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라
질항아리에 곱게 그린 구름무늬가
금시라도 하늘로 피어날 듯 아른하다.
눈감고 나래 펴는 향그로운 마음에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흰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최어 자애롭다.
꽃밭에 놓고 이슬 받아 책상에 올러면
그밤 내 베갯머리에 옛날을 보리니
옛날을 봐도 내사 울지 않으련다.
시인 조지훈이 아주 젊을 적에 쓴 「향문(香紋)」이란 시의 전문이다. 우리의 옛 것에 대한 시인의 초기 지향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지만 옛 것 일반에 대한 우리 태도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옛 것에는 옛 것에 고유한 독특한 맛이 있다. 비록 그것이 산책증에 주워온 깨어진 질그릇이라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를 풍기게 마련이다. 또 옛 것을 만들고 썼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횐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추이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닦고 고이 닦아 열 오른 두 볼에 대어' 보는 사람에게나 특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옛 것에는 할아버지의 흰 수염과 같은 쇠잔한 채로 거역할 길 없는 권위의 후광이 있다.
이러한 옛 것은 대체로 현재에 대한 강력한 대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무렇지도 않은 질그릇이 세련된 솜씨와 퐁요한 재료로 빚은 현재의 도기와 나란히 서는 것이다. 치졸한 단순함이나 서투른 질박함이 그 오래됨에 힘입어 도리어 '옛 향기'로 승화한다. 그리하여 그 고졸(古拙)과 투박함은 세련된 솜씨의 인공성을 뛰어넘는 자연스러움의 일부로 수용된다. 옛 것이란 오래된 것이면 오래된 것일수록 사람을 넘어선 자연의 일부요 연장이라는 감개를 안겨준다. 인공과 기술과 상술(商術)의 발전이 빚어낸 편의적 효율성이나 비속성과 그만큼 멀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옛 것은 잠자코 입 봉한 채로 현재의 비판이 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옛날 할아버지의 흰 수염'에 더하여 카랑카랑한 책망의 목소리마저 듣게 되는 것이다. 옛 것의 역사성과 과거성은 그 자체가 가치의 일부를 이룬다.
문학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옛 것은 옛 것 그 자체로 미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옛 작품에는 우리에게 생소하고 따라서 불가해한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불가해한 요소가 독특한 방식으로 심미적 요소로 변용한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고려가요에서 그 구체적 사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갖는 거리도 작품의 역사성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옛 시조는 우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발생조건의 소산이다. 그러나 이 현대와의 거리 속에서 그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과거성은 작품의 타당성과 유관성을 뒷받침해 주는 양상을 띠게 된다. 현존 시인은 도저히 쓸 수 없는 작품이란 생각이 독특한 옛 향기를 풍기고 옛날 할아버지의 흰 수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 작품은 '닦고 고이 닦는' 손에 의해서 심미적 가치를 덤으로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에서 시적인 것의 핵심을 찾는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옛 것은 오늘의 것 속에서 스스로 '낯설게 하기'의 효용을 갖는다. 고전이 현재에게 호소하는 힘은 많은 경우 이 낯설게 하기의 효용에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기도 하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인간 위엄의 승고하고 비장한 역정이면서 동시에 서구 근대의 '낭만적 사랑'을 낯설게 만들어주고 있다. 거기서 의표를 찌르는 힘이 생겨나기도 한다. 현대 작가는 의식적으로 옛 작품에 대한 패로디를 시도한다. 그러나 옛 작품이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잠자코 있는 채로 패로디를 시도한 작품을 역습하여 도리어 그것을 패로디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옛 것의 탕진될 길 없는 힘이 담겨 있다.
