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
|
불탑신앙에 얽힌 사연 '대승(大乘)'이란 말은 범어인 마하야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Maha'는 '크다' 훌륭하다란 뜻이고 'Yana'는 '탈 것' 또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지상의 길에서는 수레가 탈 것이며, 물길에서는 배가 탈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은 큰 수레, 큰 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기차나 카페리호나 큰 선적이 될 것입니다. 대승은 열반의 언덕을 향해 건너가는 크고 빠른 배입니다. 그래서 나와 여러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이란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이 스스로를 높이는 말입니다. 이에 대응되는 말로서 '소승(小乘)'은 돛단배, 열등한 가르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은 혼자서만 똑딱선을 타고 열반의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소승(小乘)이란 말은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의 편견이 담긴 말이기 때문에 남방불교에서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국·한국·일본·티벳 등의 '북방불교'를 대승이라 부르고, 스리랑카와 미얀마·태국·캄보디아 등의 '남방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남방불교에서서는 '소승'이란 말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테라와다'불교라 부릅니다. 이 말은 장로불교, 상좌불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대승불교가 일어난 연대는 학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측됩니다. 불멸후 100년경 불교 교단은 계율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서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됩니다. 그 이후 약 400여 년 간 경전의 법(法)에 대한 해석과 지역성의 차이에 따라서 각각 10개의 부파가 나와서 20여 개 부파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부파불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부파불교에 대한 반동운동으로부터 일어나게 됩니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부파불교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한계는 부파불교가 출가대중 위주의 불교로서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학문불교, 나아가서는 자기완성에만 전력하는 불교로 일반대중들과 유리된 불교로 부처님의 본래의 의도인 중생구제의 역할을 상실한 실천적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가 부처님 정신에서 유리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생명을 건지려는 폭넓은 가르침을 펴셨는데, 부파불교는 개인의 완성에만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괴로움을 멸하는 현실적 가르침을 펴셨는데, 부파불교는 경전의 법상(法相)에만 치우친 주석 등 현학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빠져나오질 못하였습니다. 수행의 방편도 전문적인 수행인이 아니면 도저히 닦을 수 없는 단계를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무기(無記)로 답하셨던 형이상학적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의 어려운 문제 등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큰 교학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바로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는 오류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존적인 바탕은 바로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오류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공(我空)은 인정하되 아(我)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법유(法有)에 고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이 결코 궁극적인 오류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현실을 인정하는 유위법(有爲法) 내에서는 어떤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을 경우 그 존재는 유(有)적인 입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실상의 무위법(無爲法)에 이르게 되면 이것이 부정되지 않으면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망각하는 오류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처럼 부파불교가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부처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본래의 불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대승불교는 본래 부처님 정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불교로 돌아가자는 '부처님 참 불교 회복운동, 새로운 불교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대승불교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을까요? 새로운 불교운동은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혁신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 주류는 혁신적인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의 대중들이 행세하였던 것입니다. 이점이 매우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대승불교의 원류는 대략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혁신적인 의식을 가진 스님들이었으며, 둘째는 아란야에 거주하면서 자유롭게 수행하는 수행승들과 이들 가운데서 시문에 뛰어난 찬불승, 셋째는 탑을 중심으로 모인 재가대중들이며, 넷째는 지역과 원력에 따라서 새로운 갈망에 응해주는 여러 부처님들을 신봉하는 그룹, 그리고 다섯 번째는 부파불교에서 소외된 그룹 등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불교경전이 문자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 불교경전은 지율승, 지경승, 지법승만의 독점물이었던 경전이 이제는 학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대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째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탑을 중심으로 모였던 찬불대중승과 재가대중들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아난에게 장례문제는 재가대중들이 맡아서 치르고 출가대중들은 수행에 전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장례의식인 다비는 재가불자에 의해 주관되었습니다. 다비가 끝나자 여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서로 부처님의 유골을 가져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8등분으로 나누어 마가다와 코살라, 카필라국 등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여덟 나라의 사신들이 나누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사신들은 그 유골을 가지고 각자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하여 신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탑은 본래부터 승원과 별도로 분리되었습니다. 