년 한.미 수호조약, 1883년 한.영 수호조약, 1886년 한.불 수호조약 체결 등 국제 정세의 변동에 의하여 문호개방 과정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구미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에 로스, 매킨타이어, 이수정 등에 의해 성경이 번역되어 민중들에게 보급됨으로써 복음이 자발적으로 수용되었다.
1. 중국을 통한 선교사 내한
(1) 귀출라프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사람은 독일출신의 귀출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aff)목사이다. 그는 1826년 네덜란드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동남아지역 선교에 나섰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그에게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해 달라고 요청하여 중국 북쪽과 한국, 일본 오끼나와 및 타이완을 순방하게 되었는데 1832년 7월 17일 귀출라프는 한국 해안에 나타났다. 귀출라프 일행은 황해도 서해안 부근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책과 물건을 주며 한국인과 물물교환을 원했고 지방관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서를 보내려고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약 한달간 해안에 머물다가 한국을 떠났다.1) 귀출라프는 1832년 7월 27일자 항해기에서, 한국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에 관하여 자주 이야기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되풀이 하였으나 한국인들이 무관심하였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미 배포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금지령으로 책의 가치가 높아졌으며 읽고자 하는 열성이 더 많아졌다고 확신한다. 이 모든 사건들은 내가 기도로써 간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한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리라.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 같지 아니하였다. 고관들이 책을 받자 사람들은 밀려와서 책을 받았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2)』 귀출라프의 한국 방문은 당장 어떤 선교 효과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장차 한국에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였으니 훗날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2) 월리암슨의 선교 지원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가 시도된 이면에는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목사가 있었다. 그는 1807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한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로 있으면서 한국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토마스(Robert J.Thomas)목사의 한국선교가 그의 알선에 의한 점이고, 1867년 만주여행에서 봄철 개시(開市)에 참여하려는 한국 상인들에게 전도하였으며 동지사(冬至使)일행인 이풍익을 만나 한국에 관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등 한국 선교를 지원한 선교사다. 그의 한국 선교의 깊은 관심은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같은 신실한 후계자를 얻게 되었다.
(3) 토마스의 순교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을 얻은 사람은 토마스(Robert J.Thomas)목사이다. 그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1863년 상해에 도착,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다. 1866년 8월 9일 토마스 목사는 미국 상선 제너널 셔어먼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여 대동강 어귀에서 성경과 전도문을 나누어 주며 한국 관리들에게 통역관으로 상선의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말하고 한국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모여든 군중과 병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상선 셔어먼호를 공격하였다. 결국 상선은 불타고 놀란 선원은 물위로 뛰어 나왔으나 군민(軍民)들이 결박하니 그는 필사의 노력으로 싣고 온 성경을 강변을 향해 던지고 1866년 9월 2일 27세의 나이로 대동강가에서 순교하였다.3) 제너널 셔어먼호 사건은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함께 끝나지 않고, 상선이 미국 선적이기 때문에 훗날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의 체결로 연결되다. 한편 1933년 대동강변 언덕에 토마스 순교기념예배당을 건립하여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2. 성경 번역과 솔내교회 설립
(1) 로스.매킨타이어의 성경 출판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하였고, 1871년부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월리암슨의 지도로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아 노력을 집중하였으며 1872년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에 이어 로스(John Ross)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다. 로스는 1874년 10월 첫번째 고려문(Corean Gate)여행에 나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며 전도하였고,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아 같은해 4월 두번째 고려문 방문에서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났다. 로스는 이응찬이 귀국하자 서상륜을 만날 수 있었고, 1879년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사람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77년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신약전서인 「예수셩교 전서」를 간행하였고, 1881년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소책자 「예수셩교 문답과 예수셩교 요령」을 간행하였다. 위와 같이 번역.간행된 성서는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매서인)들이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들어가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구자들에 의해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인 1880년대 한반도 여러곳에 공동체들이 설립되었다 1882년 한글성서가 간행되기 전까지는 한문서적이 반포되었고, 1882년 3월 「예수셩교본」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자유스러운 한인촌(Corean Valley)을 대상으로 반포를 시작하였다. 서울의 전도는 1883년초 서상륜이 4백권의 복음서를 6개월간 반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그는 여려명의 개종자를 얻었으며 로스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베풀어 줄 것과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로스는 서울을 방문하는 대신 상해.제물포간의 기선 항로를 이용하여 1884년 봄에 다량의 한문.한글 성경을 보내 주었고, 서상륜은 이것을 받아 전도에 활기를 띠었다.