2. 고전의 실상 혹은 『논어』
그러나 우리가 고전이라고 숭상하는 책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과거성의 향기가 아니다. 그러한 역사성이 고전의 후광으로서 권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전에는 그 실체를 이루고 있는 본원적인 깊이와 탕진되지 않는 지혜의 넓이가 있다. 고전을 단순한 옛 것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이 본원적인 깊이와 탕진되는 법 없는 통찰과 지혜의 용적이다. 가령 그것을 동양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공자 언행록인 『논어』 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잔말할 것 없이 『논어』는 동양의 지적 전통, 가깝게는 조선조 이래의 우리 지적 전통에서 유서 깊은 권위와 인구에 회자되는 인용에서 엿보이는 친밀성을 갖추고 있는 고전이다. 사서(四書) 중의 윗자리를 차지하며 대충 기원전 2세기 경인 한대(漢代) 초기에 집대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진정한 고전답게 많은 훈고와 해석의 책을 낳았다. 원전의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되는 고증과 해석을 낳는 힘이 바로 고전의 고전다운 까닭이랄 수 있겠는데 이 점에 있어서도 『논어』는 가히 범례적이다. 무수한 종파를 낳게 하는데 교조의 위엄과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공자의 위엄은 세계 굴지의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의 우리는 꿈보다도 해몽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실은 꿈의 원전으로부터 격리되어 해몽에 의거하고 있다고 할 수조차 있다. 따라서 대뜸 꿈의 원전으로 접근해 가는 데는 소흘치 않은 위험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2천5백 년 전의 외국어에 정통해 있지 않은 처지에서 우리는 불가불 후대의 해석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번역이란 것은 수용어로 된 해석이란 측면이 있다. 통역을 의미하는 interpreter 란 영어가 해석자란 뜻이기도 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나 고전 번역은 고전 해석의 국면이 짙은 법이다.) 그러나 정통(精通)한 지적 온축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조차 얘기해 주는 것이 많다는 것이 고전의 고전다움의 또 다른 국면이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고전 비극을 근대어로 읽는 독자들은 근대어로의 이행과정에서 많은 것이 증발되어 갔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무량한 소실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남아서 독자나 청증을 압도하는 층격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본원적 강건성이야말로 고전 특유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이 고전을 경험하는 것은 고증과 해석에 의해서 정교해진 해몽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본래의 꿈의 직접성과 강건성을 통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자와 『논어』가 환기하는 통속적인 심상은 근엄하면서도 덕성스러운 도덕군자와 그의 금언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류적 해석은 조선조 성리학에 대한 반동도 거들어서 널리 유포되어 있지만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일상 덕목의 열거는 『논어』의 특징적 성격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류적 이해를 타당성 있게 들리게 하는 '말씀'은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는 말에서 우리는 자기에게 엄격하며 도에의 정열적 헌신을 보여주는 준엄한 구도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아니하니 반드시 좋은 이웃이 생기는 법이다"는 대목은 오늘의 고독한 군중과 그 대종을 이루는 소인배에게 자괴감을 안겨주게 마련이다. "나이 사십이 되고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것으로 끝장일 뿐이다"라는 말은 참괴(慙愧)를 넘어서 우리를 절망케 한다.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이 미라는 것은 발레리의 정의이지만 군자되는 길이야말로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 뿐 아니라 고급 종교가 가르치는 행동지침에는 사람을 절망케 하는 대목이 많다. "오른손이 죄짓거든 그것을 끊어버려라"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내밀라"는 「산상수훈」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불가능한 일이라며 "먼뎃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망정 이웃은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항변을 또한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서 공자의 도덕적 요청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면보다 한결 지난한 것이다. 신약 복음서에는 초월적 종교정신에 걸맞는 내세 보답의 윤리가 내재해 있다.
「산상수훈」에는 보답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온다. 끔찍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이 되풀이되며 이르는 대로 하는 이는 지혜로우며 그렇지 않은 이는 어리석은 자라고 끝맺고 있다. 그것은 현세의 행동거지에 의해서 심판받고 선과 악이 모두 내세에서 걸맞는 보답을 받는 응보(應報)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지난한 선행은 연기된 구제의 보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상에 모인 추종자들은 선행이라는 이념 자체보다도 내세의 구원이라는 희구에 의해서 고무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도덕적 요청은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것 속에서의 자족적인 윤리에 기초하고 있다 현실적, 공리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내세 지향의 보답이란 생각은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덕을 쌓음으로써 이웃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낙이 될 수 있다는 공리적 자족성이 보답의 전부이다. 그 점 추종자에게는 더욱 지난한 덕과 선의 권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속류적 해석이 정당하게 지적하는 대로 공자는 소박 유물론에 입각한 현세적 합리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다. 자로의 물음에 대하여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는 괴상한 것과 폭력에 관한 것과 난동에 관한 것과 신에 관한 것은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仁)에 당하여서는 스승에게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란 말에서도 함리적 엄격성은 발견되지만 어쨌거나 어질음과 덕성스러움의 스승으로서 그의 풍모는 도처에서 보통사람들을 부끄럽게 해준다.