승원은 스님들에게 속해 있었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은 재가자들이 관리하였습니다. 여기에 공양을 받은 공양물도 승원과 탑이 별도로 관리되었습니다. 이처럼 재가 신자들은 처음부터 탑과 인연이 많았습니다. 부파불교는 번쇄한 주석과 출가를 중심으로 한 자기완성에 치우쳤기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소외되고 일반인들에게 종교적 갈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재가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 동경과 흠모의 정"이 생겨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유골을 모셔 둔 탑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탑을 찾아와서 부처님의 위대한 인격과 삶을 찬탄하거나 경배를 드렸습니다. 당시는 아직 불상이 없었기 때문에 재가대중들의 종교적 시선은 불탑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어렵고 딱딱한 불교에서 벗어나 탑에 소원도 빌면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대반열반경} 에는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리탑을 세우고 우산 모양과 깃발로 장식한 다음, 예물을 올리고 꽃과 향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써 숭배하였다.' 이는 불탑 앞에서 재가불자들이 부처님을 신앙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불탑을 순례하고 부처님의 사리 앞에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면서 꽃과 향을 공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공덕이 많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티벳장경 안에 있는 {관경}에 보면 불탑신앙의 공덕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코 가난한 사람이 되지 말라.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되어 단정하고 완전한 신체를 가지면 병에 걸리지 않고 팔난(八難)을 면할 것이며, 죽어도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계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 것이며 성불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현세적 이익이 강조된 모습과 비교적 자유로운 신앙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이처럼 탑은 재가불자들의 신앙의 중심센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 왕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생들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반성으로 부처님을 신봉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과거를 참회하면서 부처님을 의존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과적으로 탑신앙을 인도 전역으로 확산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는 8대탑을 허물어서 수많은 탑을 건립하고 거기에 땅을 기증하여 경제적 기반을 세우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이 불탑을 찾는 일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탑을 찾는 순례객들이 많아지자 탑 주위에 방사와 가람이 형성되어 탑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문가들은 탑과 탑물을 관리하였으며, 순례객들에게 부처님의 위대한 삶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부처님의 위대한 삶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부처님의 생애 중 인상적인 장면과 전생의 일화 등을 탑에 조각하여 설명하는 시청각 교육을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탑에 새긴 부조물에 부처님의 형상을 직접 표현할 수 없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인격을 지닌 부처님을 단순한 그림으로 표한할 수 없다는 당시의 풍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부처님의 발자국, 일산 등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탑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비승비속의 전문가들로서 오늘날 볼 수 있는 포교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법사의 원어는 달마-바나까(Dharma-Bhanaka)인데, '바나까'는 독송자란 뜻입니다. 바로 이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대승불교가 탑 중심의 신앙에서 시작되었으며, 부처님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부파불교는 법(法) 중심의 불교였지만, 탑을 중심으로 이어난 대승불교는 부처님 중심의 불교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다비를 재가자에게 맡긴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승운동의 기수가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목탑도 있고 석탑도 있습니다. 이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성스러운 곳이며 재가불자들의 신앙 중심지입니다. 재가불자들이 이러한 연원(淵源)을 알고 절을 찾아 탑에 예배를 드린다면, 새로운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보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지순례의 진정한 의미는 탑을 신봉하는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입니다. 즉, 성지순례의 진정한 의미는 부처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받들어 예배하고 경배하며 공양올리면서 우리도 부처님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신행되어져왔다는 것입니다.
|
절에서 밥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그 맛의 담백함과 깔끔함을 잊지 못한다. 맛에 둔한 사람도 인공조리료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그 은은함을 잊을 수 없게 된다.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하는 행자 시절에는 땔감을 구해오는 불목하니, 상을 보는 간상, 반찬을 만드는 채공, 국을 끓이는 갱두, 밥을 짓는 공양주의 역할을 두루 거치게 된다. 이런 행자시절의 마지막 단계가 공양주인데 각각의 소임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한다.
예컨대, 나물무침을 할 때는 전심전력으로 반찬 만드는 일에 전력해야 하고 무국을 끓일 때는 전심전력으로 국을 끓여야 한다. 국을 끓일 때는 국 끓이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있을 수 없다. 국맛이 곧 수행의 깊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찰음식의 유래
불교 초기에는 모든 출가승려들은 와발, 혹은 철발을 들고 산 속의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나와 성안으로 가서 걸식을 하였다. 부자나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고 그릇에 가득 차지 않더라도 적당한 양이면 돌아와서 오전 중에 식사를 마쳐야 한다.