(2) 이수정의 성경 번역
...이수정은 1882년 9월 수신사(修身使)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1883년 일본 노월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수정의 개종과 공개적인 신앙고백은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재일 미국선교사들과 일본 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전도와 성서번역, 그리고 선교사초치운동이었다. 그의 성서 번역은 한문 성경에 당시 한국 지식층에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다는 방법으로 소위 현토성서(懸吐聖書)부터 시작하였는데 1883년 신약성서 마태전(新約全書 馬太傳)을 비롯하여 1884년까지 신약성서 마가전(新約聖書 馬可傳), 신약성서 로가전(新約聖書 路加傳), 신약성서 약한전(新約聖書 約翰傳), 신약성서 사도행전(新約聖書 使徒行傳) 등 5권의 한한성서가 각 1천부씩 출간되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 번역을 통하여 한국 복음전파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3) 솔내 교회의 설립
...1885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에서 서상륜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솔내 교회가 설립되었다. 서상륜은 의주사람으로 만주에서 행상을 하다가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던중 매킨타이어 목사를 만나 완쾌되어 세례를 받아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서상륜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할 수 없어 고향인 황해도 솔내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20여명의 신자가 생겨났고 그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1885년 초가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솔내 교회의 시작이다.
3. 미국 선교부의 선교
...미국에서 18세기말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거기에 따라 일련의 종교적 열정으로서 해외선교열이 고조되었다. 제2차 대각성운동은 여러 교단에서 선교회를 창립하였고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설립하는데 큰 자극을 주었다.
남북전쟁 후에는 부흥사 무디목사가 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1880년대 전국신학교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1810년에는 「미국회중교회 해외선교부」가 조직되었다. 감리회의 선교운동은 1818년 뉴욕의 교역자대회에서 「성서 및 선교회」를 조직하면서 본격화되었고 1844년 감리교 선교회, 1969년 부인해외선교회가 조직되어 해외선교 사업을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불가리아 등에서 전개하였다. 장로회의 선교운동은 1796년 뉴욕선교회, 1997년 서부 선교회, 1818년 연합해외선교회가 조직되었으나, 1826년 사업의 중단으로 산하 선교사 업무는 회중교회 해외선교부에 이관되었으며 1837년 장로교 총회 외국선교본부를 창설하였으나, 장로교회의 모든 선교 사업을 외국선교본부에서 집행한 것은 1870년경이다. 한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이 알려지게 되지만 미국 각교단에서는 한국에 대하여 선교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884년 6월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위해 잠시 방문하였고, 1884년 말 감리교 소속의 스크랜턴(Wm.B.Scranton)박사와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목사와 스크랜턴(Mary F.Scranton)부인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한국 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거쳐 같은 해 9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회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이었다. 알렌이 도착하기 전에 상당수 외국인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고, 1883년 5월에는 미국 공사관이 서울에 개설되었다. 알렌은 그후 영국 공사관의 공의로 임명되었고 여러 외국기관들의 부속 의사로 봉사하며 미국 공사와 외국인의 신임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묵인 아래 그는 개척 선교사로서 자신의 임무에도 노력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왕실과 지배층인 관료에게 돋보이게 되어 알렌은 왕실에 건의하여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개원하였다. 1885년 광해원(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개원될 즈음에 감리교, 장로교의 의료선교사는 물론 복음선교사도 입국하게 되어 장로교의 경우 미국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등 4개 선교부에서, 감리교의 경우 미국 남.북 감리회의 2개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를 추진했다. 또 다른 계통으로 1885년 영국 성공회를 비롯하여 1904년 안식교회, 1907년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1908년 영국 구세군 등이 한국 선교에 착수하였으며 동방교회 전통인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진출은 1898년 시작되었다. 한편 초기의 선교활동은 직접적인 복음 전도보다는 학교와 병원 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 방식을 취해야 했다.