그러나 『논어』가 보여주고 있는 공자상은 통속의 그것보다 한결 복잡하기는 하되 원만하고 친근미 있는 전인적(全八的) 인간상이다. 우리에게서 아득히 먼 도덕적 초인이 아니라 더불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 여느 인격자의 모습이다. "만일에 나를 기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월(l년)만이라도 괜찮고 삼 년의 여유만 있다면 성공할 것이다"란 말에서 우리는 뜻을
펴지못한 정치가의 실의를 보게 된다. "젊었을 때 별반 관직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능을 익히게 되었다"는 말에서도 사정은 같다.
"가난하면서 원망함이 없기는 어렵고 풍부하면서도 교만함이 없기는 쉽다"란 대목에서 우리는 평범하나 정곡을 찌른 심리적 통찰을 읽는다: "가르치기만 하면 계층의 구별 없이 다 훌륭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을 앞의 대목과 연결시켜 근대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연결시켜 보는 것도 단순한 호사벽은 아닐 것이다. "웃사람이 예법을 좋아하면 백성들을 부리기 쉽다"는 말도 덕목의 실천을 위에서부터 본보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군자의 정치학이다.
엄격한 도덕주의나 종교적 청교주의는 자칫하면 도덕적 퇴폐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예술부 정론으로 흐를 공산이 크다. 그러한 역사적 실례는 적지않이 발견된다. 속류 공자상이 환기하기 쉬운 이러한 국면이 『논어』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시나 음악을 통한 정서교육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그 자신 정서교육을 자기 교육의 중요 원천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자께서 제나라에 있어서 순임금의 소라는 음악을 석 달 동안을 들으시고 고기맛을 알지 못할 정도여서 말씀하기를 음악이 이런 지경에까지 도달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소라 함은 일종의 교향곡 비슷한 것이라 하는데 공자 자신도 악기 금(琴)을 켰다고 한다. 또 시경의 3백 편도 모두 악기를 반주하는 가요이고 그 존중은 단순한 시 존중이 아니라 음악 존중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해석도 있다.) "시에 감분하며 예(禮)에서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는 대목은 그의 교육관이 단순한 윤리적 지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 교육을 통한 전인교육 지향임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禮가 단순히 형식적. 격식적인 것이 아니라 혹종의 종교적 제식이나 의례처럼 전신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며 심미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는 말로 미루어보더라도 즐김을 상위에 둔 것은 공자의 성향이 편향된 도덕주의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는 폭넓고 그릇 큰 구도자요, 합리적 현실주의자요, 냉철한 인간 관찰자요, 시와 음악을 숭상한 인문주의자였다. (그의 시대엔 서(書)조차도 실용적 기술일 뿐 그것이 미적 표현이란 생각은 정립되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동양의 고전 고대가 낳은 전인적 인물이었다.
상투화된 속류 공자상과 아주 동떨어진 인간상으로 드러나는 『논어』 속의 공자도 물론 역대의 훈고와 해석 속에서 조형된 인물이다. 공자에 한하지 않고 역사상의 모든 인물이나 위인이 속류적 단순성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인간상으로 굳어지고 기억된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어쨌거나 고전 『논어』는 수많은 일화와 금언 같은 '말씀'을 통해서 동양 고전 고대의 지혜롭고 덕성스러운 군자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서구 소설에서 얘기하는바 '납작한' 인물에 대립되는 '원형' 인물이다.
