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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총회의 인정을 받은 사도 바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와 복음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의 사역을 안옥에만 국한시켜 진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제 1차 전도 여행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복음의 진척과 진행 상황을 알기 위해서라도 재방문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사차원의 방문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고 더욱더 확고한 신앙을 뿌리 내리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을 떠나게 된것입니다(사도행전15:36)
그러나 하나님의 사도 바울에 대한 계획과 의도는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바울을 인도하였습니다(사도행전16:9) 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등지에 이르는 제 2차 선교여행을 3년간에 걸쳐 수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정책이 개인적인 사욕이나 명예, 이권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습니다(사도행전15:36)
마가 요한은 제 1차 전도여행 당시 중도에서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였습니다(사도행전13:13) 바울은 그 사건으로 인해 마가 요한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친했고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훌륭한 복음 사역자로 다시 천거하였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두말할 나위없는 드림팀은 분리되어 서로 다른 방향의 복음사역자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향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였습니다
바울의 초개같은 신앙과 단 한번의 실수에 대하여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단호함에 대하여 무엇이 정의다 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고 온화함으로 다가가서 더욱 훌륭한 지도자로 세워나가는 바나바가 더욱 훌륭한 지도자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오늘날의 리더십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이면에는 이러한 분리정책을 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복음 사역자가 증가하였고 복음전도 구역도 더욱더 확산되어 빠른 속도로 진척될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바라 볼수는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누가는 1차전도 여행지였던 더베와 루스드라에서의 사역을 간략하게 언급하고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의 새로운 리더였던 청년 사역자 디모데를 중요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디모데는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도움으로 유소년시절부터 성경에 익숙하였으며(디모데후서1:5,3:15),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그의활동은 매우 모범적인 신앙인의 태도였습니다(로마서16:10, 고린도전서4:17, 디모데전서1:2)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여러지역을 방문한 후 사도 바울은 로마를 따라 예베소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의 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방향인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비두니아지역으로 북상하려고 했으나 이마져도 제지를 당하였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에게 보였던 것이 마게도냐 환상이었습니다(사도행전16:6~10)
우리는 이와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게 됩니다 특히 사도행전 16장에는 성령(6), 예수의 영(7), 하나님(10) 등의표현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교으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게도냐 환상이 역사상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만약 마게도냐 환상이 없었다면 유럽 문화와 문명의 역사는 예측할수 없을 만큼 달라졌을 것입니다
마게도냐 지경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였으나 빌립보를 첫 성으로 선택한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로마 제국내에서 유력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주전 42년경, 빌립보 전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구스도는 브루터스의 시저를 이기고 로마황제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구스도는 빌립보에 용맹한 군인들을 이주시키고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로 승격시켜 황제의 직속하에 두었던 것입니다 빌립보는 해안과 육로를 연결하는 교두보라는 점에서 전략상 주요지점이었고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세계적 명성을 지녔던 의학교육기관이 소재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제 2, 3차 전도여행중에서 빌립보에서의 사역에 가장 많은 것을 할애하였습니다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비교적 짧은기간 동안에 이루어 졌지만 지리적,정치적인 요인들을 고려할 때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설립자인 사도 바울에게 일관된 존경심과 충심을 보였으며(빌립보서13~5),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회에서만 재정적 원조를 허락할 만큼 그 성도들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빌립보서 만큼 바울의 기쁨을 전달하고있는 서신서도 없다는 점에서 빌립보에 대한 바울의 애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두아디라가 고향인 루디아를 전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바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바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마게도냐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의 육로와 해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키케로(주전106~43)는 "우리 영토의 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삼았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문과 어려움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160km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이러한 요충지라는 측면이 강하였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2:2)