1일 1식의 원칙을 반드시 지키며 정오에서 다음날 일출까지는 비시(非時)라 해서 음식물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 부처님도 설산에서 6년간 고행하시면서 일마일맥(一麻一麥 : 깨 한알과 쌀보리 한알)을 의지하셨듯 출세간 모두 명은 식을 말미암아 존재한다.
처음의 출가자들에겐 거처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우기 3개월동안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이 허락되었는데 이것이 안거제도이다. 이때 승려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모여 정진하기를 열망했다.
이런 안거(安居)제도가 차츰 발달하면서 왕족과 부호들이 집을 지어 기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가 생겨났고 주의에 회랑 또는 담장을 둘러서 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주거공간의 변화로 승려들의 식생활도 변화되었다. 탁발을 하던 승려들은 이제 신도들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부처님시대의 승려들은 수행을 하기 위한 많은 고행을 겪어야 했는데 당시의 음식을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식은 건반(말린 밥), 맥두반(콩과 보리를 섞어 지은 밥), 초(미숫가루), 육(고기), 병(떡) 등 다섯가지였고 부식으로는 식물의 가지, 잎사귀, 꽃, 과일 및 우유나 가타 명제품, 꿀이나 석밀등이었다. 특별히 음식에 대한 금기는 없었는데 고기는 아무 고기나 먹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병든 비구에 한해서는 삼정육, 오정육, 구정육 등을 허락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종정육(三宗淨肉)
자산을 위해서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않은 짐승의 고기(不見)
남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않은 것 (不耳)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란 의심이 가지 않는 것(不疑)
오종정육(五種淨肉 - 위 삼종정육 포함)
수명이 다하여 자연히 죽은 오수(鳥獸)의 고기
맹수나 오수가 먹다 남은 고기
구종정육(九種淨肉)
자신을 위해서 죽이지 않은 고기
자연히 죽은지 여러 날이 되어 말라붙은 고기
미리 약속함이 없이 우연히 먹게 된 고기
당시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인 고기
이러한 유래를 거쳐 사찰의 식습관이 세속과 달리 독특한 소식습관을 형성한 시기는 기원 1세기 전후이다. 불교 전래시 초창기 중국에서는 술과 고기를 먹었지만 양무시대 이후 점차 소식으로 바뀌어 갔다. 중국 사원에서는 주식이 대부분 죽이었으며, 부식은 승려들이 직접 재배 생산한 채소나 두부, 버섯 들이었다. 또한 대승불교가 흥기한 시기에는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의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든 중생이 삼매를 닦을 때에는 마땅히 세간의 다섯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 하니 이 다섯가지 채소는 익혀서 먹으면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능엄경에서 설파하고 있다.
사찰음식의 특징
사찰음식의 특징을 들자면 독특한 조리법이 사찰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산야초를 음식으로 먹고 그리고 육식과 오신채 및 인공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식 만드는 과정을 오로지 또 다른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무엇을 먹을까는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언제,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요즘은 일일일식을 규정하지 않지만 일일일식은 식사의 양에 유의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남방불교에서는 탁발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기후와 풍토가 다른 북방불교권(한국, 중국, 일본, 티벳 등)에서는 사원발달과 함께 승려들의 건강을 우려하여 다양한 음식들이 개발되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계율상 차이는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채소 중에서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다. 파, 마늘, 부추, 달래 등은 몸에서 냄새가 나고,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하게 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수행인에게는 절대 금한다.
셋째
사찰음식은 약리작용을 갖고 있다. 승려들은 양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산약초를 먹기 때문이다. 산초장아찌는 구충제 역할을 하고 보온효과가 있는 것을 예로 알 수 있다.
넷째
무엇보다도 시원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고 다시마, 버섯, 들깨, 날 콩가루의 천연 조미료를 쓰고 있다.
다섯째
제철에 따른 음식이 발달해 있다. 예를 들자면 지리산 화엄사에는 죽순나물과 갓김치, 김부각 등이 있고 여천 흥국사에는 쑥떡, 머위당이, 합천 해인사에는 찹쌀죽과 고수나물무침 등이 발달되어 있다. 수원 용주사에는 국화전과 두부소박이가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