5. 고전의 힘
고전 중의 고전인 『논어』가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 특히 조선조 이래의 우리 전통에서 발휘한 기능은 무엇보다도 사대부 혹은 독서인의 수신제가의 지침서로서였다. 혹은 엘리트 집단으로의 신분상승을 꾀하는 사람들의 과거시험을 위한 필수 독서목록의 하나로서였다. 적어도 유가(儒家)에서는 마치 서양 쪽에서 '그리스도의 추종'이 그러했듯이 삶의 추종과 형성의 원본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시대적 추종의 교과서라는 성격을 사상하고 단순히 하나의 옛 고전으로 이 책을 대할 때 보통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인간 선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긍정적 인생론으로서 이 책이 매우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금언으로 축약된 지혜에 감동한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미 넘치는 그러면서도 그릇 큰 공자의 인간상에 감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간명한 언어와 평명한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언어와 표현의 간결한 강건성은 특히 영어 번역본을 읽어보면 그 특징이 드러난다. 그 사고의 평명성은 알게 모르게 유가사상이 우리 삶 속에 스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항목을 읽어보더라도 심오한 난해성이나 유현한 신비성과는 거리가 멀다. 처음부터 저작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공자의 언행을 기록했다는 발생학과 연관되는 국면이기는 하나 일상적 덕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일러주는 교사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량한 훈고와 해석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 는 명징성과 간결성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그 지혜는 어떻게 뽑아낸 것일까?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儀)는 이름난 것이고 그가 서(書), 시(詩)의 고전을 숭상하고 연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종일토록 먹지도 아니하고 밤새도록 자지도 아니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 토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인류의 유아기'라 부른 바 있는 고대에 있어 시인이나 철인은 대체로 지적 전통의 과도한 부담이나 매개에서 자유로운 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인간현실을 유아적 경이와 발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 결과 간명한 표현으로 집약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현실과 인간행동의 원형적 상황을 집약적으로 포착하고 그 윤곽을 또렷하게 부각시킴으로써 간결한 명징성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심리묘사나 인정의 기미는 사상한 채 극한적 원형적 주제나 줄거리만을 부각시키는 고전비극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고전비극과 견주어볼 때 근대극이나 근대소설이 잔소리나 자질구레한 세목의 나열이라는 감개를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전비극이 주는 충격적인 감동은 그 원시적 사나움과 함께 고대적 단순성에서 온다. 『논어』에서 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고대적 단순성이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강변의 사색이 갖는 호소력은 그것이 아마도 최초의 발언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사한 감개의 토로는 그후 얼마든지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인류의 유아적 경이나 최초의 원형적 감개와 접하는 것이고 상호텍스트성이라는 혼합적인 메아리의 단초와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후속의 메아리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강건하고 뚜렷하며 싱싱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득한 역사성이 지니게 마련인 고유의 '옛 것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논어』이건 그리스 고전비극이건 삶과 사람에 대한 명상과 성찰을 담고 있지만 모두 도덕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좁은 의미의 도덕이 아니라 매슈 아놀드가 지적한 대로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문제와 유관한 것은 모두 도덕적이라는 넓은 의미로서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고매함과 숭고함을 지닌 위대한, 그러면서도 보통사람에게는 범례보다는 경고로 작용하는 인물임에 반해서 『논어』가 권면하는 인물은 원만하고 덕성스러우며 이웃과 더불어 즐기며 살아가는 낙천적 현실주의자란 점일 것이다. 『논어』에는 즐긴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행복하지 않고서는 어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시사로 읽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심리적 기미를 쉽게 간파하는 섬세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공자는 세상의 자그마한 일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상중에 있는 사람 옆에서는 배불리 먹지 않았고 곡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삶의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그것이 곧 문화이다)이 풍성하지 못했던 인류의 유아기에 있어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그 물음은 치열하고 빈번하고 초급한 것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소외라는 개인적 불우가 혹종의 사상가로 하여금 사상적 유리점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시각과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문화적 매개나 기존의 해답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채 세계와 대지의 신비를 생각하고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계기와 필요성은 인류의 유아기에서일수록 초급하고 절실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고전 속에서는 질박하고 단순한 대로 이 근원적인 것과의 대결에서 생겨난 정신적인 반응과 응답이 엿보인다. 강건하고 단순하면서도 후대의 번쇄(煩碎)함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 고전의 본원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자 그대로 언행록인 『논어』에는 체계적인 내용 분류나 배열의 순서가 없다. 애당초 그러한 분류나 순서 설정이 무의미하다. 그것은 이 책의 발생학과 관련되는 사항이지만 선행 저작의 구속을 별로 받지 않은 단초성과 연관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인공과 인위의 간섭
이 배제된 자연의 숨결을 느킨다. 고전은 선행 저작과 경쟁하지 않고 자연과 경쟁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양고전의 성격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국면에 주의를 돌리는 것도 쓸모있다. 문학작품을 내용과 형식이 합일된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하는 관점이 있다. 그런데 책의 내용과 체재 사이에도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 동양 고서는 대체로 장정이나 표지가 요란하지 않다. 색인 항
목도 없다. 목차가 있는 경우에도 대략적인 것이고 쪽수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효율성과 능률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용하기가 불편한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은 독자에게 편의적인 책읽기를 거부하면서 통독을 요구한다. 필요한 대목만 찾아서 참조하는 사무적 속독이 불가능한 체재다. 한편 장정이나 표지가 담담한 무표정을 특색으로 한다는 것은 책 내용 이외의 외적인 요소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겠다는 진정성의 선언이다. 요컨대 책 내용 자체에 끌린 독자로 하여금 철두철미 통독을 요구하는 체재인 것이다. 상업적 동기에서 책도 만들고 또 유통시킨 것이겠지만 그것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동양 고서의 이러한 전근대성에 고전의 고전다움이 구현되어 있다 해도 망발은 아닐 것이다. 고전이 읽혀지지 않는 대신 고전의 축약적 참고서가 널리 읽히는 것은 고전적 희화이다.