제2절 장로교의 유래와 조직
...장로교의 유래와 조직은 제1절 개신교의 전래에서 연결되는 내용이지만, 대구제이교회 90년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경북노회 형성과정에 대하여 기존 자료에 근거하여 요약, 정리하여 장로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1. 장로교의 유래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유래에 관하여 1952년 발행한 창립 40주년 기념 서문교회 약사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게재하여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장로교의 유래를 살펴보기로 한다. 『 一五一七년 十월 三十一일 마튄루터 선생이 九十五개조의 공게론란문을 윗탠벅성 부속교회 대문에 붙이고 당시 화석(化石)과 같이 굳어진 기독교에 새생명을 가하는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기 시작하자 서서(瑞西)의 쯔윙그리 불란서의 요한 칼빈 선생을 비롯하야 기독교는 각지에서 새로운 진로를 찾게되니 이것이 성경대로 믿고 살려는 푸로태스탄트의 새 생명운동의 시작이다. 그중에도 一. 신자의 절대주권 二. 인간의 전연타락 三. 十자가로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四. 성신의 불가항적 은총 五. 예수그리스도 안에 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를 내포한 칼빈 선생의 신학은 一五四一년에 장노교회를 창시하게 되었으며 특히 스카트렌드의 장노회가 총본영이 되어 카나다 장노회 오스트렐리야 장노회 미국 남, 북 장노회 등 칼빈신학을 토대로 한 장노파 교회가 세계각지에서 우후죽순과 같이 이러나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一八六二년 스카트랜드 선교사 도마쓰목사의 평양 대동강변 순교4)를 위시하야 일어나는 핍박은 계속 되었으나 一八八二년 七월 四일 체결된 한.미조약으로 말미암아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어 一八八四년 九월에 알렌 의사가 오고 一八八五년 四월에 미국 북장노회에 파송함을 받아 원두우선교사가 서울에 오게 되었으며 一八七五년에 중국 봉천에 거주하는 영국선교사 노목사와 마목사가 서상윤씨로 더부러 국문 성경을 번역하고 영국 성공회와 스카트렌드 성서공회가 국문 성경을 인쇠하야 一八八二년에 발행하고 동년에 서상윤씨를 우리 나라에 파송하야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후 선교사가 계속하야 전국 각처에 포교하니 교회가 날로 왕성하여 一九一二년에 이르러 비로소 대한예수교 장노회 총회가 조직되고 평양에서 그 제一회가 모였으며 오늘에 남한만으로 四천여 교회와 七十여만신도를 가지게 됨이 그 간약한 유래이다5).』 위와 같은 장로교의 유래를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기존 개교회사에서 장로교의 한국 전래가 내한 선교사 중심 또는 교단별 선교회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에서 벗어나,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의 신학을 명시한 것은 당시 편집위원들의 신앙이 확고한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2. 장로교의 조직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형성과정을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6)에 따르면 1865년~1892년 계발시대(啓發時代), 1892년~1906년 공의회시대(公議會時代), 1901년~1906년 합동공의회시대(合同公議會時代), 1907년~1911년 독노회시대(獨老會時代), 1912년~1923년 총회시대(總會時代)로 구분하고 있다.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형성과 경북노회(慶北老會) 연혁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총회의 형성
...1884년 알렌이 내한한 이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며 서로 협력하고 연합으로 선교사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교파의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선교회간에 교계예양(敎界禮讓)이라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이 추진 되었다.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협의하여 인구 5천이상의 대도시(혹은 개항장)는 공동점유하되 그 이하의 도시와 지방들은 그때 당시로 선교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태를 보아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대원칙을 삼았다7). 1893년 1월 28일 선교사들은「장로교선교부 공의회」란 기구를 조직하였는데 그 목적은 미국 남북장로교와 호주 및 카나다 등 4개 장로교회를 한국에서 하나의 장로교회로 만들어서 선교하는 것이었다. 1901년부터 한국인이 공의회(회원 구성은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 선교사 25명)에 참석하면서 「조선예수교 합동공의회」라 불렀으며 이즈음 한국 교회는 부흥하여 전도부인을 양성하게 되고 곳곳에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으며 1900년대에 접어 들면서 한국 교회는 부흥의 불길이 계속 일어나 1907년은 한국의 오순절시기라 부른다8).
