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어윤중 어사리(魚死里)서
최후 |
작명을 잘 해야 운수가 좋다고들
한다. 때문에 내게 상호나 작명을
부탁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런 것은 작명소나 철학관에서 할
일이라며 은근히 뒤로 미루긴 하지만 한번은 정말 거절할 수 없는 작명 부탁이 들어왔다. 그 분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셨기에 참으로 난처했다.
"웬만한 이름은 전부 상표등록이 되어 있다 합니다. 저는 이번에 큰 돈을 벌고 싶습니다. 정말 좋은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이기에 아무 이름이나 드릴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내가 작명
전문이 아니지 않던가. 나는 그에게 "그럼 한일(一),
빛날 혁(赫)을 쓰셔서 일혁개발이라 하십시오."
그러자 "이건 법사님 부친의 존함이 아니십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ㆍ
"분명 제 아버님 존함처럼 한번에 크게 빛날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덕을 쌓으십시오." 그랬더니
상호등록을 하자마자 사업이 크게 일어났다 한다. 나를 볼 때마다 항상 고맙다는 말씀을 잊지 않는 그
분. 단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부친처럼 한번에 불타오르는 별이 되진 마시라는 것.
이렇듯 이름은 사람의 운명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어떤 이름을 갖고 임하느냐에 따라 세상 살아가는 게 달라지는 듯. 구한말 때의 일이다. 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은 아관파천을 감행한 뒤 당시 김홍집
내각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을 내린다.
명성황후의 시해는 민중들에게 더없는 분노였다.
그들은 김홍집 내각이 친일파며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체포령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성난 군중들은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이었던 정병하를 종로 바닥에서 척살했다.
군중을 피해 도망간 탁지부 대신 어윤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급히 한양을 빠져나가 일단 도피행각에 성공했다. 그런데 하필 그가 도망친 곳이 용인 근방에 어사리(魚死里)가 아닌가. 어윤중은 도피 중
"여기가 어디요?"라고 묻곤 기겁하고 만다. "어사리라니? 물고기가 죽는 마을이 아닌가?" 마침 성이 어씨였던 그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군중들에게 발각돼 맞아 죽고 마는데.
유사한 얘기는 삼국지에도 있다. 유비에겐 두 명의
군사(軍師)가 있었으니 와룡봉추가 그들이다. 봉추
역시 낙봉파(落鳳坡)라는 곳에서 죽지 않았던가. 봉이 떨어져 죽는 고개라는 그 곳에서 봉추가 참혹하게
전사했으니 정말 지명과 팔자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인
듯.
지명에 대한 전설은 현재에도 계속된다. 현재 청주
국제공항의 활주로는 참으로 묘한 지명 위에 건설됐다. 즉,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 끝에 있는 곳이
비하리(飛下里)이고 항공기가 바람을 일으켜 이륙하는 곳이 비상리(飛上里)라 한다. 정말 위치하나 안
틀리고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는 지명이 아니던가.
영종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원래 '제비섬'이라 불렀던 섬을 조선 중기부터 영종도라 부르게 됐다 한다. '영종(永宗)'의 의미는 한자 그대로 긴 마루이니
제비가 긴 마루 위를 날아드는 형상이 바로 영종도
인 것이다. 몇백년이 지난 후 이곳에 세계적인 국제공항이 들어 설 줄 미리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잠실에 찾아오는 많은 분들을 만나오면서 이름과 운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좋은 이름을 갖고
계신 분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강한 운으로 세상을 버텨나가고 아무리 운이 좋다 해도 이름이 좋지 않으면
곳곳에 파져있는 함정마다 빠지곤 하는 것이다. 이름
따라 가는 팔자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우주의 또
다른 법칙인 '필연'에 의해 지어지는 이름. 나쁜 이름도 좋은 이름도 어찌 보면 정해진 운명인지도.