4. 인문주의 형성 이념의 시련
고전이란 본시 옛 책이나 옛 경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이 특정 분야의 권위서나 명저 또는 뛰어난 문학작품을 가리키게 된 것은 서구어 클래식 classic의 역어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최고계급을 뜻하는 라틴말을 어원으로 하는 '클래식'이 저쪽에서 숭상으로 말미암아 반열에 오른 옛 저자를 가리켰다가 저작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로마인들은 일정한 고정수입을 가진 최고계급을 CIassici라 불렀다. 생트 뵈브에 따르면 기원 2세기 로마의 법률가였던 아울루스 젤리우스Aulus GeI1가 최고계급을 뜻하는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저작자에게 적용한 것이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당초에는 그리스의 시인 철학자를 가리키면서 전범으로 삼았다가 차츰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로마인도 포괄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다소간의 가치 혼란이 야기되었으나 르네상스기에 와서 현재 통용되는 고전작가의 서열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저쪽의 사정이다. 고전의 숭상은 l5·l6세기의 학문 부흥과 관련되는 것이고 이 시기 인문주의의 여러 경향의 소산이었다. 참다운 교양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고전 고대로 돌아가자는 자각적 기운이 농후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전에 대한 검토는 교양이념의 참조를 요구한다. 그 점에서 인간성 존중을 지향하면서 특히 교양의 형성력에 주목한 l8세기 말 독일 인문주의의 동향은 참조에 값한다.
인문주의와 교육 중시는 불가분의 것이지만 그 관계가 특히 현저한 것이 독일 인문주의다. 성장소설 또는 교양소설이라 번역되는 Bildungsroman이란 특정 소설 장르를 낳은 것이 이 시기 독일 인문주의의 풍토라는 것은 역사의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교육을 가리키는 독일어 Bildung이 다양한 지시적 의미와 함의를 가지고 있어 번역하기 어렵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발전, 성장, 생성과 같이 유연하고 점진적인 것을 가리키는가 하면 구조나 구성과 같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양성, 문화, 교양, 문명을 의미하고 능동적인 형성과 수동적인 형성됨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련을 통한 이니시에이션이라는 함의마저 지니고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교양을 통해서 사람다움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헤르더의 정의가 그 기초에 깔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형성'의 이념이 계몽주의의 추상성과 합리주의 편향을 비판하면서 이성과 감성이 합일된 조화로운 인격 개념을 지향했음은 가령 '아름다운 영혼'의 이념에서도 그 일단을 추측할 수 있다.
지난날의 최선의 정신 소산과 친숙해짐으로써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덕성을 구현할 수가 있으나 그것은 힘겨운 노력과 시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이 '형성'의 이념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와 강조점에 차이는 있으나 이것이 인문주의 교육 이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문주의의 형성 이념이 사람다움으로 올라서는 것을 지향하는 이상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면적인 자기완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윤리적으로 건강한 시민적 덕목의 구현을 지향한다. 이때 도덕적 건강을 편향된 청교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편협한 청교주의가 인간성의 억압이며 사람다움으로 올라서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바이런에 대해 도덕적 유보감을 표시한 대담자에게 괴테가 한 말은 문학적 입장을 떠나서 인문주의의 형성 이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바이런의 용기, 대담성, 웅대성, 이 모든 것은 인간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교양(형성)에 유익한 것을 항상 순수히 윤리적인 것 속에서만 구하는 일이 없도록 유념해야 하네. 대저 위대한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유의하기만 한다면. 인간 형성에 유익한 것이라네(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828년 l2월 16일).) 내면적 자기완성과 시민적 덕성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서 전면적 인간이란 이념 속에 통합되어 있었다. 