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함은 도적들이 숨어 있다는 구월산으로 단신 잠입했다.
그러나 산채에 다 들어가기도 전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도적들에게 붙잡혔다.
도적들은 사냥에서 노획한 산짐승 다루듯 지함을 산채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지함을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도적 한떼가 산채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지함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인두(人頭) 세 개가 툭 떨어졌다.
"하하하하."
벽력 같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말등에 올라탄 채 손에 묻은 피를
바지춤에 썩썩 문지르며 껄껄 웃고 있었다. 그는 몸집도 거한인데다 눈알이 부리부리하여
과연 도적의 수장다운 면모가 있었다.
"네놈들은 무얼 털어왔느냐?"
"예, 안악의 양반집을 털어 쌀 닷섬하고 금 한 관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두목이 좋아하는 물건도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
그러자 졸개들이 나무를 엮어 짠 창고로 들어가더니
한 여인을 끌고나왔다. 황진이였다.
황진이와 지함의 눈이 마주쳤다.
황진이는 지함이 그곳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곧이어 황진이는 얼른 시선을 거두어갔다.
아는 체를 하면 지함에게 해라도 끼치게 될까봐서였다.
"핫핫핫. 물건 하나 제대로 골라왔구나. 어디 보자."
두목이 말에서 내리더니 황진이의 저고리 고름을 꽉 움켜쥐고 단숨에 잡아뜯었다.
그러자 하얀 젖무덤이 봉긋 튀어나왔다.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랏!"
지함이 소리를 질렀다.
"뭐얏! 이 녀석이 어느 안전에서 발악이야. 죽고 싶어?"
졸개 하나가 지함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욱!"
"더러운 양반 새끼! 백성들에게 들러붙어 피땀이나 빨아 쳐먹고 사는 거머리!"
졸개 몇이 더 달려들어 지함을 마구 짓이겼다.
"왜 이리 소란한가?"
그때 산채 쪽에서 노인 하나가 걸어나오면서 물었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사람이었다.그러자 두목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이자들은 왜 여기까지 끌고왔는가?"
"저년을 잡아왔다는데 이놈이 제발로 기어왔습니다."
"당장 죽이지 않고?"
"조금 더 있다가 두 연놈을 한꺼번에 죽여 없애겠습니다."
두목이 졸개를 불렀다.
"얘들아, 이놈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년은 찬물에 헹궈서 방에 던져넣어라."
"예."
졸개들이 두 패로 나뉘어 지함과 황진이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곧 지함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리고,황진이는 계곡 쪽으로 끌려갔다.
졸개들이 황진이를 끌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사라지자 사부란 자가 두목에게 말했다.
"화담 소식은 알아봤는가?"
"예. 벌써 작년 봄에 죽었답니다."
"죽었다고?"
"예. 틀림없습니다. 송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데요."
"할 수 없군."
화담이라는 소리에 지함의 귀가 번쩍 열렸다.
"화담 선생을 말하는 자, 나 좀 보시오."
돌아서서 산채쪽으로 걸어가던 사부란 자가 우뚝 멈추어 섰다.
"화담 서경덕이라면 내 스승인데, 그대는 누구시오?"
"화담의 제자라고?"
"그렇소. 작년에 화담 선생님을 모시고 팔도를 주유했소."
"뭐라고?"
"지난해에 화담 선생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함께 다니다가
선생님은 경주에서 송도로 돌아가시고, 난 계속 주유를 했소."
"핫핫핫. 저놈이 모가지가 아까워 말을 꾸며대는구나.
이보게, 임꺽정. 화담은 틀림없이 작년 봄에 죽었겠다?"
"옛. 화담 선생은 작년 사월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팔도를 주유했다고?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렷다!
지체말고 저놈의 목을 치게."
"바쁠 것 없습니다."
그때 계곡으로 끌려갔던 황진이가 졸개들의 어깨에 들려 올라왔다.
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년을 방에다 집어던져 이불로 덮어놓거라."
졸개들이 황진이를 들고 산채로 들어가자 사부란 자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년도 목을 잘라야 하네."
"아무렴요."
임꺽정이라는 두목은 허리춤을 풀면서 산채로 뛰어들어갔다.
한낮이 되어서야 두목이 방에서 나왔다.
사부란 자는 그때까지 마당에서 조바심을 내며 서성거리고 있다가 두목을 채근했다.
