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동작구 본동 한강대교 남쪽 언덕에 자리한 행궁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원 현륭원으로
갈때 잠시 머물던 행궁(行宮) 용양봉저정이다. 창덕궁에서 아침에 나와 현륭원으로 가자면 점심 때 이곳에 이른다. 점심을 들며
쉬어가는 행궁 주정소(晝停所)다. 1789년(정조 13)에 짓기 시작해서 1791년에 완공한 용양봉저정이다.
용양봉저정이 들어서기 전에는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망해정은 ‘바다를 바라본다’는 이름대로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한강과
강 너머의 도성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한양의 북악과 한강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마치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날아다니는 모습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 정자의 이름을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고 지어 걸었다. 용양봉저정이라고 지은 연유는 그의 문집에 잘 나타났다.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 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찌는 듯한 광영(光榮)이 서기로 엉기어 용루(龍樓)와 봉궐(鳳闕) 사이를 두루 감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억만년이
가도록 우리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이니 그렇다면 그 상서로움이 어찌 얼음이나 오색화 따위 정도이겠는가.
이에 대신(大臣)에게 '용양봉저정'이라고 크게 써서 문지방 위에 걸게 하였다." -<홍재전서> 제14권 '용양봉저정기'에서-
이 기문은 마지막 대목에서 대신으로 하여금 대자(大字)로 현판을 쓰게 하여 처마에 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대신(大臣)은 채제공(蔡濟恭)이다. 채제공이 쓴 현판은 없어졌다. 지금 현판은 다른 사람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정조는 이 정자에 올라 한강과 서울의 풍경을 <용양봉저정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그 정자에 올라갔더니 때마침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 무렵이어서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르고
새하얀 비단이 맑게 깔려 있어 마치 떨어지는 것 같고 공수하고 있는 것도 같고 상투 같고 쪽진 것도 같은
강 주위의 여러 봉우리들이 발과 안석 사이로 출몰하면서 해기(海氣)가 비치고 있고 천리나 푸른 출렁이는
바다는 곧 손에 닿을 듯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다 거두어들일 것 같았다. 내 그것을 보고서야 그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정자의 조망이 좋다는 것도 알았다."

용양봉저정을 처음 지을 때는 정문이 있고 주교사로 쓰이는 누정 등 두 세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한제국 무렵에는 정문과 주교사 누정 등은 없어진다. 남아있는 건물은 30m²에 지나지 않았다.1900년 한강철교가 놓인다.
곧이어 한강인도교가 설치되면서 이곳의 배다리는 더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1958년 뼈대만 남은 용양봉저정
1907년(융희 1)에 순종이 일본에서 귀국한 유길준(兪吉濬)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면서
군주가 이곳에 머무는 일은 없어졌다. 유길준은 옛 이름 용양봉저정을 사용하지 못하고 조호정(詔湖亭)이라고 고친다.
유길준은 용양봉저정을 하사받고 이렇게 그 감회를 밝힌다.
"강호에서 흰 머리카락이 내 마음 마냥 기다란데
만년의 은거할 게획은 아직 세울 겨를 없었다네
화산의 세 봉우리는 진단이 은거하던 곳
섬계 한 구비는 하지장이 하사받은 땅
도성의 남쪽에서 재산 일굴 마음이 없는데
무슨 공이 있어 대궐 곁에서 광영을 가까이 하랴!
묽은 죽도 원래 임금님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
이 몸이 대대손손 성은을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김윤식은 조호정기(詔湖亭記)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이부(吏部)의 구당(榘堂) 유공(兪公)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황제께서 그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노호(鷺湖 노량진) 가에 집을 하사하셨으니 옛날 행행(行幸)하실 때 쓰던 별관인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이것이다. 구당은 임금의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여 그 정당을
봉인하고 감히 거처하지 않았다. 그 집의 현판에 ‘조호정(詔湖亭)’이라 하였으니 하지장(賀知章)의 감호(鑑湖)
고사를 취한 것이리라........“
유길준은 감히 왕이 머물던 정당(正堂)에 기거하지 않고 조호정(詔湖亭)이라는 현판을 단 별채에서 살았다.
유길준은 여기에 살면서 <대한문전>을 쓰고 사범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만들었다.
그는 1915년 노량진에서 마지막까지 살다가 59세에 용봉정에서 죽었다. 일본이 일찍이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했다.
죽을 때 나라에 공이 없으니 묘비를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37년 《대경성사진첩(大京城寫眞帖)》에서 용양봉저정은 일본인의 위락시설 용봉정(龍鳳亭)에 포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양봉 저정 왼쪽으로 새로 조성된 각종 유원지 시설이 보인다.요정 용봉정은 1932년 개업하였다. 주인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朗)가 용양봉저정을 중심으로 더 확장해 약 5,300여평의 지역에 유원지 시설(온천, 무도장, 식당, 운동장, 꽃밭 등)을 추가하여
거대한 환락장소를 만들었다.요리 료칸과 대중목욕탕을 시간제 대여 방식으로 운영하여 고객들의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