형성 이념이 시민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면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교양을 갖춘 덕성스러운 시민들 사이에서 비로소 조화로운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주의가 강조한 교양은 대체로 문학, 철학과 같은 인문적 교양이었고 그 구체적 매개가 고전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가다머가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이념'이라고 부른 형성의 이념은, l9세기에 와서 그 인문주의적 함의가 도전을 받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정당성과 우위성을 주장하는 자연과학, 그리고 그 후반기에 이르러 발흥하기 시작한 사회과학이 인문적 교양의 한계를 가리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분화는 일찌감치 전문적인 직종주의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전문직종 혹은 기술직종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인문주의적 형성 이념이나 교육 이상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교육 받는 쪽에서도 경제적, 사회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단순한 사회적 인정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교육관을 수용하게 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육 받는 것이 득이 된다는 수지타산으로 교육에 임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교육 이상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은 20세기의 역사에서 나온다. 개인의 감정과 지성을 교화하고 순화하면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 자연히 이성적인 덕행과 선행이 미만하리라는 희망적인 관측은 무실하고 무근한 것임이 부분적으로 드러났 다. 인문주의 훈련이 인간 존엄에 걸맞는 기품 있는 사회행위로 이어진다는 실증되지 않았던 공리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매슈 아놀드와 같이 실제적인 것을 존증하는 지적 풍토에서 태어난 인문주의자가 기대했던 학교 교육의 개선과 사회의 개선 사이의 밀접한 관계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모르지만 대체로 희망적 관측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20세기 특유의 정치적 야만주의가 내면성을 강조하고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이념이라던 형성 이념을 낳은 독일에서 풍미했다는 것은 인문주의 교육 이상에 대한 냉소적인 도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사회경제적 정황 설명도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한 정상참작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뒤이은 이차대전 전후의 사태 발전도 문명과 문화에 대한 낙관론을 고무하지 못할 만큼 냉엄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냉전체제에 부수한 세계적 대립상황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계몽주의 이래의 불굴의 믿음을 비록 그것이 소수파의 것이었다손 치더라도 다시 휘청거리게 하였다. 선진 산업사회가 초래한 '일차원적 사회'는 사회의 억압적인 관리를 특징으로 하면서 사람들을 전면적 관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괴로운 자의식을 낳게 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은 정치한 진단에 대응하는 처방의 결여에 의해서 스스로 강조되고 있다. 한편 인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에 역점을 두었던 인간해방의 이론과 실제는 구제할 길 없는 현실과의 괴리를 낳음으로써 그 지향과 모색의 정당성에 대한 원초적 회의를 낳은 것이 작금의 사태 진전이다. 전통적 인문주의도 고전적 계몽주의도 인류의 꿈을 의탁할 별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감개를 낳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 현실파악은 의지할 만한 처방으로 이어질 성 싶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연속성에 기대어 아직껏 존속하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자랑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존속의 엄연한 사실이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와 인문주의의 인간 존엄 지향에 가날프게 의존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정에서 썰렁한 위안을 구할 수도 있다. 세계의 운영과 인류의 존속에 기여한 것이 그 전폭적 성공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인간 긍정에 기초한 계몽주의와 인문주의의 순기능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망 없는 사람에게만 희망이 주어진 것이라면 그 희망의 원천은 아직 유서 깊은 과거의 지혜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 확실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달리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고색창연하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여전히 인문주의의 교육이상과 형성 이념에 대한 믿음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지난 날의 최선의 정신과 영혼으로부터 인간 이성과 덕성이 아름답고도 유용한 것이며 인문적 훈련에 의해 도야받은 감성과 지성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을 형성한다는 관점을 보유하고 전파하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대체할 건설적 원리도 실천적 강령도 아직은 구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화와 세분화가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인적 자이성취라는 이념은 정체성의 취득과 관련하여 그 절실함을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사태의 바른 진단일 것이다.