"자, 빨리 연놈들을 처형하고 풍천, 율은 쪽으로 가세."
"사부님. 급하실 것 없습니다. 이놈은 며칠 더 여기다 잡아놓았다가 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년은 본시 기생이라니 살려보내야겠습니다."
"살려둔다고?"
"예. 기생까지는 죽이지 않겠습니다. 양반놈들 모가지만 자르기로 맹세했잖습니까?"
"끄응."
사부란 자가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곧 황진이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황진이를 본 두목이 졸개를 시켜 지함의 결박을 풀라고 했다.
"이 선비님. 저를 구하시겠다고 여기까지 오셨더랬나요?"
"그렇소."
"제가 선비님을 두목에게 잘 말해 놓았으니 일단 염려 놓으십시오.
저는 양반이 아니라고 풀어준답니다."
"알았소. 내가 여드레까지는 송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거든 박지화 형님께 전갈을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두목은 졸개 하나를 붙여주며 황진이를 산아래 마을까지 내려다 주고 오라고 명령했다.
황진이가 산채를 내려가자 두목이 지함을 불렀다.
산채로 들어가 마주 앉은 두목은 지함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했다.
"몰라 뵈서 미안하오. 그러나 화담 선생은 분명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마소.
그 여자 방중 솜씨에 반해 내가 그대를 살려주기는 했소만 우리 사부에게 밉보이면 큰일나오. 알겠소?"
"사부란 사람이 누구요?"
"정해량(鄭海良)이라는 도사요.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무오사화 때 유배갔다가 도망쳐 그뒤로
쭉 도가 수련을 하신 분이오. 화담 선생하고는 잘 아는 사이라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도적의 소굴에 있느냐 이거지요?
핫핫핫.그건 내 사부에게 물어보시오. 나같이 무식한 산도적이 무얼 알겠소?"
두목이 껄껄 웃더니 밖으로 나갔다. 곧 사부란 자가 들어왔다.
"자네, 바른 대로 대게. 누군가?"
"난 화담 산방의 학인이오. 알아보고 나서 사실이 아니면 죽여도 좋소."
"흐음."
"그런데 노사께서는 왜 그렇게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오?"
"..."
"무오사화 때 당한 것을 양반들한테 분풀이하시는 겁니까?
힘이 없으니까 무지몽매한 도적떼를 꼬드겨서 양민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것이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자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나?"
정해량은 위압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만두시오. 노사께서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소.
도적떼를 길러서 장차 역성 혁명을 꾀하려는 것일 터!"
"뭣이?"
정해량이 칼끝을 지함의 목에 대었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역성 혁명인들 마다하겠는가?
이 나라가 지금 백성이 살 수 있는 나라던가?
조선 천지가 굶어 죽는 백성 투성인데 양반이란 자들은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고,
배가 튀어나와서 잘 걷지도 못하는 형편 아닌가."
"그러면 양반만 죽이면 나라가 잘 된다는 말이오? 노사의 꿈은 무엇이오?
역성 혁명이 아니라면 한낱 산도적일 터!"
"그만하게.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이제서 무엇을 도모하겠나?"
"분풀이라면 잘못 하고 있는 것이오. 하려거든 정말로 백성 편이 되어 하시오.
도적이 아니라 군대로 기르시오."
"무엇이? 자네가 내게 역성 혁명을 가르치려는가?"
"저 두목의 사주를 대주시오."
지함이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정해량은 두목인 임꺽정의 사주를 대었다.
"군사를 일으킬 만한 재목이오. 장차 기미년에 군사를 일으키면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일대를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오."
"그의 운수는 그렇게 시작해서 삼 년은 갈 터이니 그것을 잘 쓰시오."
"너무 짧소이다. 하기야 삼 년씩이나 끌 일이 아닐 터..."
"노사께서 사사로운 원한만 청산한다면 정말로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오이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저자는 사람만 죽이고 재물이나 빼앗는 도적의 무리로 남을 것이나,
노사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의적이 되거나 백성들이 기다리던 군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정해량은 칼을 거두어 칼집에 도로 넣고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차 기미년이 되어 노사의 뜻이 바로 선다면 내가 임꺽정을 도울 군사(軍師)를 한 명 보내든가
내가 오든가 하겠소."
"고맙소."
그렇게 해서 지함은 임꺽정의 소굴을 벗어나 무사히
송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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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의 책 <토정비결> 하 27.'세월에 지는 사람' 일부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