대부흥기(1907년) 교세 증가표9)
연 대 교 회 수 전도인수 세례교인 학습교인 헌 금(원)
1905 321 470 9,761 30,136 1,352,867
1907 642 1,045 18,964 99,300 5,319,785
증가율(%) 200 222.3 194.2 329.5 393.2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한국인 장로 36명과 선교사 33명 등 78명의 회원이 모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어 회장에 마포삼열 목사, 부회장에 방기창목사 등이 선출되었다. 이는 총회의 전신이요 한국교회의 대의원 정치의 시작이며 민족적으로 최초의 대의원회의였다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1907년 독노회 개최는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결의하였는데, 첫째는 장로회 신앙고백의 채택으로 현재까지 장로교단이 간직하는 12신조로서 1904년 인도 장로교가 채택하고, 그후 아시아의 각 장로교회들이 따른 것이다. 둘째는 1901년 평양에서 개교한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서경조, 이기풍,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인서, 방기창 등 7명이 한국 최초로 목사로 안수 받았다. 셋째는 선교사 파송으로 독노회에서 안수받은 이기풍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10). 한편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11)에 호응하여 외지선교부에서 김영재 목사를 만주북간도로 파송하였고 평북대리회에서는 김진근 목사를 서간도 전도목사로 파송하는 등 외지선교운동은 우리 교회 초창기부터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독노회는 전국지역이 광활하고 거리가 멀어 노회 회집이 어려우므로 경기, 충청도, 평북도, 평남도,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 각 지방에 7개 대리회를 설치하여 노회의 위임사항을 처리케 하였다. 1907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어 그 교세는 전국적으로 확장되어 1911년 9월 17일 대구 남문안교회(제일교회의 옛 이름)에서 제5회 독노회를 열어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할 것과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조직 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 성경학교에서 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 도합 221명이 모인 가운데 제1회 총회가 창설되어 회장에 언더우드, 부회장에 길선주 등을 선출하여 한국 역사상 최초의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형성되었다. 1912년 총회 산하 각 노회의 조직적 상황을 요약하면 1911년 12월 4일 경청(京淸)노회, 1912년 2월 15일 평북(平北)노회, 1912년 1월 18일 평남(平南)노회, 1911년 12월 8일 황해노해 , 1911년 10월 11일 전라(全羅)노회, 1911년 12월 6일 경상(慶尙)노회, 1912년 1월 29일 함경노회 설립 등이다12). 대구지역 교회는 1907년 조선예수교 독노회 시대에는 경상대리회, 191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시대에는 경상노회, 1916년부터 경북노회에 소속되기에 이른다.
(2) 경북노회 연혁
...경북노회는 1911년 조직된 경상대리회에서 시작된다. 1911년 12월 6일 부산진예배당에서 목사 17명, 장로 9명 합계 26명으로 경상노회가 창립되어 회장 왕길지, 서기 홍승환 목사를 선출하였으며 경상노회에서 중심적 활동은 왕길지, 안의와(James E. Adams), 부해리(Henry M,Bruen) 선교사와 홍승한, 이현필, 정득생 목사이었다. 1916년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열린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과 경남」 두 노회로 분립할 것을 결의하였고, 선교사 13명, 목사 7명, 장로 25명으로 구성된 경북노회가 분립하였다.
『慶北로회 뎨一회록
-. 주후 一千九百十六년 十二월 二十七일 하오 八시 慶北로회가 大邱府 南城町례배당에셔 조직회로 회집하야 회쟝 洪承漢시가 邦惠法시의 찬송인도와 朴永祚시의 긔도로 개회하다
-. 회쟝이 로회분립된 사건과 취지를 설명하고 림시 서긔션정하기로 하다
-. 림시 서긔는 회쟝이 지명션정하기로 결정하매 회쟝이 金忠漢氏로 자벽하다
- 회쟝이 金泳玉시로 셩경(엡 四장 一졀노 十六졀)까지 낭독하고 로회의 직무란문데로 회쟝이 강셜하다
-. 신임임원 션정할세 회중이 투포하야 회쟝은 朴永祚 부회쟝은 金泳玉 셔긔는 金忠 漢 부셔긔는 李萬集 회계는 鄭在淳시로 션정하다
-. 신임회쟝을 환영할시 신임셔긔가 영접하야 승셕키로하고 회쟝이 깃분마음으로 환영하다
-. 신구회쟝 교체식을 횡한후 명일 상오 상오 九시에 성경학교에서 다시 회집하기로 하고 신임회쟝의 축복긔도로 뎡회하다
회 쟝 朴 永 祚
셔 긔 金 忠 漢 』 13)
...1916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상노회의 교세는 선교사 18명, 목사 8명, 조직교회 30곳, 미조직 교회 493곳, 세례 교인수 10,078명이었다.