사도 바울의 전도정책의 우선순위와 핵심은 유대인과 헬라인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13:46, 로마서1:16) 사도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이 세가지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믿는 신앙과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귀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마태복음11:5)라고 선포와 증거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그가 아는 사람도 없으며 그 어떤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목숨을 걸어가면서 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의 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몸에 질병을 가지고 다니는 육신의 삶이 고달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과 또 다른 민족을 향하여 그들이 원하지 않는 복음을 담대히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는 고찰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전하는복음과 메세지를 통하여 교회가 일어나고 믿음의 지체들이 일어나며 복음이 확장되어 간다는 놀랍고 경이로운 사실앞에 우리는 감동과 역사와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을 바라봅니다
베뢰아는 마게도냐 평원 남방향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한 도시로서 인구가 많은데 비해 역사저그 정치적인 배경이 부족한 평이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온건하고 순한 사람들로 구성된 베뢰아 지역의 선교활동은 비교적 순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였을 때에 아덴은 이미 옛 영광이 사라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아덴인들은 여전히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에피큐로스(주전342~270) 학파는 당시 철학 사조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17:18) 이러한 종교와 철학적 관념에 습성화 되어있는 바델지역에서의 복음은 참된 신관을 정립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아덴인들의 복음에 대한 냉담한 반응은 그들이 갖고 있는 철학적 지식주의가 갖고 있는 냉철한 비판성과 교만성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에피큐로스학파의 발생지였던 아덴 사람들은 신에 대한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신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이 구별되어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독특한 신앙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계 복음화의 확장에 있어서 아덴의 성과를 실패로 보아서는 않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선교정책은 하나님을 전하는 선포와 증거에 있습니다 이러한 선포와 증거에도 불구하고 불신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몫이라 할 것입니다
고린도는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온갖 부패와 비행들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된 모습을 가리켜 "고린도인들이 짓거리"라는 헬라어 표현이 있으며, 현대영어에서도 패륜아를 가리켜 "고린도인"(Corinthian)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 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역을 통해 복음 전도 사역이 미궁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양치기들이 사용할 천막짓는 일에 일시적으로나마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이러한 사역들에 대하여 천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감사한일로 여겼습니다 또한 과도한 욕심으로 재물을 쌓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 유용할 정도로만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설립한 교회로 부터 생계를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힘겨운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사역을 통하여 존경심과 변함없는 사랑을 전하였습니다(사도행전18:3)
갈리오는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주전4년~주후65년)의 형으로서 독창적이고 청렴 결백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총독에 부임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친절함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은 바울을 모함하고(사도행전18:12~13) 처벌을 동조하였으나 갈리오는 불편부당한 로마 총독으로서 사법권 외의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 개입을 꺼려했기 때문에 고초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18:15)
마게도냐 환상을 보며 감동과 환희로 내 디뎠던 제 2차 전도여행도 막받이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등에서 심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오래동안 건강이 좋지않았을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린도에 입성하고 그곳에서 만난 아굴라부부(사도행전18:2)는 잊을 수 없는 큰 위로와 힘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신실한 동역자였으며(로마서16:3~4), 이로서 바울의 기나긴 제 2차전도여행도 막이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부터 수리아와 안디옥에 이르는 긴 여행을 누가는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제 2차 전도여행의 성과를 보고함으로서 전 교회간의 유대와 공동체적 관계를 보다 곤고히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방사본(Westrn Text)과 비잔틴사본(Byzantine Text)에는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어조의 문구가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18:21) 주후52~53년경, 안디옥으로돌아온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며 휴식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일정(사도행전15:39~18:22)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의 특징은 복음의 유럽진출입니다 유럽은 향후 모든 세계의 중심지로서 복음의 세계화전략에 가장 중요한 경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전략이 갖는 경향은 복음의 세계화와 그 시기에 대한 임박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예수님의 재림이 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은 시급하고 빠른속도로 전파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의 갈등(사도행전15:37~39)-> 더베, 루스드라(사도행전15:40~16:1)->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의 합류(사도행전16:3)-> 드로아(사도행전16:6~8)->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봄(사도행전16:8~10)-> 빌립보(사도행전16:11~12)-> 빌립보에서 루디아와 간수의 회심(사도행전16:14, 33)-> 데살로니가(사도행전17;1)-> 데살로니가에서의 강론(사도행전17:2)-> 베뢰아(사도행전17:10)-> 아덴에서의 아레아바고 설교(사도행전17:22)-> 아덴, 고린도(사도행전18;1)-> 1년 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사도행전18:1~11)-> 에베소(사도행전18:19)-> 예루살렘(사도행전18:22)-> 안디옥(사도행전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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