5. 고전과 정전(正典)
갖가지 형태의 교육공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문주의 교육이상을 재천명하는 것은 공허한 소동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촉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넓게는 형성, 좁게는 교양교육이라는 맥락에서이다. 공적인 교육에서든 사적인 자기교육에서든 '고전'은 필수적인 학습대상으로 규정되고 있으나 그것은 명목상의 일이고 실질적인 면에서는 표방과 실천이 철저하게 괴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특정 분야의 명저나 권위서라는 의미의 고전은 해당 분야 학습자에서 읽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극소수의 전문분야 학습자에게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교육 혹은 교양교육 수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실정이다. 대학과정의 이른바 교양과목 분야처럼 십년이 한결같이 고색창연한 되풀이로 일관되어 있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고전'을 읽혀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당위로서 널리 강조되고 있으나 막상 무엇 무엇을 고전이라고 분류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그 '고전'이 과연 쉽게 구해서 접근 가능하도록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고전' 읽기가 고식적인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고전'을 우리의 것, 동양의 것, 서양의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저마다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것도 20세기 이전의 것은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한문은 기천 개의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해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숙달에 전문적이고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한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에 의지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비평적 합의에 도달한 번역 정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대학 수준에서 읽어야 하는 '고전'에는 몇 가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우리와 동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고전으로 읽어야 할 것을 선별적으로 지정한 정전(正典)이 책정되어야 한다. 가령 동양 전통에서도 『논어』나 두보를 포함하여 어디까지가 읽어야 할 적정대상인가 하는 것의 책정이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는 무엇을 취할 것이며 불교의 경서도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 것 가운데서 『삼국유사』를 포함시킨다면 문학 쪽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단순히 옛적에 씌어졌다는 이유로 과도한 숭상을 하는 것은 '고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 터이다. 옛 시조나 몇몇 소설작품 이외에 '정전'으로 공인된 것은 많지 못하다. 따라서 '정전'의 책정이 어느 정도의 비평적 합의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정전의 접근 가능화가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다. 즉 책임질 수 있는 정전의 번역이나 주석본이 필요하다. 뜻의 전달에 있어 소루함이 있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유려하고도 감칠맛 나는 글결과 글체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의 경우 근대의 성서 번역이 그후의 문장과 문체에 커다란 순영향(順影響)을 미쳤다. 그만큼 문체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만 읽고도 큰 시인이 태어날 수 있었다. '문학으로서의 성서'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문학작품으로 읽더라도 훌륭한 것이고 그것은 부분적으로 글체와 글결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무룻 고전도 그와 같아야 한다. 실상 그러지 않고서는 고전이 될 수 없다. 비문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사상가나 철인치고 치졸한 글을 남겨놓은 사람은 없다. 고전 번역에 있어서는 각 분야의 권위자나 대가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담당해야 할 것이다. 가령 라트비아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한 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영어로 번역해 놓고 있다. 학자로 대성한 뒤 소년기에 감동 깊게 읽은 작품을 '사랑의 노동'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 번역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고전 번역이 자꾸 나와야 비로소 고전이 고전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되어 있지 않은 셰익스피어 번역은 아무리 많이 나오더라도 필경은 신파극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대사의 시를 빼고 나면 셰익스피어의 줄거리는 유혈낭자한 복수극이나 신파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오역과 서투른 번역 때문에 소모하게 되는 시간과 거기에서 말미암은 독서속도의 저하는 실증적 측정방법이 생겨난다면 엄청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셋째, 문학 고전에서는 앞서 얘기한 글결과 글체 부분이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문학의 경우 대담하게 근대 쪽으로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근대문학이 단연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한글 고전소설의 문체는 그 나름의 미점이 있지만 청소년의 글쓰기에 있어 모형이나 범례 구실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형에 근접하자면 양질의 근대 및 현대문학에서 모형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근대시와 현대시의 우수시편을 많이 접하게 함으로써 말에 대한 감각과 엄격성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현대시는 그 수량에 있어 많은 편이 아니다. 전부를 통독한다 하더라도 한두 달 안에 끝날 것이다. 그리고 서사문학과 비교한다면 한결 밀도 있는 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1언어에 대한 세련된 수용태도 없이 외국어에 대한 이해능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l언어 이해와 구사능 력이 결국은 외국어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할 사항이다.
고전은 어떠해야 하는가
교육의 목표는 전인적 완성, 사회 속의 개인으로서 자립, 세계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성취하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 성취를 위해서 전범이 될 만한 예로부터의 지혜를 구현한 책이 고전이다. 그러므로 고전의 정전을 책정함에 있어서도 몇 가지 가치기준의 설정이 필요해진다.
인문주의 교육이상에 있어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문학 고전은 그 향수나 교육이 시인이나 문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전문적 문학인은 전체 인구 중에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 않으며 차지해서도 안 된다. 문학 고전의 형성력을 통해 지성과 감성 이 연마되고 세련된 인물을 계발하자는 것이 전제된 가정이다. 언어 동물인 인간이 언어에 숙달하고 여러 표현에 민감하며 엄격해진다는 것은 결국 '사람됨으로 올라서는 일'과 같은 것이 된다. 글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말이야말로 사람이다. 말에 대한 민감성과 엄격성은 곧 사람됨의 민감성이요 엄격성이다. 인문주의 전통에서의 문학 숭상은 이러한 깊이의 차원에서의 사안이다. 말에 대한 기율은 곧 사람됨과 관련된 기율이다.