1916년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계표14)
노 회 선교사 목 사 조직교회 미조직 세례교인총수 재정 교회 교인수
북평안 8 32 60 260 14,181 35,638 43,055.31
남평안 9 36 99 179 16,137 31,195 31,009.30
함 경 12 7 23 214 3,001 13,068 14,404.84
황 해 5 21 52 106 7,893 16,960 18,623.38
경 충 8 6 24 134 3,781 8,615 12,313.47
경 상 18 8 30 493 10,078 2,444 24,584.89
전 라 17 10 48 219 8,131 16,493 19,269.98
계 77 120 336 1,605 63,202 146,413 170,482.28
...대구지역 기독교는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은 경북각지에 메아리쳐 갔으며 매년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906년 범어교회를 비롯하여 1909년 침산교회 분립, 1912년 신정교회(현 제이교회) 분립, 1912년 효목교회 분립, 1914년 남산교회가 분립되어 당시 대구시내에서 남성정, 신정, 남산교회를 3처 대교회라 부르며 대구 교계에 자랑하였다. 복음 전도의 불길은 확장되어 점점 확장되어 경북 각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안의와 (JamesE.Adams)선교사는 서자명조사와 함께 경산 영천 청도 3개군, 부해리(H.M.Bruen)선교사는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김호준 조사와 함께 선산 군위 칠곡 4개군, 맹의와(E.F.McFarland) 선교사는 김호준, 서성오 조사와 함께 고령 영일 경주 청송 지방을, 어도만(Walter C.Erdman) 선교사는 김성삼 조사와 함께 군위 의성 선산지방을 각각 순회 전도하면서 경북지역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15). 한편, 대구 선교지부는 많은 기관을 세웠는데 1900년 대남(大南)남자 소학교, 1912년 신명여자 소학교를 비롯하여 1906년 계성(啓聖) 중학교, 1907년 신명(信明)여자중학교, 1913년 대구성경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의료기관으로 1899년 제중원(濟衆院, 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을 설립하였으며 교회내 기관으로 1911년 제일교회에서 경북최초로 여전도회가 조직되어 1925년 경북여전도회연합회로 발전하였고, 1918년 대구교남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되어 1925년 회관을 건립하고 해방이 되자 대구 YMCA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북노회는 일제 강점기간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수난을 받았으나 해방과 더불어 노회는 재건되었고, 1916년 경북노회 설립부터 2002년까지 경북노회 연혁은 다음과 같다.
경북노회 연혁16)
1893. 1. 28 「선교사 공의회」 조직
한국에서「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전도를 시작한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 장로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 로회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란 기구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하나의 장로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골자이고 선교사들 만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1901.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조직
외국 선교사들 외에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회원이 된 조직이다. 이 조직은 개혁 신앙과 장로정치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한국에 있어서의 통일된 조직체를 위한 예비적 회합이다. 이때 한국인은 장로 3인, 조사 6인, 선교사 25인이었다.
1907. 9.17 「독노회」 조직
평양 장대재(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 조직 독노회는 전국에 7개 대리회를 두다. ① 경충 대리회 ② 평북 대리회 ③ 평남 대리회 ④ 경상 대리회 ⑤ 함경 대리회 ⑥ 황해 대리회 ⑦ 전라 대리회
1911. 9.17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7)」 조직
대구 남문안교회(현 제일교회)에서 제5회 조선노회시 7개 대리회를 노회로 개칭하여 총회 조직을 결의하다
1911. 12. 6 「경상노회」 조직
부산진교회에서 경상노회 창립노회 조직하다
1916.12.27 「경북노회」 조직
대구 제일교회에서 제1회 경북노회 조직하다. 1916. 6. 22 대구 성경학교에서 개최한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노회와 경남 노회를 분립할 것을 결의하고, 1916. 9.12 제12회 총회에서 허락 받음
1921.12.20 「경안노회 분립」하다
1921. 9. 10 제10회 총회에서 허락 받음
지역: 안동, 영주, 봉화, 영양, 청송, 의성, 예천
1936. 6 「경동노회 분립」하다
1936. 6 경북노회 제34회 노회에서 가결,
1936. 9. 11 제25회 총회에서 허락 받음
지역: 영천, 경주, 영일, 포항
1949. 4.22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제35회 총회에서 「조선예수교 장로회」라는 명칭을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변경하다
1951. 5.24「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분립」하다
1954. 6.10「대한기독교 장로회 분립」하다
1958.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분립」하다
1952. 6.14「경서노회 분립」하다
1952. 4.29 제37회 총회에서 허락 받음
지역: 김천, 구미, 상주, 점촌
1977. 3.10 경북노회 제100회 기념예배 및 행사 개최하다
제100회사 및 기념앨범 출판하다
1983. 3. 8 「대구 동노회 및 대구 남노회 분립」하다
1982. 9. 7 경북노회 제111회에서 가결
1982. 9.23 제67회 총회에서 허락받음
지역: 경 북 노 회- 대구 중구, 서구, 칠곡, 군위
대구 동노회-대구 동구, 북구, 경산, 청도
대구 남노회- 대구 남구, 수성구, 달성, 고령, 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