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습래회사(蒙固襲來繪詞)
몽고습래회사는,
700여년 전 여, 몽 연합군의 일본침략을 생생히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그려진 그림인데 그림의 주인공은,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던 '다케자키 스에나가' 입니다.
그는 여, 몽 연합군이 침공한 지방의 영주 였습니다.
우리 고려군이 주력이었던 이 연합군의 침략은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는데, 1차침
략은 여, 몽 연합군이 쓰시마, 이키 섬을 거쳐서 큐슈의 하카다만에 상륙합니다.
무려 900척의 전함과 4만의 군사(고려군 3만,몽고군 1만)가 하카다 만에 상륙하여
10월 20일에 일본무사군 5만을 완전히 괴멸시키고 큐슈 전역을 점령합니다.
당시 일본군은 큐슈지방에 모인 일군은 약 5만의 사무라이군이었는데, "고려군이라는
소식만으로도 모두 전의를 잃어 전투가 벌어지지 모두 도망가다 죽었다" 고 합니다.
치열한 전쟁터인 이키섬엔 연합군과 일본 군의 시체가 있는 '천인총'이 있으며, 그 지역
토산품가게에선 '무쿠리 고쿠리'라는 목제품을 파는데, 그 뜻은, 두번에 걸친 침략으로
인근 남자들이 모두 살해된 것에 비롯된 처참함과 잔혹함을 나타내는 말로 전해집니다.
당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복장은 투구는 같으나 복장은 서로 달랐는데, '몽고습래회사'에
그려진 모습을 보면, 고려군은 갑옷에 철비늘을 일정하게 밖은 선이 있는 상하가 분리된
복장이나 몽골군은 목가리개가 있는 가죽형태의 두루마리복으로 모습으로 같은 형태이
나 고려군의 복장이 좀더 개량된 모습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당시, 일본 침공의 주력은 고려군인 걸 알 수 있죠. 특이한점은 원정권총사령관이 1,2차
모두 고려장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이조사관으로써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입
니다.
당시, 왜군이 전투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던 또다른 전술과 장비 무기등의 차이가 있언는
데, 먼저 그 당시 주무기였던 활을 비교해 보면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군의 활은, 220cm나 되는 긴 장궁이었고, 연합군의 활은 1m 안팎의 작은 단궁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무기와 전법 또한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후쿠오카의 하코자키 궁의 신사에서 보관 중인 연합군의 활(고려활)은, 길이 120cm 가량으
로 전통적인 고려 활입니다. 재질은, 뽕나무와 대나무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쇠로 연결되었
으며, 양 끝은 고래 뼈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씨조선 전기의 활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일곱 가지 복합적인 재료로 만든 고려 활은 탄력을 중시하며 만든 활입니다.
반면 일본의 활은, 재료가 대나무와 가래나무로만 만들어서 탄력이 고려 활 보다 떨어집니다.
'역사스페셜' 에서의 실험 결과, 고려 활은 평균 사정거리가 185m로 측정?怜?, 일본의 활
은 겨우 80m 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통력은, 30m거리에서 2cm나무 판을 뚫는 실험에
서 고려 활은 성공했지만, 일본의 활은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는 전력에 카다란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활 말고도 연합군은 '철포' 라는 무기를 사용했는 데, 표면에 돌기를 내서 터질 때 살상력을 더
효과적이게 했습니다. 이 철포는 지금의 수류탄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런 무기를
처음 본 왜군은 궁금해서 몰려들다가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이 철포는 파괴력도 좋고 큰 소음과 연기를 내뿜어서 왜군의 전투력을 상실시켜 버렸습니다.
바다를 건너 싸운이 1,2차 침공에서 우리 고려군의 조선술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기록인 '원사'에도, 태풍 때문에 원나라 배는 거의 파괴됐지만, 고려군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합니다.
가미가제를 견뎌낸 고려 전함의 닻과 닻돌이 나카사키 현에 보관되 있는 데, 닻과 닻돌2개를
합쳐 무게가 1t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런 대선은 300척이 있었는 데, 이 배들은 'MADE IN 고
려' 라고 합니다.
길이는 25M에서 30M 내외였다고 합니다.
전사 60명, 인부 3, 40명 정도가 타서 모두 80~90명 정도가 탔다고 한다.
이런 대선 300척을 포함, 900척의 배를 무려 4개월만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려가 만만 찮은 해상왕국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고려군의 활약을 보자면, 우선, 당시 일본 원정의 총사령관은 김방경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고려군 2만명을 데리고 '소하라'라는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일본에는 당시 양측의 전투방식을 소상히기록한 '하치만구도키'라는 기록을 보면, 연합군이
북과 징을 치고 폭죽 철포를 터뜨리며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자, 왜군의 말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합니다.
중세 왜군은 먼저 대장이 자신의 내력과 경험을 소개한 뒤, 징 대신 소리나는 활(카부야라)을
쏘아 선전포고를 했다는데, 당연히 연합군의 대규모 전투엔 왜군은 대적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몽고습래회사'를 보면 항상 고려군이 선두에 서서 공격을 합니다.
청연사에도 이와관련한 기록이 있는데 중요한점은 고려장군이 총사령관이라는 점 입니다.
당시 고려 몽고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박지량이었는데 몽골군 사령관인 홀돈이 말하기를
"총사령관 박지량휘하 김흔, 조변 등이 과감히 앞서나가 왜군을 대적하니 고려군이라면서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니 이를 뒤쫓아 대파하여 시신이 산같이 쌓였다. 우리 몽골군도 싸움에 익
숙하지만 감히 고려군에는 비하수가없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청연사)
'몽고습래회사' 에도, 고려군은 용맹히 싸우지만, 몽골군은 화살에 맞고 도망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걸보더라도 고려군의 전투력이 몽고군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쉬운점은 몽골의 요청에 따른 일본 정벌이었지만, '몽고습래회사'에 기록된 것 처럼, 우리 고려군의 조선술, 전투력을 국제 사회에 확실히 입증시킨 전쟁이었슴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은 비록 정복하지 못했지만
몽골은 고려의 해상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몽고는 고려의 해상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고, 고려의 해상지배력이 유지됨으로써 이로인해 고려는 해상무역을 통한 경제적인 부를 축척
할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려는 해상무역국가로써 고려말에 중국 명나라 정벌군 10만을 출병시킬수
있었던 부국이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려몽연합군의 일본원정기를 마치고저 합니다.
참고: 일본서기, 몽고습래회사도, 청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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