심미감과 유리된 문학에 대한 숭상은 그 도덕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람됨에 대한 관심의 철회와 진배없다. 그점에서 동양전통에서 시를 숭상한 것은 매우 현명하고 의미 있는 조처였다. 중국시의 향수나 한시(漢詩)의 시작(試作)이 갖는 의미는 문사취미나 문인취향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근대문학자 가운데서도 한문에 대한 소양이 인품과 인품의 반영으로서의 격조 있는 글을 낳았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 만한 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시와 한문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 대체로 헤프지 않은 글을 남겨놓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삽화적인 사실로 머무르지 않는다. 고전적 절제나 품위는 글에도 사람에게도 함께 해당된다. 글이 현실에 가까이 가면서도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 국면도 성찰에 값하는 것이다. 미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합일한다.
우리의 옛 고전문학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 호소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 문학고전에 관한 한 그 정전 구성에 있어서도 이러한 측면이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감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취향 또는 감식안이란 것은 모호한 것이다. 또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심미안이 다분히 외래적인 것에 의해서 길들여진 면이 있고 따라서 전통적인 것에 대해 불가불 거리감을 갖게 마련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단지 옛 것이며 희귀한 것이라고 해서 고전이라 숭상될 수는 없다는 점은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형성에 있어서 미적, 정서적 충격도 중요하다는 것은 되풀이 강조되어 마땅하다.
우리의 지적 풍토에서 근자에 크게 풍미한 것은 지적 급진주의다. 지적 급진주의는 서구 지적 전통에서 19세기 이후의 것이며 따라서 그쪽의 고전은 이를테면 근대의 고전에 속한다 지적 급진주의가 강조한 것은 사회의 변혁이며 인간 사고와 사상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한 천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과거의 지적 유산에 대한 이데올로기 폭로에도 역점이 주어지고 고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때로 냉소적 감개를 수반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사회 속의 인간을 부각시키면서 인문주의 형성의 이념도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형성 주체의 강조가 결국은 근대 개인주의의 표현이라면서 개인 주체의 허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변혁 없이 개인의 변혁을 기대할 수 없는 그만큼 개개인의 변혁 없이 사회의 변혁도 기대할 수는 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 인간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현실에서 비관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최근의 세계변화가 보여준 귀중한 교훈이다. 따라서 고전 정전의 구성은 근대의 고전에 편향됨이 없이 인간 존재와 현실에 대한 본원적 접근이 인류의 유아적 외경과 의문 속에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고전에 대한 경의를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가 이룩한 발전이 도구적 이성의 곡절 많은 성과라 하더라도 그 결과 인류가 누리는 편의와 수혜가 만만치 않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논리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그만큼 환경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유와 필연의 두 개 항목 증에서 자유를 지워버리면 선택도 책임도 증발해 버린다. 모든 것을 환경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됨을 포기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억압적인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도 개개인의 집합이지만 억압적인 질서의 악순환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주체성의 자각을 통해서이다. 책임 있는 자각적 시민을 형성함에 있어 기여할 수 있는 고전에 대한 중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정전 구성은 결국 우리 사회의 지적 역량을 반영한다 또 구성된 정전의 현실화 역시 우리 사회의 지적 역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현실화가 빈약하게 실현된다면 그것은 역사가 늘 새롭게 씌어져야 하듯이 되풀이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유례 없는 문화적 역량의 폭발로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전의 정전으로 받들 수 있는 무게 있고 믿을만한 책은 많지 못하다. 결국 본원적인 것보다 파생적 이차적 텍스트가 범람한다는 말이 된다. 정전 구성과 그 접근 가능한 현실화에 지적 역량이 모아지고 그 결실이 개개인에게 심도 있게 내면화될 때 우리 사회는 그만큼 인간화되고 그만큼 성숙해질 것이다. 대중문화의 비속한 감수성이 지배할 때 사회는 그만큼 비속해지고 삶의 질 또한 그만큼 천박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점진적인 인간화는 보다 인간화되고 사람됨으로 올라선 개인의 확대없이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